칼빈의 칭의 개념“사람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구원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깨닫고 소유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면 두 가지 은혜를 받게 된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마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신다. 그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흠이 없고 순결한 삶을 배양하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한 사람이 믿음으로 혹은 행위로 의롭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2-13)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프리카 선교 동역자 여러분,어느덧 눈바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하게 살랑대는 봄바람에 활짝 핀 꽃들로 만발한 조국을 그립니다.적도가 지나는 이곳 우간다는 한 몇 개월간 건기(乾期)로 더위로 찌들었었는데 요즘 우기(雨期)가 시작되면서 아침 저녁으로 좀 지낼 만하답니다.코로나 팬데믹이 수그러들면서
제5문.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칩니까?답. 성경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딤후1:13, 신10:12-13, 요20:31, 딤후3:15-17). 성경의 기록목적.우리가 보통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전해주려고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글을 시작하며신학은 사유하는 학문이 아니라 발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인간의 생각을 개진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신학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상들이 버젓이, 또는 교묘하게 진리 노릇을 하고 있다.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능동순종 교리”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능동순종 교리를 비판하면서, 이 주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는 웨신서
제3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답. 거룩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앙과 순종(믿음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딤후3:16, 벧후 1:19-21, 엡2:20, 계22:18-19, 사8:20, 눅16:29-31, 갈1:8-9, 딤후3:15-17).제4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답.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체로 그 장엄함과 순수함, 모든 부분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의 의도에 의해서, 죄인들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제2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답.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참된 빛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명백하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만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충족하고 효과 있게 계시합니다 (롬1:19-20, 시19:1-3, 행17:28, 고전2:9-10, 딤후3:15-17, 사50:21). 죄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을
글을 시작하며마13:31-33과 눅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이에 대해 이동원 목사와 찰스 스윈돌 목사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었다(본 글 에서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만 다루고, “누룩 비유”는 다음 에서 다룰 것이다).“12명의 제자들, 머
(임진남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해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시간입니다. 임진남 목사의 수고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큰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__________________제1문.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답.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롬11:36, 고전10:31, 시73:24-28, 요17-21-23).__________________ 목적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용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지극히 내성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한 남자가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다.상담자:당신을 괴롭히는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내담자:저는 동성애자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정말로 두렵습니다!상담자: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두렵다구요?내담자:예상담자:"만약 동성애자가 된다면" 그 일 때문인가요 아니면 "무엇" 때문인가요?내담자:모르겠어요. 그것은 실제로 저를 지치게 만들고 있어요. 또한 저는 언제나 매사에 불안합니다.상담자:알겠어요. 그러면 아까 질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할까요? "만일 내가 동성애자라면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 말
요즘 현대인들은 성도의 견인을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끌어 주시는 기관차의 머리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신다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일부 대학선교 단체들의 간편한 복음전도식의 가르침이다. 복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팽배하다. 믿음의 조상들이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가르칠 때 그 속에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일지라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복음을 통해 부르신다. 하나님은 택자들이 회개하고 믿도록 복음으로 진지하게 부르신다. 하지만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이 다 구원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은 철저하게 이성주의를 따른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항하여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실 때 그 부름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그 일의 권한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의 주장은 “인
제한 속죄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택하신 자들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제한 속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진 자들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있다. 아르메니우스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개혁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고 개혁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
들어가는 말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알고 있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복음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배웠고, 지금도 대부분의 학자들과 주석서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백과사전에서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아람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소개하고 있다.그러나 11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중동 전문가 류모세 선교사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예수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이름이다. 성자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실 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이름을 취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름을 취하셨다고 해서 성자의 능력과 권능이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 속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는 제한된 개념이 이미 존재한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신의 백성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불리는 교리적 메시지를 통해 현대교회가 어떤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먼저 거의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알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사실 개혁교회자체에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르미니우스(1560-1609)라는 교회 장로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다섯 가지 주장에 항론하여 만들어진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사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라 1618-1619년에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개혁교회가 아르미니우스의 반기독교적인 주장에 대하여 거짓이라고 만장일치로 결
글을 시작하며2021년 11월 16일 [기독교포털뉴스]에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는 제목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 33회 정암신학강좌서 김병훈·박상봉·이승구 교수 재천명”이라는 소제목으로 ‘하나님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김병훈, 박상봉, 이승구 교수의 강의를 정윤석 기자에 의해 요약 보도되었다.물론 필자는 이 강의들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요약 기사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고 주장
글을 시작하며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이 마치 영생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의 웨신서 7장 2항은 매우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영생)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웨신서 7장 2항의 이 오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방치함으로써, ‘능동순종’과 같은 터무니없는 돌연변이 교리가 김병훈, 방상봉, 이승구 교수 등에 의
우리는 행위언약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반성 없는 신학 개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위언약이 웨민신앙고백서에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성경처럼 무오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서에 대해 어떤 흠을 찾아 신앙고백서 전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화초 가운데 포인세티아가 있다. 그 꽃의 붉은 색깔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에 성탄절에 널리 사용되는 화초이다. 멕시코와 과테말라가 원산지인 이 꽃은 1828년 조엘 포인세트에 의해 알려진 뒤 성탄을 장식하는 나무로 유명해졌다. 멕시코에서는 이것이 17세기부터 성탄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화초는 춥고 캄캄한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한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냉기가 감도는 공간에서만 잎이 붉어진다. 일반적으로 포인세티아의 꽃이라고 부르는 적색 부분은 사실은 꽃이 아니고 꽃을 싸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