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단들과 조용기, 문희곤, 하용조 목사의 사역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는 행위구원론을 퍼뜨리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이신칭의’ 교리는 사라지고 다시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행위구원론이 한국교회를 뒤엎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전혀 검증 되지도 않고, 심지어 명백히 문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 하여 칭송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교리가 무너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이 반펠라기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존경할만한 신앙인이면 그들이 교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들이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행위를 보고 판단한다.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 외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근거는 오직 ‘행위’이다. 특히 권세의 자리를 버리고 오지로 들어가 약한
“교회론은 어느 교파든지 교회든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교회론을 경계해야 한다. 신학적인 교회론은 그 시대의 사상과 현실적인 문제와 혼합되어 있다.”(하용조)하용조 목사는 교회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신학적 교회론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교회론이 있겠는가? 아마 성경적 교회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학적인 것은 시대적 사상이 혼합되어 있을 수 있으니, 성경적 교회론으로 가자는 것이다. 성경적 교회론의 모델로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신학적인 것을 탈피한다고 자동적으로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 목사가 어떤 교회론과 예배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파헤쳐 보자. 그가 입으로 어떤 말을 할지라
신비술사(오컬티스트)들의 기술들은 전 세계에서 활용된다. ‘형태화(manifestation)의 법칙’을 통해서 마법을 이루기 위해 신비술사들은 항상 과학적 기술을 사용했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발언 그리고 구상화(visualization), 이 세 가지 방법 모두는 지금 복음적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사용되고 있다. 이런 오컬트 기술의 전도사가 조용기 목사이다. 긍정적으로 말하기(고백)에 대해 조 목사는 주장한다.“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임재를 만들어야...그(예수)는 당신의 입술과 당신의 말에 묶여 있다...”(조용기 목사)가장 파워풀한 오컬트 기술인 ‘구상화’에 관해서 조 목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시각화와 꿈을 토해서 당신의 미래를 품고 그 결과를 부화시킨다.”(조용기 목사)
아모스는 북 왕국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야모스는 남유다 출신이라는 것이다. 남 유다 출신일 뿐 아니라 그는 전통 선지학교 출신도 아니다. 그는 ‘드고야의 목자’였다.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이다.“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는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는 것과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을 쏟아 놓는데 그 상대는 먹이를 앞에 둔 숫사자와 같이 날선 발톱을 세우고 갈기를 치켜올리며 소리를 지르는 형국이었다. 또한 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과
망령되게도 조용기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예수의 긍정적인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는 듯이 말했다.“어떠한 문제에 직면하든지, 부정적으로 드는 생각을 스스로 설득하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당신도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조용기)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 이야기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받은 줄로 마음에 확신이 들어오고, 받았다고 생각이 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게 될 때까지 기도하였으면 이제는 기도의 말을 달리해야 합니다. 받은 줄로 확신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낫게 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미 구했으면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셨으니 김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미 고쳐주셨으니 더욱 낫게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만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한 말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복음이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교회만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한 사람을 구원과 성화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성령의 역사는 말씀 선포 때에만 일어나고, 말씀은 오직 교회에서만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는 개혁주의자들도(루터나 칼빈) 동일하게 말하는 내용입니다.그렇다면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 교회에 속한 자들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크나큰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회심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역
2007년 1월 10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트랜스포메이션 2007’ 행사의 준비위원장 홍정식 목사(신사도운동의 거짓사도)는 설교하려고 온 조용기 목사에게 “장로교 목사로서 조용기 목사님의 성령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했던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무릎을 꿇었다. 홍정식 목사의 발언이 있고 난 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목사들도 조용기 목사에게 회개를 하며 무릎을 꿇었고, 조 목사는 그들을 감싸 안고 기도를 해줬다.이 사건 이후(2월 6일) 홍정식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대부흥회 첫째 날 강사로 등단했다. 홍정식 목사는 성령께서 조용기 목사를 비판한 것을 회개하라고 촉구했다고 했다. 기도로 회개할 뿐 아니라 속죄헌금 1,000만원도 바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조용기 목사의
예수전도단은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교회 기성세대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용기 목사이다.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끌고 있는 조용기 목사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는 셀 교회 열풍이 불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에는 각 지체가 있고 그 지체 안에는 최소한의 살아 숨쉬는 단위인 셀(세포)이 있다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연구된 셀 교회 이론은 한국교회의 목사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셀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랄프 네이버 박사도 자신의 연구 작업을 ‘제2의 종교개혁’이라 부를 만큼 혁신적인 것이었다. 전통방식에 젖어든 한국교회 목사들은 앞 다퉈 셀 목회를 개 교회에 접목시키고자 하
영지주의적 ‘하나님 음성 듣기법’에 관해서는 예수전도단의 여사제와도 같은 조이 도우슨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실 한국인 문희곤 목사는 조이 도우슨에 비하면 단지 나팔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조이 도우슨은 YWAM안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영적지도자다 ... (중략) 조이 여사는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를 때조차 하나님께서 어떤 색깔을 칠하면 좋을지 물어본다는 거였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문희곤 목사, 예수전도단 대표)조이 도우슨에 비하면 한국 예수전도단이 하는 일들은 아이들 놀이에 불과하다. 그녀의 사역에는 일상적인 것, 합리적인 것, 평범한 것은 없다. 기적과 이적, 특이함 등이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증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 형성을 보자. 제1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바울은 바나바에게 말씀을 전했던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자고 제안하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바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차 선교 여행 당시 여정이 힘들었던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선교팀으로 마가를 합류시키는 일로 크게 다투게 된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팀 구성을 하는 도중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안디옥으로 떠나게 된다.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평판이 좋은 디모데를 만났고 그들은 한 선교팀이 되었다.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우리는 하나님 음성듣기를 매우 강력하게 예수전도단 대표 문희곤 목사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야 한다. 그 설교가 옳고 그른지, 그 글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다. 우리도 베뢰아인들처럼 성경을 상고해 보자. 무조건 덮어 놓고 믿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요한복음 10:27을 근거 구절로 보여준다.당신은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는가? 간접적으로 듣고 믿는 것과 직접 듣고 믿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당연히 직접 듣는 쪽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일부 사람만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 음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특권이라는 진리를 받
예수전도단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문희곤 목사의『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를 보았다. 이 책을 통해서 예수전도단 사람들이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나는 예수전도단의 묵상과 중보기도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하여 그대로 순종했는데, 결과가 정반대로 흘러간 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의문부호가 뗘오르기 시작했다 ...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성경적이고 체계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문희곤 목사)문희곤 목사의 경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온 사례 즉, 이런 저런 시행착오 후 점점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발견되는 모습,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권세를 이양하고 사십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6-11). 이 사건 이후로 이제 그 누구도 사도들과 같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부활 후 사십일 동안 경험한 일들을 그 누구도 다시 경험하지 못한다.이제는 간접적으로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다. 스데반이 환상 중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본 것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러한 일은 매우 독특한 경우였고, 다른 사도들의 직접적 경험과는 다르다.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알고 있었으며, 직접 들은 것을 증언할 수 있었으며, 죽었다가 완전히 육체로 부활하시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언할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인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큰 토론이 일어났다. 이방인들도 유대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들에게 큰 멍에를 씌우려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굳이 할례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학적인 연설이 큰 효과를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연설한 야고보에 의해 대세를 결정되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하면서 그 일이 지금 성취된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들어주었다.그러나 배려심이 많은 야고보는 단칼에 유대주의자들을 내리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몇몇 행위들, 즉, 우상에게 바진 고기를 먹는 것과 피를 먹는 것과 목매어 죽인
180년경 리용 교회를 담임했던 이레네우스 주교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날 이단을 전수하는 자들의 관점을 게시하고...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진실과 어긋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이 책을 읽은 자들은..,지인들이 그러한 광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의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라.”이레네우스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책들 중 진리복음서와 요한외경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공식 종교로 인정되면서 이단으로 탄핵 받은 서적의 소유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서적은 불태워졌다. 이 기독교는 ‘그노시스파(영지주의)’라고 불린다. 이는 보통 “지식”이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했다. 궁극적 현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
1. 영지주의란 무엇인가?성경을 객관적,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신비주의적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영지주의’로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모든 이단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이단이며, 핵심적이고 모든 이단들의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영지주의는 타락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사에서 뿐 아니라 신약 성경, 심지어 구약 성경에서도 영지주의는 등장한다. 영지주의는 신약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으며 교회사가 형성되는 초창기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이단이다. 이런 뿌리를 가진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각 나라와 교회마다 영지주의에 영향 받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영지주
대 그레고리로부터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학적으로 유력했던 지방은 회교도들에게 정복을 당하였으며, 강력한 희랍 철학은 동방 민족의 세력에 밀려나게 되었다.이제 신학은 교리적 배경이 없는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신학이란 단지 과거의 유산 정도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지배하였다. 교회의 예배, 훈련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 등까지 간섭하였다. 그의 판단은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이냐?가 기준이 되었다.신학적 암흑의 시대에 교회는 어느새 반펠라기안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은 반펠라기안이 성장하는 좋은 토양이다. 반펠라기안 저술은 중
1. 영지주의 vs 이레니우스처음 2세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였다. 이들은 3세기에도 존재하였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당시 이교에서 발생한 영지주의는 기독교 내에 들어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하였다. 고대의 세계는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극심한 기근, 구원의 결핍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가 보여주는 갱생과 감화력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교의 정교한 예배 의식에 친숙했던 이들은 교회의 예배가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효험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그리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를 한데 결합시킴으로써 당시의 이러한 모든 형편을 타개해 보려고 하
초대교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행위(율법을 지킴으로)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행위구원론자' 또는 '자력구원자'들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흉이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왔고(오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않는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항상 선명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분별력을 ‘판단’ 또는 ‘비판’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분별력이 마비된 성도들에게 이들은 차츰 성경을 왜곡하여 전한다."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현대 교인은 성경적인 질서에 복종하도록 가르침 받지도 않고,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으면서 마치 성령께서 주신 큰 기쁨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크다.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이 추상적이므로 질병, 사고, 각종의 고통의 문제 등에 직면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교리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이다. 신학, 즉 교리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이다. 이 교리가 논리학으로만 남는다고 하면 그야말로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이 두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