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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어는 정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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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어는 정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였을까?
  • 이창모
  • 승인 2022.01.05 0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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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7)

 

들어가는 말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알고 있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복음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배웠고, 지금도 대부분의 학자들과 주석서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백과사전에서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아람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1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중동 전문가 류모세 선교사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의 발굴 작업에 참여한 많은 학자들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히브리어였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안에 명백한 증거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을까, 아니면 히브리어였을까?
 

류모세 선교사가 제시하는
예수님 당시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들

류모세 선교사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발견된 215개의 동전 중 99개에서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고, 아람어가 새겨진 것은 1개뿐이다. 1968년 성전산 발굴을 지휘했던 벤자민 마자르 역시 아람어로 쓰여진 명각은 하나도 발굴하지 못했으며 모두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기록된 명각 뿐이었다. 이갈이 지휘했던 마사다 발굴에서도 9대 1의 비율로 아람어 기록물보다는 히브리어 기록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예수님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납골함은 아람어가 전혀 없고 100퍼센트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다.

예수님 시대 전후로 활동했던 랍비들의 기록물인 미쉬나는 100퍼센트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미쉬나는 신약성경과 수많은 병행구를 가지고 있어 신약성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랍비들이 말한 5,000개 이상의 비유 가운데 2개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전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일련의 사실들은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회의 공용어가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였다는 사실을 강력히 입증해준다.” (류모세, <열린다 성경 난해 구절>, pp. 38-39)
 

위에서 류 선교사가 제시한 증거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단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는 간접적인 증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발견들은 학자들이 추측하는 연대의 오차가 때로는 엄청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므로, 류 선교사가 제시한 증거들도 예수님 시대의 것들이라고 추측할 뿐이지 꼭 그 시대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설령 류 선교사가 제시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예수님 시대의 것들이 맞는다고 할지라도, 고대 사회에서는 기록된 언어와 일상에서 소통하는 언어가 얼마든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럼에도 라틴어는 공식문서를 기록할 때와 같이 공공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했던 일상 언어는 로마인들마저도 헬라어였다. 그래서 류 선교사가 제시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상당한 증거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증거들만으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고 100%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약 성경 안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음을 단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명백한 성경의 증거들

첫째,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위에 붙인 예수님의 패에 기록된 히브리어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Ἑβραϊστί, Ῥωμαϊστί, Ἑλληνιστί/헤브라이스티, 로마이스티, 헬레비스티) 기록되었더라”(요19:19-20)

빌라도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여진 패에는 로마어(라틴어)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빌라도가 패에 로마어(라틴어)로 기록한 까닭은, 물론 로마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세계의 중심에 있는 로마제국의 위상을 위한 것이며, 또 로마제국의 일상 언어인 헬라어로 패에 기록한 까닭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패에 히브리어로도 기록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히브리어를 아는 유대인들을 위함이었다. 만약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다면, 빌라도는 틀림없이 아람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패의 글을 통해 유대인들을 조롱할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로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히브리어로 기록된 패의 내용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에서 “나사렛 예수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수정해 주기를 요구했던 것이다(요19: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기 때문에, 대재사장들은 히브리어를 아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그 패로 인해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패에 로마어(라틴어)와 헬라어와 함께 히브리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의 통용 언어가 아람어였다는 오랜 고정 관념 때문에, NIV에서는 요19:20의 “Ἑβραϊστί”(헤브라이스티/Hebrew)를 아예 “아람어”로 오역하는 실수를 범했다(NIV: Many of the Jews read this sign, for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was near the city, and the sign was written in Aramaic, Latin and Greek.). 그러나 다행스럽게 KJV(This title then read many of the Jews: for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was nigh to the city: and it was written in Hebrew, and Greek, and Latin.)와 NASB(Therefore many of the Jews read this inscription, for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was near the city; and it was written in Hebrew, Latin and in Greek.) 등에서는 원문의 “Ἑβραϊστί”(헤브라이스티)를 “히브리어”로 제대로 번역했다.
 

둘째,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증거는 행21:40, 행22:2, 행26:14 등에도 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로 말하니라”(행21:40)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행22:2)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개역개정에서 “말”로 번역한 “διαλέκτῳ”(디아렉토)의 원형 “διάλεκτος”(디아렉토스)는 “어법, 표현법, 언어, 말씨” 등의 의미를 가진다(LXX 단1:4/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LXX: διάλεκτον/디알렉톤/ 가르치게 하였고).

따라서 개역한글에서 “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를 “히브리 방언”으로 번역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라는 오랜 고정관념으로 인해, “히브리 방언”을 “아람어”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그렇다고 해서 “히브리 방언”이 오역은 아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제외한 모든 피지배 민족의 언어들을 “방언, 지방 사투리” 등으로 여겼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히브리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방 사투리(방언)로 여겼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 방언”으로 번역했어도 그 의미는 “히브리어”라는 말이다). 따라서 “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를 “히브리 말”이나 “히브리 방언”으로 번역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오랫동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다는 선입견 때문에, “διάλεκτος”(디아렉토스)를 “방언”으로 번역한 “히브리 방언”을 “아람어”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NIV는 이런 선입견으로 요19:20에서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Ἑβραΐδι διαλέκτῳ”(헤브라이디 디아렉토)를 “Aramaic”(아람어)로 번역하고 말았다(NIV: 행21:40/Having received the commander's permission, Paul stood on the steps and motioned to the crowd. When they were all silent, he said to them in Aramaic).

아무튼 바울이 층대에 서서 백성들에게 말할 때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어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백성들에게 의도적으로 히브리어로 말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자신이 같은 동족 히브리인임을 알리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행22: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셋째, 복음서에 기록된 소수의 아람어들과
그 아람어에 대한 해석들은 오히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예수님 당시의 삶의 정황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복음서에는 소수의 아람어들과 그 아람어에 대한 번역들이 있다. 물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몇몇 아람어들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아람어들은 오히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아래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아람어들이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5:41)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7:34)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복음서에 기록된 아람어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록한 아람어 바로 뒤에 그 아람어를 번역해 놓았다는 점이다. 왜 일까? 이는 당시의 복음서 독자들 중에 아람어를 알지 못하는 포로 세대 이후의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주후 60년 전후에 마가가 로마에서 로마에 사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라고 추측된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포로 세대보다는 그 이후 세대, 즉 아람어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상당수였을 것이므로, 마가는 아람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 신세대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 뒤에 그 아람어의 의미를 밝혀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소수의 아람어들과 그 아람어에 대한 번역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아람어가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만약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가 아람어였다면, 또 복음서에 나타난 아람어들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한 증거가 사실이라면, 예수님도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아람어들을 다 어떡하고, 유독 “달리다굼”, “에바다” 등 몇 마디만 아람어로 기록되었을까?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포로생활로 인하여 몸에 배어버린 아람어의 잔재가 일상 언어인 히브리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아마 오랜 포로 생활 후 3차에 걸쳐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얼마동안은 아람어로 소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오랜 포로 생활 동안 사용했던 언어였기 때문이며, 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들보다 민족 정체성, 자존감이 강했던 민족임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고국 땅에 돌아와서 아람어를 사용한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추측에는, 물론 객관적인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중간기 어느 때, 아무리 길게 잡아도 마카비 시대 이전(주전 160년쯤)에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복음서에 아람어가 드문드문 나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에서 히브리어로 복원되었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아람어의 흔적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든다면, 우리나라의 경우이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의 잔재가 언어에도 남아 있어서, 60-70년대까지만 해도 일상적인 한국말 속에 일본어의 잔재들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바깨스(양동이), 밴또(도시락), 다꽝(단무지), 덴뿌라(어묵), 오야붕(두목), 아다리(단수), 아다마(머리) 등이며, 하꼬마시(구석 돌리기), 우라마시(뒤로 돌리기), 오마시(크게 돌리기) 등 당구 용어들은 아직도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필자가 초, 중학교 때 학교에서 했을 법한 말인데, “오늘 엄마가 밴또 반찬으로 다꽝과 덴뿌라를 싸 주셨는데, 난 그게 먹기 싫어서 밴도 먹지 않고 바깨스에 있는 물을 떠 마셨어”라고 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신세대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의 의미를 번역해서 “밴또는 도시락이고, 다꽝은 단무지이며, 덴뿌라는 어묵, 그리고 바깨스는 물을 담는 양동이란다”라고 말해 준다면, 일본어를 모르는 지금의 신세대도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마가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5:41)라고 “달리다굼”을 번역해 준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소수의 아람어들과 그 아람어에 대한 번역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아람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언어로 서로 소통했을까? 아람어가 아니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어였음에 틀림없다.
 

글을 마치며

예수님 당시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인가, 아니면 히브리어인가의 문제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관하여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르게 알려고 하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당시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는 것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성경의 모든 내용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태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부패한 죄의 습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에덴동산에서의 뱀(사탄)이나 하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고 싶은 본능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의 뱀(사탄)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6-17)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로 슬쩍 변조해서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로 적당하게 변조해서 뱀(사탄)에게 대답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영원한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 서야만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변조하는 짓은 오늘 날에도 사탄의 하수인들의 전용 수법이다. 사탄의 하수인들은 성경을 이야기한다. 그래야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야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김성로의 “부활 복음”,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 오순절주의와 신사도주의 “방언기도와 통역”, “예언”, “관상 기도” 등, 그리고 청교도주의자들의 “능동순종 교리”, “회심 준비론” 등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것들이 성경에 있다고 하면서 여러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제시한 성경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들은 제시한 성경 구절에 없다. 단지 그들의 주장이 성경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슬쩍 비틀어 교묘하게 변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붕어빵은 붕어와 같은 모양이지만 붕어가 없듯이, 그들의 주장은 성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가가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임을 항상 기억하고, 자신의 주장이 성경에 있다고 하는 자들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이 말씀이 그러한가를 상고하며 따져보아야 한다(행17: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래야지 자칫 하나님의 말씀처럼 보이는 김성로의 “부활 복음”,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 신사도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기도와 통역”, “예언”, “관상 기도”, 청교도주의자들의 “능동순종 교리”와 “회심 준비론” 등과 같은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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