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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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의 부활
  • 정대운
  • 승인 2017.02.0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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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성경을 객관적,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했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신비주의적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영지주의’로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모든 이단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이단이며, 핵심적이고 모든 이단들의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

영지주의는 타락한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사에서 뿐 아니라 신약 성경, 심지어 구약 성경에서도 영지주의는 등장한다. 영지주의는 신약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으며 교회사가 형성되는 초창기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이단이다. 이런 뿌리를 가진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각 나라와 교회마다 영지주의에 영향 받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믿는 이원론자들이었다. 육체를 신적인 정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비유했다. 내 속에 있는 신적인 지식을 깨닫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고, 이를 가르켜 ‘영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지는 객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헬라어 영지(그노시스)는 지식을 뜻하는데 영적인 깊은 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정경에 기록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끊임없이 더 깊고, 더 영적인 것,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깨닫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런 영적인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 객관전인 성경 말씀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궁극적인 영과의 합일을 추구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직관에 의존하게 되고 궁극적인 판단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의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과 직접 통한다고 생각하고(천사 숭배), 그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의지하고(성경을 의지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 그 생각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일 뿐이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도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도 전에 무수한 이단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도들과 그 당시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붙여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 경전을 만들었었다.「빌림의 복음」(Gospel of Philip),「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바울의 묵시록」(Apocalypes) 등이 그들이 만든 경전이다. 영지주의 경전 중 가장 유명한 것이「도마 복음」(Gospel of Thomas)이다.

그러므로 교회사 초창기에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지 선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은 도마복음, 바울복음 등과 뒤섞여 교계에 돌아다녔다. 성경의 정경과 외경, 그리고 위경을 선별하는 작업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선별 과정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였다. 이를 근거로 마태복음은 정경으로 도마복음은 이단으로 판정받게 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경전들은 이단으로 판정받아 불태워졌으며, 일부는 이런 책들을 들고 도피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영지주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핵심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을 일부 왜곡하였거나, 실수로 누락하였거나, 깊은 고민 없이 성경을 봄으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성경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영지주의다.

영지주의는 결코 객관전인 것으로 접근할 수 없다. 성경을 보지만,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이 잇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그들의 관심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성경 해석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기 보다는 내 생각의 흐름을 지원해 주는 것쯤으로 전락해 버린다.

영지주의자들은 누구나 ‘성경을 제일의 권위’로 둔다고 소리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직감을 더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언제나 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건이(신앙, 경제력, 사랑하는 마음 등) 비슷한 두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은 여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과연 누구와 결혼해야 일생을 행복하게 살 것인가?’라는 해결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곧 ‘하나님께로 직접’ 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특성상 ‘구체적’이지 않으나 우리는 ‘구체적’인 답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관을 성경에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수준이 비슷한 두 대학에 합격해 한 대학을 선택해야할 학생의 고민에 대한 답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우리의 결정의 대부분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영지주의가 되어야 구체적인 답을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현대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고 성경의 권위 아래 자기의 영감을 둔다고 하지만 몇몇 영지주의 목사들은 계시를 직접 듣고 책을 집필하기도 한다. 현대판 밧모섬의 요한이다.

영지주의는 성경적이지 않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부터 이방 종교까지 그 범위는 끝이 없다.
 

2. 영지주의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인류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하나님께서 시간 영역을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단 십 분만이라도 미래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주식 시장에서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끊임없이 미래를 알고자 노력하는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이런 일이 계속 된 것을 보면 미래를 알기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된다. 미래를 미리 선점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권력과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지역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텐데,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는 것보다 더 큰 무기와 지혜와 능력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대시대에는 전쟁은 신들 간의 싸움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이번 전쟁을 허락해 주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지 않고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행여 신이 노하셔서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도 악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거나 복잡 미묘한 문제에 직면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신탁을 받으러 갔다. 중심 장소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이었다. 피티아(Pythia)라 불리는 여사제는 방문객의 문의에 시 형식의 노래로 대답해주었다.

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자기네 나라보다 더 강대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를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공격을 해도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다. 그는 ‘강대한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았다. 크로이소스와 그의 군대는 전쟁터로 돌진하였다. 신탁의 내용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만 안다면, 모든 승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의 신이 내 편에만 있다면,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회사와 국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그 예언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하늘에 붉은 노을이 강렬한 것을 보니...이번에는 피를 많이 볼 것 같소이다...그러니, 신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이외다...적군들의 피가 저 노을처럼 강렬하게 왕 앞에 흐를 것이오...”

제사장들은 이런 내적 음성과 신비한 무언가를 통해 신의 뜻을 받았으며,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되고, 해석의 주체인 제사장은 아무런 근거 없이 그 해석을 제사장 스스로 내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제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의기양양하게 진군하던 군대가 패배를 맛보는 경우가 계속 이어진다. 그 노을의 피는 적군의 피가 아닌 아군의 피였다는 것을 뒤에 안 것이다.

“이봐, 제사장 이게 어찌된 노릇이오...어찌된 영문인지 말해 보시오?”라고 묻더라도 제사장은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부정이오. 군 내부에서 본 제사장의 예언에 의심을 품던 장군이 있구려...믿지를 못하고 의심을 품다니...신이 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그나마 감사하게 생각하시오...왕의 목까지 온전히 못할 것을 내가 기도하여 그것만은 면케한 것이외다!!”

이와 같은 신탁은 1세기가 되면서 그 중요성이 크게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속성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의 뜻을 아는 법’(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이나 “하나님의 뜻”) 이라는 제목의 책들은 지금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것인가가? 이는 미래를 선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근거 한다.

교회 내의 영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거나, 건전한 성경 해석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리를 연구하기는커녕 교리 연구를 위험하게까지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영지주의 설교자들은 가끔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기도 한다.

“원래는 로마서 8장을 설교하려고 하였지만 저 문을 들어설 때 성령께서 ‘이들을 위해 내 사랑과 끝없이 참으심을 말해주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항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미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준비되지도 않은 그런 주제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 자신이 없습니다’고 하자 성령님께서는 ‘ 네 입에 내 말을 넣어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영지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길...”이라고 주절거린다. 주님이 내게 지금 말씀하셨다는데 누가 반대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의견을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셨어”라는 주절거림이다. 이 말에 반대하는 것은 곧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그 먈 앞에서 잠잠해질 것이다.

필자는 어느 여집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당시 여집사는 매우 힘든 시기였고, 세수를 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거울을 보며 울고 있는데 거울 뒤로 예수님이 인자하게 웃고 계셨고, 그 순간 너무나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참고 싶었지만 웃고 말았다. 진지한 고백을 가볍게 대하는 필자를 보며 여집사는 당황해 하였다.

“하하...집사님 좀 무섭네요...세수할 때 나타나서 망정이지, 용변 보고 있는데 나타나시면 저 같으면 변비걸립니다.”

 

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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