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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한국교회가 살 길은 '이신칭의'복음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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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한국교회가 살 길은 '이신칭의'복음 회복
  • 정대운
  • 승인 2018.11.13 21:04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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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단들과 조용기, 문희곤, 하용조 목사의 사역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는 행위구원론을 퍼뜨리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이신칭의’ 교리는 사라지고 다시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행위구원론이 한국교회를 뒤엎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전혀 검증 되지도 않고, 심지어 명백히 문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 하여 칭송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교리가 무너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이 반펠라기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신앙인이면 그들이 교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들이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행위를 보고 판단한다.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 외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근거는 오직 ‘행위’이다. 특히 권세의 자리를 버리고 오지로 들어가 약한 자들을 도운 사람들의 삶은 모든 것을 다 덮어 두고 존경하고 찬미한다.

사실 ‘내려놓음’이나 ‘권리포기’ 사상은 성경적 도움 없이도 가능하다. 이런 종류는 교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사실 법정의 ‘무소유’와 다를 바 없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의 삶이 한국 교계에서 그토록 회자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설교 시간에 이태석 신부의 영상까지 보여 주며 그를 찬양하였다. 이태석 신부의 무엇을 보고 그리하였는가? 물론 그의 봉사는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기 부족함이 없지만, 그의 행위만을 보고 강대상에서 칭송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는 힌두교인들이 더 나은 힌두교인들이 되도록 돕고 무슬림이 더 나은 무슬림이 되도록 돕고 가톨릭 신자가 더 나은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마더 테레사)

마더 테레사는 어떤가? 그는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한 여인이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만인 구원론자였다. 그녀는 어떤 종교에 속했건 인간은 죽는 순간 하나님 아비지 품으로 간다고 믿었다. 한국교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헨리 나우웬은 또 어떤가? 그도 로마 가톨릭 사제이며, 만인 구원론자였다. 하버드대학의 교수 자리를 버리고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박약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였던 천주교 사제였다.
 


그의 외적인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을 존경하는 태도가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다.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삶이 이들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이 그리스도와 비슷해 보인다면 이들이 설령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더라도, 반펠라기안의 신학으로 무장된 행위구원론자일지라도, 부활을 믿지 않을지라도, 기독교 신학과 합치될 수 없는 로마 가톨릭 신부일지라도 덮어놓고 본받고자 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에는 반펠라기안이 득세하여 이미 행위구원론이 대세가 되었고 ‘믿음에 의한 구원론’은 사실상 폐기처분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앞날을 내다 볼 때, 한국교회의 상당한 부분이 ‘온누리화’ 되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이미 로마가톨릭의 신학인 반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에 의해 장악되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앱 6:11-12)

사실 한두 번의 경각심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에 항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된 것은 성도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무지하면 악한 무리들이 처음에는 성경의 일부를 왜곡하지만 나중에는 성경 전체를 왜곡한다. 그 책의 내용이 성경을 전반적으로 왜곡하여도 그 책이 한국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래도록 진열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온누리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특별히 개혁교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비록 세미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교리의 무의미함을 설교할 것이지만, 개혁교리를 가는 곳 마다 외쳐야 한다. 지금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을 대항하여 외쳤던 외침을 다시 외쳐야 하는 시대이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 가톨릭을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했다. 로마 카톨릭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였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했다. 개혁주의 목사들이 로마 카톨릭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면서 결국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임을 믿으며, 마리아의 처녀 잉태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도 믿고, 십자가의 대속도 믿고, 그분의 육체적 부활도 믿는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두려운 존재들이다.

성도들이 피상적으로 살펴본 결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민감해야 할 영적군인을 무장해제 시켜 놓는 것이다. 영적 트로이 목마와 같다. 로마 가톨릭이 저주 받아 마땅한 이유는 ‘첨가물’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첨가물로 인해 그들의 사상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에서 이탈하였다. 이들은 음식 속에 치명적인 독을 타 놓았다. 그 양이 매우 적으므로 곧바로 죽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죽게 될 것이다.

지금 개신교 안에서 부는 바람은 로마 가톨릭과 매우 비슷하다. 성경의 진리들을 다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은혜 받을 만할 것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아 놓으라’는 것이다. 마음속의 ‘컵을 뒤집어 놓아야’ 은혜의 단비가 내게 담겨진다는 것이다. 예배를 ‘철저히 준비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쓴 뿌리를 치유 하라’는 것이다. 오늘 은혜 받기를 ‘결단’하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기 이전에 인간적인 방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 내리려고 하거나 최소한 인간 편에서 은혜 받기 쉽게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또한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비해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은 ‘계시는 신약 성경과 함께 종결’되었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길’이라 말하며 계시들을 첨가한다.

이것이 로마 가톨릭이 해온 기만이고, 그 결과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직통 계시 같은 것은 과거에는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이상한 소리였지만 현재 많은 선교단체, 오순절적 교회 등에서는 동일한 소리가 들린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전도단이나 온누리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신학보다는 로마 가톨릭 신학과 더 가까울 것이다. 정직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사제들은 교회에서 훈련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제들이 독특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사도 운동이 여러 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로마 가톨릭 신학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과 닮아 가고 있다. 특히 설교자의 설교가 닮아 간다. 참된 복음의 제시가 없이 윤리적, 도덕적 설교에서 신비적 설교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기에 거짓말 하면 안 되고, 남에게 사기 치면 안 되고, 친절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와중에서도 십일조를 했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고 하거나, 또 다른 사람은 병중에 있었는데 기도로 치유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설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회개와 칭의에 관해서는 거의 울려 퍼지고 있지 않다. 로마 카톨릭이 사단의 걸작품인 이유는 성경적인 것 같지만, 그 끝을 확인해 보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 즉, 반펠라기우스적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본주의이고, 행위구원론이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이단이다.

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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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2018-11-16 01:13:13
"그래서 한 번 믿은 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절대로 예외없이 성화에 성공하게 된다고도 주장해야 하는데, 정작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구절을 들라고 하신다면 아주 많이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과객님~~
또 다시 지겨운 논쟁을 해야 할까요?
정~~말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님과 한 번 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해 토론할까 합니다.

먼저 과객님께 제가 질문드리겠습니다.
가급적 짧고 명확하게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질문: 과객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에 오류가 없다고 믿으십니까?

바울처럼 2018-11-16 01:06:20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을 구원의 취소로 해석하는 교단은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은사주의 등과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따르는 교단입니다.
어찌 히브리서 말씀을 저렇게 비틀고 곡해하는지 참...

평신도 2018-11-15 22:58:10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24:7절

렘24장은 좋은 무화과와 나쁜무화과비유의 장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여호야긴이 심판받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혔갔을 때 하나님은 그를 좋은 무화과에 비유하며 여호야긴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셔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에 대해서 나쁜 무화과로 비유하시며 심판하심을 예언하십니다.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에 대한 예언은 렘52장에 성취됩니다. 또한 여호야긴은 마태복음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롬9:13-15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자신이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선택하십니다. 제가 이 세상의 모든 자매들을 사랑하지만 특별히 한 자매를 훨씬 더 사랑합니다. 바로 제 아내입니다. 왜 자매를 더 사랑하도록 선택했을까요?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저절로 사랑하게 되어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한 자매를 선택하여 더 특별히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도 온 세상의 사람들을 다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더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자들을 택하십니다. 그것이 불의한 것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께 불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기로로 선택한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은 무엇을 가르킵니까? 구원입니까? 믿음입니까? 둘다 맞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것은"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믿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을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지구가 동굴다고 믿으십니까? 왜 믿으십니까? 사진 등의 분명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믿기로 작정해보십시오. 노력해보십시오. 믿음이 노력으로 됩니까? 아무리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되새겨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결코 내가 잘해서 어떤 조건을 내가 충족해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은혜란 어떤 댓가없이 거저 주어지는 좋은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롬8: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미리 정하셨고 우리에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했던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이, 보지도 못한 2천년전의 그분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후에 천국에서 죄에서 영원히 해방되어 영화롭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과 구원을 인간이 믿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믿어지는데....

롬9장을 구원의 예정이 아닌 사역적인 예정으로 말씀을 교묘히 비트는 것이 어찌 구원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객 2018-11-15 13:20:57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는데, 창세 전부터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면 애초부터 세상을 만들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중예정설이나 제한속죄설은 성경적으로 확고한 지지를 받기 어려운 교리라고 느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능력과 은혜로 누가 하나님을 사랑할지를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에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웨슬리식 예지예정론이 비교적 더 성경적인 맥락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하나님을 아예 거부해버릴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도록 일반적인 선행은총을 부여하셨다는 전제도 받아들일 만하고요. 전적 부패가 맞지만 그것을 전적 무능력이라고까지 동일시해버린다면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또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만을 예정하셨고 그 외에는 모두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예정하신 것이지 개인을 구원으로 예정하시진 않는다는 주장도 의미 있어 보입니다. 에베소서를 포함해 예정에 대해 말하는 대다수의 구절들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예정된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고 초청하는 것을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또한 개인 예정은 하나님나라의 사역에 대한 예정이며, 성경에서 개인 예정 같아 보이는 구절들도 많은 경우 구속사에서 일시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사역적인 예정이지 구원으로의 예정은 아니라는 맥락은 대표적인 로마서 9장 등의 문맥을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다 구원과는 상관없이 구속사의 계보에서 쓰임받는 각 개인의 특정 역할을 중시한 사역적 예정이었다는 거지요.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킬 고레스를 예정했다는 부분이나 예수님이 가룟 유다가 포함된 제자들 모두를 가리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 역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모든 열방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축복의 통로, 곧 사역적 도구로 택하신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무조건 구원에로 택하고 예정하신 것이 아닌 것 또한 성경 내용 자체로만 봐도 명백하니까요.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것도 그가 구원 못 받게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을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는 일을 막기 때문에 그를 판하시기 위해, 그리고 출애굽의 구원이 더 하나님의 구원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맥락을 고려한다면 칼빈주의가 모든 교리의 핵심기초로 삼는 절대 이중예정론이 과연 성경적인가,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합당한 교리인가부터 잘 따져보지 않으면 그 이후 구원의 진리의 문제, 칭의나 성화의 문제, 성도의 견인 등의 문제에서 다른 신학적 입장을 결코 납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수백년 묵은 소모적인 논쟁을 여기서 재연하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이런 부분을 진지하게 돌아보시고 올바른 성경적 구원의 진리에 진정한 관심을 들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소원은 있습니다.

과객 2018-11-15 13:15:14
영원 전에 불변하는 신적 작정으로 이뤄진 절대 이중예정론을 신봉하는 이상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는 칭의와 성화를 통한 구원의 문제에서도 계속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만을 놓고 보면 의외로 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대로 특히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나서 여러 가지 환경상의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유대인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확실한 믿음을 고백한 자들이 아니었다면 배교한다는 표현도 쓸 수 없을 것이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거나 능욕한다는 표현도 쓸 수 없을 겁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이후는 분명히 신자가 십자가의 구원을 알고 믿고 난 후를 가리키며 그러고 나서도 짐짓 고의로 죄를 범하고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결국 자신의 죄된 상태도 모르고 인정하지 않아 회개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결국 배교에 이르러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충분히 합당한 경고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성경 자체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들을 들이대도 절대 이중예정론에 한번 꽂혀버린 사람들은 돌이키지 않더군요. 한 번 믿은 사람은 영원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인데 어떻게 중도에 안 믿게 될 수 있느냐는 거지요. 그래서 한 번 믿은 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절대로 예외없이 성화에 성공하게 된다고도 주장해야 하는데, 정작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구절을 들라고 하신다면 아주 많이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교리주의의 세례를 한번 깊이 받은 사람은 그 신학의 안경을 계속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 자체의 의미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리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종교개혁기에 부활시켰지요. 어거스틴은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교회로부터, 그리고 신적 작정에 의해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도 구원의 권위를 둠으로써 가톨릭 전통 형성에 신학적 이론의 기초를 제공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가톨릭 교회를 통한 구원에 세례나 기부, 선행이 중시되면서 은혜와 믿음의 교리가 약해지고 행위구원의 조짐을 보이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때 칼빈은 이 은총의 부분을 더 확고히 강조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신적 작정론을 그대로 가져와 그의 구원론과 예정론에 도입합니다. 행위구원이 횡행하던 당시로서는 은총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했지만 그러다보니 결국 이중예정론으로까지 발전하면서 다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요.

원래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알미니우스는 당시 칼빈의 교리에 반대하는 성도 한 사람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다가 오히려 칼빈의 이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는 지금 알미니즘으로 알려진 교리를 발표합니다. 이것을 요한 웨슬리가 목회현장에서 실천신학적으로 균형있게 다듬었다고 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옳았지만 교회와 신적 작정에도 똑같은 무게를 부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성경적인 균형을 잡으려 시도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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