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은 어느 교파든지 교회든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교회론을 경계해야 한다. 신학적인 교회론은 그 시대의 사상과 현실적인 문제와 혼합되어 있다.”(하용조)

하용조 목사는 교회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신학적 교회론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교회론이 있겠는가? 아마 성경적 교회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학적인 것은 시대적 사상이 혼합되어 있을 수 있으니, 성경적 교회론으로 가자는 것이다. 성경적 교회론의 모델로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신학적인 것을 탈피한다고 자동적으로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 목사가 어떤 교회론과 예배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파헤쳐 보자. 그가 입으로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그의 심중의 것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교회와 예배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손수 디자인한 매우 독특한 곳이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하나님과 친교를 맺게 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를 ‘에클래시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불러냄을 의미한다. 옛것을 뒤로 하는 것이다. 대중들 가운데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이다.

그리므로 에클레시아에 요구되는 것은 세속과 구별되는 것이다(고후 6:14-18). 교회는 독특한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는데, 그것은 세속성에 저항하지만 또한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세속을 거부하면서 세상을 사랑해야 하고, 죄 지은 자기를 증오하면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하는 이중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중적 상황에서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교회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벨직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참 교회의 표정은 말씀(교리)선포와 성례와 권징이라 하였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권징으로 인해 죄를 징벌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벨직신앙고백서 제29장-

교회의 임무는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수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교회의 생활을 정돈하며, 교회의 머리를 높이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사회 변혁에 기여할지라도 교회는 사회 변혁의 대리인은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를 구하는데 있다.

성경적 교회론에 무지한 교회 성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회의 주된 목적은 새 신자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 연극이나 춤을 도입할 것이고, 새 신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기독교 전문 용어 사용을 피하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몇몇 교회에서 대단한 숫자적 증가(국가 전체적으로는 정체되거나 감소에도 불구하고)를 이뤄낸 교파들이 있었다.

반면 많은 교회들은 그 일을 이루지 못했다. 숫자적으로 정체되어 있던 교회들은 이미 거대해진 교회들의 노하우를 배우려고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교회 성장학이란 과목도 생겼으며, 교회 성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도 생겨났다. 이 연구소들은 교회 성장을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보지 않았기에 최대한 과학적으로 연구하였다. 거대해진 교회에는 열정적이고 독특한 전도법이 있었으며, 거대한 예배당과 안락한 시설들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느린 음악과 빠른 음악을 적절히 분배해서 대중들이 음악에 깊이 빠지게 한다. 음악에 지나치게 정성과 시간을 쏟아 넣는다. 예배 중 연극을 넣었으며, 행복을 주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현대인을 한껏 위로해 주는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결과물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이론에 무장된 사람들이 이끄는 교회는 새 신자들이 왔을 때 어색함과 반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고안된 예배를 준비한다. 흡사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과정처럼 매우 정교하게 조작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것을 예배에 넣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지만,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예전을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은 옳지 않다.

다음으로 예배의 목적과 교회의 표징에 의해 예배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과 세속적 관심과 세속적 의무를 뒤로 하고 떠나온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반대이기에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들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고전 1:18). 예배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살전 1:9)이며, 세상이 쓸모없는 돌처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필연적으로 반문화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예배와 교회 사역의 방법이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이며, 교회는 이 일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며 당황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배는 세상 사람들이 반대한 것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불신자들의 편안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 존전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죄인이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세상과 다름없음이 증명되어야 그들이 교회의 문턱을 넘어오기 쉽다고 생각하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세상과 다름이 교회의 본질이며, 세상과 차이가 날수록 세상도 교회를 주목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답-

진정한 예배의 목적이란 한 주간 동안의 삶에 활력을 주거나, 상실된 의욕에 힘을 주거나, 심지어 불신자들을 결단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예배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가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것이 이들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기 위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출 15:17-18). 즉,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전(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불러들이기 위해 애굽으로부터 모으신 것이다. 구약에서 오직 대제사장이 성전의 바깥문을 통과하여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에 힘입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들어갈 수 있다(히 12:22).

성도들의 구원의 목적이 예배라면 이 예배의 예전을 상상에 의해서 손쉽게 만들거나 빼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분 자신이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망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 예배상 앞에 혹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어떤 노력에 의해서도 선을 행할 수 없다면, 단지 우리의 지혜와 열망에 기초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예배를 고안할 수 있겠는가? 칼빈은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 때문에 규제 원리가 참된 예배에 있어서 본질적이라고 가르쳤다. 어떤 예배든지 사람의 상상력으로 접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예배란 우리 언약의 주님에게 그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한 신자의 새로운 삶의 활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능하신 구속 행위 안에 계시되어 있는 신성의 충만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배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과 명예를 올려드리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의 뜻에 복종하면서 순종하는 봉사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기 위한 기관이다. 참된 교회의 표징인 말씀 선포, 성례, 권징(또는 제자화)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모든 신자들의 영적 건강을 위한 본질적인 행위이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훈련되는 시간이며, 성례를 통해 보증되는 때이고, 실질적인 응답이 있는 본질적인 기도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예배는 단지 충고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가르치며), 성례전의 수행(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리고 제자 삼기의 실행(제자를 삼으라)이 바로 지상 명령을 통해 주시는 진정한 교회의 표지이다.

칼빈의 규제 원리에 의해 위와 같은 내용들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하며, 이 한도 내에서 예배는 구성되어져야 한다. 세속화에 물든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성공(?)을 이루어 나갔다. 이런 교회들은 화석화된 예배를 비판하며 실질적으로 느낌이 있는 예배, 감동이 있는 예배를 표방하였다. 예배가 추구하는 바가 ‘거룩’이 아니라 ‘감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예배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이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힘들고 지친 영혼에 새 힘을 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위하는 것이다. 이들은 생각한다. 어떤 예배가 좋은 예배인가? 두말할 것이 없이 ‘감동적인’ 예배이다. 이제 더 나아가 신학적인 고민 없이 ‘효과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겨났다. 교회는 세속적 음악 홀과 다를 바 없다. 무겁고 둔탁한 강대상은 사라지고, 보일 듯 말듯 한 투명한 강대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차이는 그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속에 철학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설교 단상을 권위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설교자가 권위적인 체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적이지 않게 들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강조했던 때는 강단은 높았으며 좁았다. 그 자리에 설교자 외에는 누구도 서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설교자와 찬양인도자 및 연극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간증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강대상에 오르고 있으며 심지어 날뛰고 있다.

세속에 물든 사람들은 이제 숫자적 증가에 혈안이 되어 있다. 대형화는 곧 절대적인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최대한 아늑한 공간으로 꾸민다. 카페나, 고급 레스토랑을 흉내 낸다. 안내하는 사람들은 잘 정돈된 직원 같이 훈련되어 있다.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그들의 얼굴은 환한 웃음을 지고 있다. 백화점과 같은 이 분위기는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존중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새롭게 초대될 사람들의 정보를 미리 알고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불만을 분석한다. 이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사항을 모두 기억하고 교회 내에 가급적 그러한 것들을 모두 치워버린다. 초대된 사람들에게 고급 식사를 대접하고, 곧 이어 무대를 제외하고는 불이 꺼진다. 불이 꺼진 그곳에 온갖 공연이 펼쳐진다. 공연과 공연 사이에는 대중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멋진 화면이 방송된다. 웅장한 사운드는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 설교자가 등장한다. 설교자의 등장은 참석한 사람들을 또 놀라게 한다. 간단한 평상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고리타분하고 권위주의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목사가 너무나도 편안한 복장과 선량한 웃음을 띠고 나타난다. 그의 목소리는 삼류 부흥사의 느끼한 “할렐루야”가 아니라 대학교수처럼 간결하고 세련되어 있다. 참석자들에게 매우 좋은 느낌을 들도록 한다. 마지막 결단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조작이다. 이런 예배를 열린 예배라고 한다. 열린 예배는 복음의 내용을 축소하여 전한다.

열린 예배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다.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성경의 반은 “당신은 죄인이며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상투를 잡고 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간신히 잡고 있습니다. 당신은 데롱데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은 곧 놓아집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당신은 영원한 형벌에 처할 운명입니다”이다. 이런 말씀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앞에 놓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이런 말씀을 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제정해 놓으신 방법, 즉, 말씀 선포와 성례와 권징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인간이 사사로이 고안해 낸 것이 열린 예배다. 오래전에 기록된 성경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고 사람과 시대는 변한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인들 특히 도시 중산층들은 성경의 모든 것을 말할 때는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혐오의 말씀은 새신자 때가 아니고 신앙의 연륜이 높아지면 그때 말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사기일 뿐이다.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다 감추고, 또는 치러야할 대가는 다 감추고, 장점만으로, 또는 행사할 권리만을 이야기 하여 상대를 홀려서 성공한 결혼은 위태로운 결혼 생활을 예고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처음부터 천국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산상 설교 중에 말씀하신다. 그 산상 설교가 따르는 무리들을 기분 좋게 하기 보다는 당황하게 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는데는 하용조 목사가 큰 역할을 했다.

“하용조 목사는 1996년 온누리교회의 목사와 장로 등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담임하는 윌로크릭교회를 비롯해 10여 곳의 선교 단체를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온누리교회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방문자들은 교회에 대한 기존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구도자 예배라는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었으며, 전도와 소그룹과 네트워크에 대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넓은 주차장과 체육관 시설, 경내의 호수, 내부 장식, 방송 시설 등에도 감동을 받았다.”

하용조 목사와 장로들이 1억 원을 들여 미국 여행을 하였다. 그들이 배워온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보고 온 것은 올바른 말씀 선포, 정확한 교리, 성령의 사역으로 이끌어지는 교회가 아니었다. 윌로크릭교회의 폭발적인 성공을 이끈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온 것이다. 넓은 주차장을 보고 감동받은 것은 대형 마트에서도 넓은 주차장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것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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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