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경기도 고양시, 삼송제일교회)

아모스는 북 왕국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야모스는 남유다 출신이라는 것이다. 남 유다 출신일 뿐 아니라 그는 전통 선지학교 출신도 아니다. 그는 ‘드고야의 목자’였다.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이다.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는 ‘시온에서부터 부르짖는다’는 것과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을 쏟아 놓는데 그 상대는 먹이를 앞에 둔 숫사자와 같이 날선 발톱을 세우고 갈기를 치켜올리며 소리를 지르는 형국이었다. 또한 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과 같았다. 이스라엘은 곧 엄청난 재난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여로보암 2세의 시대는 솔로몬 이후 최고의 강성한 국가였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번성한 기간이었다. 이런 상황에 남유다 출신, 그것도 정통 선지학교나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목자이며 아울러 뽕나무를 배양하던 아모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북 왕조가 가장 번성한 시기에 선지자나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엔 종교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아모스의 경고가 지나치다 싶어 제사장 아마샤가 그를 책망한 것을 보면 종교 종사자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암 7:10)

아마샤 제사상은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암 7:12)

아마샤가 아모스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풍성한 시기에 이런 부정적이고, 기분 나쁘고,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를 던지지 말고, 세상을 그렇게 비딱한 시각으로 보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서 예언이나 하고 살라고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호세아의 경고를 생각해 봐야 한다. 호세아는 아모스와 같은 시기에 북 왕조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호세아가 말하길 북 왕조의 죄악상은 ‘지도자들부터’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호 4:4)

제사장은 백성들을 책망하지도 않는다. 그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툴 정도로 제사장의 권위는 추락되었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라고 시비를 가릴 지경이 되었다.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호 4:5)

백성들은 낮에도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밤에도 넘어지는데 그 일의 주동자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백성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 이 강대국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백성들에게 그 방법론을 하나님 이름을 빌려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목소리로 변장하여 전달하므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은 점점 사라지고 세속의 처세술만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호 4:6)

아모스 시대는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었다. 5천년 역사상 주변국에 이렇게 영향력을 미치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크게 성장한 시대는 없었다. 교회의 상황도 비슷하다. 교회에는 더 이상 성도를 향하여 불같이 내 뿜는 불호령이 없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라 하는 사람들의 죄가 무수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퍼붙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는 죄인의 목을 서서히 조이며 망치로 내리쳐 너덜너덜해진 몸뚱이 하나만으로 오직 그리스도께 매달려 살려 달라고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 건강, 가정의 행복 등을 추구해주는 영적 사우나장으로 변해있다. 사우나장에서는 기분 개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곳으로 변했다.

목사의 사명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는 소망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도 개인과 가정이 잘 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런 저런 가르침을 전수해 주고 있다. 수많은 죄악이 드러나는 분명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불호령이 선포되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전해할 자리에 '잘사는 법', '승리하는 법', '상처받지 않는 법', '쓴뿌리 제거법', '기도 응답 받는 방법', '가정을 잘 이끄는 법', '자녀 양육법', '청소년 상담', '미혼모 상담', '집단 상담', '중년의 위기 극복법', '황혼 상담',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교회 성장학' ...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개인의 행복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대신하고 있다.

교회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들에겐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회개의 눈물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내 상처의 근원을 알기 위해 과거로의 여행을 해 본 결과 홀로 울고 있는 ‘불쌍한 다섯 살 어린 나’를 보며 흘리는 눈물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목소리 대신에 “아버지 그때 왜 저에게 그러셨어요?”라는 질문이 자리한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라는 외침 대신에 “아버지 그럼에도 아버지를 용서할께요”라는 고백이 대신한다.

‘내적 치유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본격적인 내적 치유를 하기 전 내적 치유에 대한 이론을 듣게 된다. 이론을 듣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은 대학 시절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심리학 과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크리스챤 리더십 세미나’를 듣고 난 후 드는 생각은 방송에서 나오는 교양 프로의 명사 강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자녀 양육 세미나’를 듣고 나면, TV에서 방영했던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이론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쯤 되면 설교를 하는 설교자와 성도간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성도들 중 심리학을 전공한 전공자나, 교양 과목 중 특별히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해 본 성도나, 리더십에 관한 명사 강의를 많이 듣고 많이 읽었던 성도나, 자녀 양육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성도가 설교를 들으며 ‘목사님 말씀이 옳으네, 틀렸네’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목사의 전공은 성경과 신학이지 심리학이 아니므로 심리학 전공자나 정신과 의사인 평신도보다 뒤떨어지는 이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심리학적인 것을 이야기 하면 심리학자에게, 과학을 이야기 하면 과학자에게, 의학을 이야기 하면 의사에게, 정치를 이야기 하면 정치가나 사회 운동가에게, 깨달음을 이야기 하면 철학자에게, 리더십을 이야기 하면 사회 명사에게, 재정의 축복을 이야기 하면 펀드매니저에게 판단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니 결국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가 ‘옳다’, ‘그르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며, 곧 많은 성도들은 설교 내용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미 판단의 대상이 된 그 설교에 성도들이 순종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유한한 설교자가 어떤 전공자에게 판단 받지 않기 위해 위와 같은 방대한 학문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성도들은 이를 판단하거나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 말씀에는 순종과 불순종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 즉, 선지자나 제사장들의 다툼은 종교 지도자들이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상식적 수준에서의 말을 전한 결과이다. 강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마음, 즉, 불같은 공포를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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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