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행위(율법을 지킴으로)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행위구원론자' 또는 '자력구원자'들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원흉이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왔고(오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않는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항상 선명한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분별력을 ‘판단’ 또는 ‘비판’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분별력이 마비된 성도들에게 이들은 차츰 성경을 왜곡하여 전한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다"(벧후 2:1)

이런 이단들이 하는 일은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진리의 도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을 못 얻게 하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 즉,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손해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벧후2:2)

겉으로 보기에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크게 잘못돼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의롭게 되기 위해 이방인들은 구약의 어떤 의식(특히, 할례)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들은 사울처럼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기는 커녕, 수고와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더 섬기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유대주의자들도 어쩌면 한 형제라 볼 수도 있다. 단지 생각의 차이가 좀 있었을 뿐이고, 그들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도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하는 일이다. 이 핵심만 동일하면 얼마든지 포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당시 교회가 처한 사회적 상황들을 봤을 때 이런 작은 차이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힘을 하나로 규합해야 할 형편이 아닌가? 초대교회의 적은 밖에서부터 오는 핍박이고, 마귀의 공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내부의 형제(?)인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퍼붙는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이다"(갈 21:9)

바울이 말하는 것과 유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서 얼마나 벗어났기에 바울은 이토록 홍분하고 있는가?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은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킬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믿고,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실지로 너무나 미미해 보여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논의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바울의 주장>
그리스도를 믿고 -> 의롭다 함을 받고 -> 율법을 지킨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그리스도를 믿고 -> 율법을 지키고 -> 의롭다 함을 받는다

바울의 주장과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다른 점은 겨우 이 정도였다. 구성 요소가 빠지거나, 더해진 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차이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저주했단 말인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전우’로 여기고 힘을 모아 다른 이방 신앙과 우상에 대적하면 안되었을까? 그리스도를 믿지 말자고 한 것도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자는 것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타락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십자가의 사건을 부정한 것도 부활을 부정한 것도 아니며, 예수 믿고 의롭게 되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바울이 이야기한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단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차이가 ‘저주’를 받을 만한 차이인가? 현대인의 눈에는 매우 사소해 보이는 이런 차이, 현대 용어를 빌리면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고 할 정도의 차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줄 만한 차이이다. 바울은 지독하게 편협하지 않은가? 핵심적인 차이도 아닌 것 같은데, 바울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는 저주를 받을 사람으로 여기는 바울의 마음은 지나치게 좁은 것 같다. 이런 차이로 형제를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는 것인가? 충분히 사랑으로 포용할 수는 없었을까?

바울은 정말 그리스도인과 유대주의자의 차이가 예수교와 이방 종교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 그 차이는 이방 종교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이 순서의 바뀜은 필수적인 요소(은혜)를 더럽히는 것이라 확신했으며,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실체를 드러냈다. 겉보기에 대단치 않고 중요치 않아 보인다고 해서 깐깐한 기준을 무디게 하면 안 된다. 매우 작아 보이는 것이 복음 진리를 우습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만약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의 타협점을 찾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순전한 은혜의 진리를 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첨부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인간의 선한 공로 간의 기준이 불분명하게 될 것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가치 절하되고, 기독교는 인간의 수행을 강조하는 자력 구원의 종교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공로를 폄하하며, 예수의 공로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예수는 그리스도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다" 
"나는 성경을 믿는다"

이와 같이 고백해도 동일한 기독교가 아닐 수도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핵심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다. 신앙은 그 핵심을 한 두 구절로 기록할 만큼 적지 않다. 이들이 말하는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믿고 사랑합니다’는 고백 정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작은 차이에도 선명한 기준을 갖고 그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 신앙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

한 명의 성도가 성경 전권을 뒤적거리며 어떠한 체계를 발견하고 기준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000여년의 기간 동안 수많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무수한 이단의 출몰에 대항하여 교리를 세워 왔다. 성도가 가져야 할 기준은 바로 이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리가 먼저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위험한 사상들이 발생하고(언뜻 보면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차이들) 이런 것으로부터 정통 신앙을 변호하면서 교리들이 세워져 나갔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허무는 세력에 대해서는 역으로 추적하여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작은 차이를 교회로 하여금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런 차이로 다투는 것보다 그런 차이 정도는 묻어 두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을 더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마귀의 공격 수법이었다. 마귀의 현재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교리의 무익성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교리의 중요성을 잊게 하며,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피흘려 세워온 교리를 골방으로 집어 던져 버리고 다시는 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게 해 버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단들이 나타날 때마다 방어했던 값진 교리들을 포기하면 당연히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교리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교리는,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에 대한 교회회의의 합의사항 내지 결정사항이다. 교리는 라틴어 dogma에서 왔지만 이것은 순수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는 신약의 경우 사도행전 17장 7절에서는 황제의 “칙령” 내지 “명령”의 뜻으로, 에베소서 2장 15절, 골로새서 2장 14절에서는 “의문”, 곧 구약의 율례라는 뜻으로, 사도행전 16장 4절에서는 “장로들이 정한 규례”, 곧 예루살렘 사도회의(주후 49년)의 “결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교회회의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을 도그마라 한 것은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이 단어는 속사도 교부 시대에는 “복음의 명령”으로 사용되었고, 같은 시대에 기록된 ‘바나바서’에서는 “주님의 기본 원리” 혹은 “모세가 받은 율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이그나티우스가 쓴 ‘마그네시아서’에서는 “주님과 사도들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교리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 시기는 초기 변증가들이 활동한 2세기의 일이다. 교리란 성경을 통해 우리가 행하는 신앙고백을 개념적으로 잘 정리해 놓은 것이다. 교리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서 도출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정확무오성을 가지는데 반해서,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인간의 지적 노력에 의해 얻어진 만큼, 경우에 따라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만이 무오하며, 교회를 통해 회의에서 만들어진 교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역사상 수많은 논쟁이 벌어진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교리는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날 때마다 어렵게 하나씩 만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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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