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되게도 조용기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예수의 긍정적인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는 듯이 말했다.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든지, 부정적으로 드는 생각을 스스로 설득하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당신도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조용기)

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 이야기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

“받은 줄로 마음에 확신이 들어오고, 받았다고 생각이 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게 될 때까지 기도하였으면 이제는 기도의 말을 달리해야 합니다. 받은 줄로 확신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낫게 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미 구했으면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셨으니 김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미 고쳐주셨으니 더욱 낫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나았으나 증상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나았다고 확신을 주는데도 자꾸 ‘고쳐주옵소서, 고쳐주옵소서’하면 ‘이 사람아, 고쳐주었는데 웬 잔소리가 많으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불신앙의 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조용기)

조용기의 이 내용도 이미 로버트슨이 말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에 찬 보장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눈앞에서 볼 수 없을지라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다 ... 우리들의 역할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권리 증서에 따라서 이루어진 줄로 믿고 말하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형성될 때 ‘그것은 내 것이다’하고 섬광처럼 마음속에서 번쩍인다.”(로버트슨)

이상하게도 조용기가 성령의 계시로 받았다는 4차원을 다스리는 법칙이 P. 로버트슨이 이미 한 말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공교롭게도 로버트슨과 조용기 목사는 절친한 사이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바라봄의 법칙은 히브리서 11장 1,2절의 해석을 전적으로 피상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조용기가 주장하는 ‘바라봄의 법칙’을 끌어냈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은 어땠는지 한번 보자.

현대 믿음 vs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랐 갔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를 듣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노아는 당대 최대의 조선소를 만들어 최대의 배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으로 심고, ‘된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먼 미래에 하늘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물이 올라올 정도의 놀라운 홍수가 날 것을 바라보고, 목표를 정하며 기도하며 확신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주를 다 만들고 방주 안에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들어가고 노아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노아는 따뜻한 식사를 하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이리 저리 당황하여 뛰어 다닐 것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미리 보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로 덮일 때 가만히 앉아 세계 유람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비를 쏟아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제 믿음 없는 기도이니, 비가 쏟아질 것을 감사합니다. 이미 비를 주시기로 약속했으니 그 날이 속히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의 기도(?)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노아는 이 일이 개인적으로 지독히도 하기 싫었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기에 싫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분명한 말을 들음으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장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떠났으므로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믿음으로 사라 또한 미리 잉태할 것을 듣고 그 일이 나중에 이루어졌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함으로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받은 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성경과 조용기 목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중에 비전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비전이라 하지 않았다.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 땅이 아닌 것 같아 새로운 땅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어, 아니 되게 되어 있어’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주여 어느 곳으로 갈까요?’라고 묻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 소원을 정하고 그것을 하나님 존전에서 확정을 받는 형식의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지 않았다.

사라는 어떠한가? “주여 망측하오나 이 늙은 나이에 이런 기도한다고 주책없다 하지 마옵소서, 주여......득남을 원합니다. 아들 하나 원합니다. 주여......비록 여자로서의 모든 기능은 멈췄지만 주께서 능히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하옵니다.” 그렇게 40일 기도 후 확신이 생겨 “주여, 아들 주심을 믿습니다.” “아니지, 주여 아들 주심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바라봄의 법칙’의 허구

그렇다면 왜 이런 거짓 이론을 세상에 뿌리게 되었는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이유 때문이 다. 조용기 목사가 가장 애용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다. 이 말씀 하나를 잘못 해석한 것이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에게 이상한 복음을 인식,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히 11:1)

지금은 안 보이지만 바라고, 믿으면 실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희망과 소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실상, 즉,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성경을 한 구절만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많은 목사들로 하여금 그 이론을 따르게 하였다. 성경 해석의 원리는 전체에서 그 구절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시 본문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정확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핍박에 직면한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매도하거나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축복이 이 전의 모든 축복보다 우월하기에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라고 한다.

1장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옛 선지자들보다 우월한 아들의 신분이며,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후사이며, 모든 세계를 지으실 때도 같이 있었던 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시다.

1장 3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꾼에 불과하고 그리스도는 아들이다.

1장 4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해 하는 모세보다 더 뛰어난 분이시다.

1장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 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런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시고 계시며 다가올 주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장 28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장: 12,13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우리에게 소망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 성도들이 가졌던 소망보다 더 나은 소망을 주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는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제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매번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대제사장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제사를 드렸다. 아주 독특한 것은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며 또한 친히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 (중략)

그리고 11장이 시작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1절)

앞에서 ‘세상 환란과 핍박, 유혹에도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지키라, 보이지 않지만 소망을 품고 이 고난의 시간을 인내로 이겨내라’고 한 히브리서의 저자가 갑자기‘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그것을 바라고 바라면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 강점기에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일제에게 무릎 꿇어 가고 있었다. 이들에겐 희망만이 자기들의 의지를 지킬 수 있는 근거였다. 이런 시기에 국제 정세와 미국의 움직임에 밝은 식견을 가진 지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도착한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을 지지하는 대한제국 여러분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일본이 패배하는 것은 확실시 되어 갑니다. 이미 독일은 항복을 하였으며 일본은 이곳저곳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마지막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방됩니다.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는 여러분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이 바라던 세상이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립이 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믿음은 사실로 여러분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히브리 독자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에게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율법이나 여러 가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에 불과했다. 이제 그 모형이 아닌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장엄한 말씀 앞에서 자기의 꿈이나 욕망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들어주신다고 외치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러한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 이런 거짓 사도의 유혹에 넘어가 세속의 넓은 길로 걸어가고 있다. 믿음을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외치는 히브리기자의 말씀과 달리 내 꿈을 구체적으로 그려서 심지어 확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을 몰아붙이는 기도를 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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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