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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은 명백한 이단적 성경해석의 산물
정대운  |  banneroftru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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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7  00: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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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되게도 조용기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예수의 긍정적인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는 듯이 말했다.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든지, 부정적으로 드는 생각을 스스로 설득하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당신도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조용기)

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 이야기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

“받은 줄로 마음에 확신이 들어오고, 받았다고 생각이 되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게 될 때까지 기도하였으면 이제는 기도의 말을 달리해야 합니다. 받은 줄로 확신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낫게 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믿음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미 구했으면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셨으니 김사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미 고쳐주셨으니 더욱 낫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나았으나 증상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나았다고 확신을 주는데도 자꾸 ‘고쳐주옵소서, 고쳐주옵소서’하면 ‘이 사람아, 고쳐주었는데 웬 잔소리가 많으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불신앙의 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조용기)

조용기의 이 내용도 이미 로버트슨이 말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에 찬 보장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눈앞에서 볼 수 없을지라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다 ... 우리들의 역할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권리 증서에 따라서 이루어진 줄로 믿고 말하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형성될 때 ‘그것은 내 것이다’하고 섬광처럼 마음속에서 번쩍인다.”(로버트슨)

이상하게도 조용기가 성령의 계시로 받았다는 4차원을 다스리는 법칙이 P. 로버트슨이 이미 한 말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공교롭게도 로버트슨과 조용기 목사는 절친한 사이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바라봄의 법칙은 히브리서 11장 1,2절의 해석을 전적으로 피상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조용기가 주장하는 ‘바라봄의 법칙’을 끌어냈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은 어땠는지 한번 보자.

현대 믿음 vs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랐 갔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를 듣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노아는 당대 최대의 조선소를 만들어 최대의 배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으로 심고, ‘된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먼 미래에 하늘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물이 올라올 정도의 놀라운 홍수가 날 것을 바라보고, 목표를 정하며 기도하며 확신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주를 다 만들고 방주 안에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들어가고 노아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노아는 따뜻한 식사를 하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이리 저리 당황하여 뛰어 다닐 것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미리 보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로 덮일 때 가만히 앉아 세계 유람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비를 쏟아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제 믿음 없는 기도이니, 비가 쏟아질 것을 감사합니다. 이미 비를 주시기로 약속했으니 그 날이 속히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의 기도(?)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노아는 이 일이 개인적으로 지독히도 하기 싫었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기에 싫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분명한 말을 들음으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장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떠났으므로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믿음으로 사라 또한 미리 잉태할 것을 듣고 그 일이 나중에 이루어졌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함으로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받은 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성경과 조용기 목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중에 비전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비전이라 하지 않았다.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 땅이 아닌 것 같아 새로운 땅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어, 아니 되게 되어 있어’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주여 어느 곳으로 갈까요?’라고 묻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 소원을 정하고 그것을 하나님 존전에서 확정을 받는 형식의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지 않았다.

사라는 어떠한가? “주여 망측하오나 이 늙은 나이에 이런 기도한다고 주책없다 하지 마옵소서, 주여......득남을 원합니다. 아들 하나 원합니다. 주여......비록 여자로서의 모든 기능은 멈췄지만 주께서 능히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하옵니다.” 그렇게 40일 기도 후 확신이 생겨 “주여, 아들 주심을 믿습니다.” “아니지, 주여 아들 주심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바라봄의 법칙’의 허구

그렇다면 왜 이런 거짓 이론을 세상에 뿌리게 되었는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이유 때문이 다. 조용기 목사가 가장 애용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다. 이 말씀 하나를 잘못 해석한 것이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에게 이상한 복음을 인식,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히 11:1)

지금은 안 보이지만 바라고, 믿으면 실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희망과 소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실상, 즉,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성경을 한 구절만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많은 목사들로 하여금 그 이론을 따르게 하였다. 성경 해석의 원리는 전체에서 그 구절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시 본문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정확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핍박에 직면한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매도하거나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축복이 이 전의 모든 축복보다 우월하기에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라고 한다.

1장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옛 선지자들보다 우월한 아들의 신분이며,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후사이며, 모든 세계를 지으실 때도 같이 있었던 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시다.

1장 3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꾼에 불과하고 그리스도는 아들이다.

1장 4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해 하는 모세보다 더 뛰어난 분이시다.

1장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 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런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시고 계시며 다가올 주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장 28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장: 12,13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우리에게 소망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 성도들이 가졌던 소망보다 더 나은 소망을 주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는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제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매번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대제사장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제사를 드렸다. 아주 독특한 것은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며 또한 친히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 (중략)

그리고 11장이 시작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니”(1절)

앞에서 ‘세상 환란과 핍박, 유혹에도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지키라, 보이지 않지만 소망을 품고 이 고난의 시간을 인내로 이겨내라’고 한 히브리서의 저자가 갑자기‘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그것을 바라고 바라면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 강점기에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일제에게 무릎 꿇어 가고 있었다. 이들에겐 희망만이 자기들의 의지를 지킬 수 있는 근거였다. 이런 시기에 국제 정세와 미국의 움직임에 밝은 식견을 가진 지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도착한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을 지지하는 대한제국 여러분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일본이 패배하는 것은 확실시 되어 갑니다. 이미 독일은 항복을 하였으며 일본은 이곳저곳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마지막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방됩니다.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는 여러분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이 바라던 세상이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립이 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믿음은 사실로 여러분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히브리 독자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에게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율법이나 여러 가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에 불과했다. 이제 그 모형이 아닌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장엄한 말씀 앞에서 자기의 꿈이나 욕망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들어주신다고 외치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러한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 이런 거짓 사도의 유혹에 넘어가 세속의 넓은 길로 걸어가고 있다. 믿음을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외치는 히브리기자의 말씀과 달리 내 꿈을 구체적으로 그려서 심지어 확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을 몰아붙이는 기도를 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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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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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병구 2018-04-12 22:14:32

    열정적인 그리스도인 열정적인 사고의 세속화 사이에서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서 불인의 심리를 평안으로
    이끌어야합니다 인간은 작든 크든 야망이 있고 권력,선망,호색,오만 ,복수 세속 적이지만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도 열정적입니다 그리고 긍적의 힘을 믿고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히려 사후에대한 집착이 더욱 강하
    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노력으로 이룬 결과는 평안 하기보다 불안의 요인으로 늘 작용합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신앙의 열정으로 나타날적에 교회가 현실적 이고
    가시적으로 성장 하는 힘이 된다고 생각며 ,그리스도인 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파된다고 생각합니다.

    {축복의 복음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의 은혜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다(갈 3:13∼14). 또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하나님 중심에서 정직, 공의, 성실, 근면, 충성으로
    생활할 때 가난과 저주에서 놓여나고 생활의 축복을 누리는 축복을 받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후 9:8))}

    이런한 삶이 과연 기독인으로의 삶에가치에 무익한것인가 ? 유익한것인가? 를 떠나서 인간의 근본적 사고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추락할수 끝을 본사람들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자신의 불안의 요인이 무엇이가를 깊이 느끼고
    하나하나 를 다시 버리는 작업을 할것입니다.
    신학이란 학문이 그렀습니다 이미 고전에서 하나님의 계시적 큰틀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인간은
    신학이란 학문에 하나님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세움과 채움을 반복합니다.

    "그래 사마리에 땅,6.000데샤티나,말 300마리가 있다 치자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그래 고골이나 푸슈킨이나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보다 세상의 작가보다 더유명해진다고 치자! 그것이 무슨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답을 찾을수가 없었다."
    그의문을 던진 톨스토이는 결국 예수가 답이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을 맛보지 못한 신자들은 현실에서 어떤 꿈을 꾸어야 할가요?
    솔로몬처럼 가지고 또 채우고 인생의 허무를 배워야할인생은 무엇으로 체험해야 할가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감성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초월한 경륜을 믿음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인력으로 이룰수없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악이 흥행할수록 믿음을 찾아 더욱 열정적으로 신앙의 결의를 하며 실재로 악이 법람할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합니다.

    그것이 성경을통한 하나님의 경영이고 섭리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시카고 대부흥회, 평양대부흥회,80년 한국심령대부흥운동,그속에는 하나님의 경영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에 도구이며, 조용기 목사님도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이 허락한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곳에 흑암의 권세도 하나님의 뜻에 있기에 같이 섞여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탈교회 탈기독교 주의로 흐른지 오래입니다
    그이유에 대하여 알수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단순히 세속적인 교회에 타락에서 왔다고 생각한다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순복음 교인들이 있고 이제 보편적으로 순복음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목회적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단적으로 이단으로 보는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도덕적 문제는 비평할수는 있지만 그의 설교내용은 비평하는것은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를것입니다.

    늘 이런비평 속에 같는 의문은 그들은 생계와학비 는 어찌 공급받었는지? 그들에 가정과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획속에 경영양육 하고 있는지? 세속적 방향과 균형 또는 치우쳐 있는지?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골프는 안하고 있는지 가정예배는 철저하게 하는지 매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검하고 있는지 이웃에 대하여 성경적인 지식만큼 가진것을 나눠가지고 베풀고 있는지 자동차는 무엇을 소유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집에 가전들은 어신고 | 수정 | 삭제

    • lim3329 2018-01-30 13:48:30
    • 진리의검 2018-01-27 23:57:19

      2.하나님을 자신의 종처럼 부리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자녀늬 본분에 감사하여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일개 조들이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는것인지? 성령님을 자기가 기도한대로 불러들여 방언을 받게하고 에언기도를 하게하고 환상을 보여주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며 하나님을 자기의 하수인으로 부린다고 하는지 기가찰 노릇이다 그러함에도 본인들은 사단의 하수인으로써 사단의 종노릇하면서 하나님게 불충하면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의 수하인 종으로 부리고 장난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아니 1%라도 알기나 하는것일까요?
      3.세상적인 쉬운방법으로 악한 게교를 써서 하나님의 일을 쉽게 이루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있는지 판단할때 결단코 반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니 가히 구약 시댜의 니므룻보다 더악한 영걸이라는 평가에 고개가 숙여짐은 무슨 사유일까요? 실로 오늘날 배교의 길을 걷는 대표적인 이단 오순절파 신사도파 자유주의 신학자 펠라기우스 주의의자 로마카톨릭 주의자들에게서는 사단이 주는 ㅅ손쉽고 쉬운 방법 악한 게교를 선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미혹하는사단의 속임수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철저하게 사단에게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며 교인들을 미혹시켜 집단으로 지옥으로 끌고 가는 현실이 정녕 당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평신도인 한사람으로싸 하나미의 복음 진리를 무력화 시키는데 사단의쉬운 방법과 악한 계교 방언 ,방언기도 신사도 운동,에언기고및 영서 환상 직통계시. ccm및 edm음악 ,평상복차림의 열린예배, 종요기 목사가 바라는 4차원의 바라는대로 이루어주신다는 투시 바라봄의 법칙 모두 사단에게 속임당한 세상적인 손쉬운 방법 그리고 악한계교에 철저히 농락당한것인데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 후 사단의 시험을 받고 승리하시는 예수님 복음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정확하고 깊이있게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루 빨리 사단의 미혹에서 바른 진리의 복음을 쫓는 성도로 거듭났으면 하고소원합니다. 특히나 저희 같은 평신도분들 각자의 영에 각인하셨으면 하고 기도해봅니다 .신고 | 수정 | 삭제

      • 진리의검 2018-01-27 23:31:39

        목사님의 귀하신 말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평신도로써 생각하는 조용기목사님, 김세윤 교수님, 박영돈 교수님 그리고 바른믿음에 소개된 신사도와 관련된 목사님들과 신학자, 그리고 이단 복음 사역자분들께 하문을 드리자면 도대채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을 마친 후 사단에게서 받은 3가지 유혹을 통하여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승리하신 답변을 어떻게 배우셨으며 해석하셨으면 저런 지경의 사단의 거짓 복음신학의 소유자가 되셧을까 생각하고 판단할때 실로 대한민국의 바른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유지되어갈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사단의 3가지 유혹과 예수님의 답변을 반어법으로 역으로 해석을 하여보면 에수님께서 답변하신 핵심이 다음과 같다고 저는 배웠습니다
        1,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의 떡을 구하지 아니하는것.......그러함에도 저희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주의나라와 의보다 먼저 구하고 세상 정욕적으로 살아온것 시인하고 자복합니다 그렇지만 조용기 목사가 설파하는 복음은 세상의 떡을 구하지 않는것보다 한가지 더 앞서가는 기도로 바라보고 상상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럴듯한 인본주의적인 사단에게 구하는 기도이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사단에게 빌면서 교묘하게 하나님을 차용하여 미혹시키니 사단이 그의 기도를 안들어 줄리가 없는데 마지막이 미혹스러울 뿐입니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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