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조금 자세하게 말하면 “십자가에서 칭의가 포괄적으로 시작했고 완성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정확에 가까운 요약인 것으로 보였지만, 고경태 목사님의 비평에 의하면 세부적으로 사용된 개념과 설명을 보면 문제가 많은 것을 봅니다.김세윤 신학에 대해서 고경태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김세윤 신학에서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무한, 충만에 참여하게 됨’이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7p ) 그래서 ‘구원의 결국’을 ‘하나님과 같이 됨’을 목표로 제시했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8p)또한 임진남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아포데오시스(apotheosis) 즉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
김세윤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159쪽). 앞에서는 ‘깨닫는 것’이라고 제시했다(149쪽). ‘받아드리는 것’과 ‘깨닫는 것’은 동의어이고, 인간의 전적 자기능력이다. 깨달아야만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유입(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세윤에게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인데, ‘이 내용’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159쪽).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 내포된 안에서 연합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159쪽, 참고,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63-69). 김세윤은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한다고 한다(160쪽). 필자는 서철원 박사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의 전제는 역사적 비평이다. 불트만의 역사적 비평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불트만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의 역사적 탐구를 시행하였던 슈바이처나 그 이전의 사람들도 예수 탐구를 시작하여 예수가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만 제시한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특별하고 선택된 아들이며 고난을 받기 위해 세워진 인간 예수만 그들에게 있다.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문자비평으로 신학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개입하여 자신들의 주관적인 생각과 당시 문화적인 상황을 재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확 무오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세윤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역사적 비평과, 문자적 비평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김세윤은 고린도전서에서 ‘의’(義, 1:30)라는 단어, 세례 때 의인으로 칭함 받음(6:11), 율법에 대한 부정이 두 번 등장한 것(9:19-23, 15:33-57)으로 제시했다(148쪽).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 칭의론에 대한 가르침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148쪽). 모세를 통해서 준 옛 율법의 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해 준 새언약을 성령의 사역이 의를 주는 사역이라고 했다(148쪽).김세윤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의 대표/대신 죽은 것과 죄를 위한 속죄제사로 의인이 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149쪽).김세윤은 칭의 이해에서 바울 상태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음
한국 교회에 톰 라이트의 저술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 IVP에서 많이 번역하였고, 몇 출판사에서 톰 라이트 저술을 번역했다. 김세윤의 저술은 기존에 저술들까지 모두 두란노에서 출판하고 있다. 과거에 발표했던 에세이들도 모두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김세윤과 톰 라이트의 책은 한국 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저자의 신학 전개가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톰 라이트의 저술은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정도다. 많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전개하는 톰 라이트의 전개 방식은 기존의 신학 전개 방식과 전혀 다르게 때문에 신선하고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미로로 들어가는 입문서를 만난 것이다. 톰 라이트에서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서 성도의 구원이 종말에 유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인격적인 비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학자로서 자신이 무례한자임을 나타내보였다.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유보적 종말론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보 (留保)”라는 말을 “예약 (豫約)”이라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한다. 유보와 예약은 영어에서 같은 말로 사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세윤 교수가 유보와 예약이 영어로 reservation 이기 때문에 정말 같은 의미의 단어인가? 미국에 살면서 reservation이 유보와 예약이 같은 의미라고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고 하는 김세윤 교수의 삼위일체 신학은 정통교회가 성경을 통해 세운 삼위일체 교리와 다르다. 김세윤 교수는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표현을 씀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마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김세윤 교수의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표현된 글을 읽는다면 마치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김세윤 교수가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하는 표현은 계시자인 하나님이 계시되는 자인 예수와 같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자면 계시자만이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되는 예수가 계시자(하나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김세윤은 로마서 1장에서 두 개의 복음의 정의를 제시한다. 로마서 1장 2-4절과 16-17절이다(95쪽). 전자는 하나님의 복음,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다윗의 씨)이다(97쪽).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로 기독론을 제시했다(98쪽). 후자는 구원론적 복음이다(103쪽) 김세윤은 롬 1:2-4을 고전 15:23-28, 롬 8:31-39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러면서 논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사도 바울이 구원론적으로 설명한 칭의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복음과 바울의 칭의 이해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김세윤 신학에서 중요 개념 중 하나이다. 유대묵시문학 사상을 예수가 주장했고 바울이 반복해서 주장한다는 동일성 원칙은 21세기까지 변함없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묵시문학적 틀에서 나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국은 그 앞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단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사40:17)“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자는 없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않은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며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9-10)하나님은 만물이 필요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만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존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이렇게 선포했다.
김세윤에게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라고 전편에 제시했다. 김세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의의 교사로서 기독론적 복음이고, 바울은 예수가 이룬 구원의 세계를 선포한 구원론적 복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는 동일한 과정으로 성화와 칭의이다.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동일한 것이다(94쪽).법정적 칭의는 택자를 구주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여 의인의 삶이 시작되는 선이다. 그런데 김세윤은 법정적 칭의를 형벌적 범주에서 대신적 속죄 행위로 주장했다(15쪽). 김세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94쪽). 양자가 동일할 때에 복음에 풍성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지만, 한쪽이 빠져도 의미를 밝히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강의에서 ‘독단’은 용납되지만, 학술지에서 ‘독단’은 합당하지 않다. 김세윤 교수의 는 강의를 저술로 만든 형태이다. 그렇지만 신학 저술로 베스트셀러의 위용을 자랑한다. ‘명쾌한 신학 강의’라고 홍보한다. 학문은 명쾌할 수 없다. 명쾌한 것은 연설에서 가능하다.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전개하며 독단이 허용한 강의를 출판한 학술 저술이다. 저자의 독단을 기쁘게 수용하면 명쾌한 내용이 될 것이고, 저자의 독단에 의심과 거부가 발생하면 답답하고 무서운 저술이 될 것이다. 학문의 설득은 웅변에 있지 않고 논리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합리적으로 설득을 줄 수 있는 논리는 없다.김세윤의 견해도 새관점학파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우수 신학자이기 때문에 한국
김세윤 교수의 저술 1)은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Mohr, 1980의 번역본이다(‘김인자’로 약칭하겠다). 김세윤은 The Origin of Paul’s Gospel, Mohr, 1981. 박사논문을 출판한 뒤에 1984년 2차 개정판을 냈다. 한국에서 출간한 2)은 2차 개정판에서 번역했다. 필자는 김세윤 신학의 핵심이 두 권의 저서에 있다고 보았다. 김세윤은 를 1981년에 한국에 소개하였는데, 한국 교회의 지성을 위한 기초 핵심 도서로 평가받은 스테디셀러이다. 김세윤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1981년 돌아 와서 박사논문을 직접 소개하지 않았다. 자기 사상을 매우 쉽게 정리에서 한국 교회에 소
에타 린네만1)이 루돌프 불트만으로부터 신학을 처음 배울 때, 불트만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접어두고 신약과 과학 연구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불트만은 20세기 성경 비평을 통해 교회역사 전체를 흔들어 버린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에타 린네만은 자신이 배운 신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자신의 책2)을 통해 분명하게 말했다.불트만의 성경 비평학은 한마디로 말해 성경을 역사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고, 모든 기독교 역사를 왜곡시키는 사탄의 도구라고 고발한다. 에타 린네만은 성경 비평학이 어떻게 성경을 왜곡시켰는지, 불트만의 신학전제를 비판하였다. 그녀가 말하는 불트만의 신학전제는 다음과 같다.‘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
최덕성 박사는 2015년 김세윤 교수의 칭의 이해를 ‘유보적 칭의론’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종교개혁의 칭의 이해를 배격하며 거부한 이론으로 규정했다. 최 박사는 김세윤의 (서울: 두란노, 2013)을 읽고 비평했다. 는 김 교수의 체계적인 신학 저술은 아니다. 김 교수의 많은 저술들은 강연을 통해서 발표한 것을 두란노 출판사와 함께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출판한 저술들이 많다. 이러한 저술은 학문적으로 높은 가치를 주기는 어렵다. 김세윤 교수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학자이겠지만, 한국에서 출판한 많은 저술들은 한국용이라고 볼 수 있다. 탁월한 강의이지만 학자의 저술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먼저 김 교수는 전통적인 칭의론을 형벌을 수반한 대신적 속죄 행위(pen
“세레 요한이 펼친 하나님의 나라 운동보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개념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결국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 이름없는 촌부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마치 지나가는 술주정뱅이가 하는 소리 정도로 여기고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라고 추앙되고 있는 김세윤 교수가 이런 말을 예사로이 하고 있다.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책 에서 이렇게 주장한다.“원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이끄는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모두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요즘 김세윤 박사의 칭의신학에 대해 개혁신학 진영의 예리한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김세윤 박사가 최근 동부지역에서 목회자들에게 강의한 약 한시간 분량의 영상을 들어보았다. 영상에서 김세윤 박사는 노골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 신자들이 처음 믿음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칭의가 끝까지 유지되어 확실하게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식으로 강의했다. 김세윤 박사는 그런 유형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의 부작용으로 인해 이미 한국 교회에 열매없는 죽은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만연했다고 하였고, 그 근본적인 문제는 바울의 성경의 여러 곳에 표현되어 있는 경고, 즉 구원으로부터 신자들이 탈락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흔히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칼 바르트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2,000년 동안 지켜온 기독교의 순수한 교리를 자신의 신학으로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또한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과 교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신학적 언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와 형식에 있어서는 같을지 몰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 전제가 틀리다. 바르트의 신학을 언급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조금도 오류가 없다는 기독교 역사적 견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이외의 다른 근원을 통해서 사람에게 올 수 있으며, 기타의 종교적 문헌과 전연 종교적이 아닌 문헌도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이 최근 '바울을 만나러 간다'라는 주제로 공개강좌와 좌담회를 개최하고 소위 '김세윤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이 행사는 전국적으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 전주 상관유스호스텔에서 진행됐다.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는 저서 출간에 즈음해 지난해 10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방한했고, 강연을 통해 "칭의의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 "칭의와 윤리(성화)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다.지난해 10월 소망교회에서 김세윤 교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주제로 "칭의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며 "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죄인이 의인되는 신학적 논의다. 정통신학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산물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주장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한번쯤 다시 뒤돌아 볼 필요가 반드시 있다.오늘날 현대신학은 정통교회의 이신칭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는 지적에서 거듭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칭의와 성도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현대신학이 계속 칭의를 논하면서 루터와 칼빈식의 칭의론이 바울이 가르쳤던 칭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 대표자가 김세윤 교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