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3

▲ 고경태 목사

김세윤에게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라고 전편에 제시했다. 김세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의의 교사로서 기독론적 복음이고, 바울은 예수가 이룬 구원의 세계를 선포한 구원론적 복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는 동일한 과정으로 성화와 칭의이다.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동일한 것이다(94쪽).

법정적 칭의는 택자를 구주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여 의인의 삶이 시작되는 선이다. 그런데 김세윤은 법정적 칭의를 형벌적 범주에서 대신적 속죄 행위로 주장했다(15쪽). 김세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동일한 것으로 주장한다(94쪽). 양자가 동일할 때에 복음에 풍성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지만, 한쪽이 빠져도 의미를 밝히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김세윤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유대 묵시 문학의 가르침과 연속하는 사상이 있다. 김세윤은 케제만의 칭의 개념인 ‘주권적 전이’을 반복했다(85쪽). 칭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다(87쪽). 김세윤은 슈바이처의 견해를 따라서 법정적 칭의로만 이해하면 윤리를 낳지 못한다 비판을 반복했다(88쪽). 그런데 김세윤은 법정적 칭의와 관계론적 칭의를 융합하려는지(78쪽) 이해하기 힘들다. 김세윤은 칭의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포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마지막 때가 유보된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법정적 칭의 개념을 고수하는 것으로 한국 교회를 제시하며, 구원파적 복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제시했다(80쪽).

한국 교회 강단이 기복설교가 다수인 것이 문제지만 구원파적 죄사함의 도식(한 번 죄사함으로 완성되는 구조)은 아니다. 김세윤은 한국 교회의 칭의 이해를 법정적 칭의로 규정하며, 구원파적 복음으로 비교하였는데,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상 체계이다. 김세윤은 칭의가 종말까지 유보된 것을 간과하면 왜곡된 복음으로 비극을 초래한다고 제시했다(80쪽).

한국 교회가 유보된 칭의를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법정적 칭의의 바른 이해가 없이 기복설교가 많으며 복음에 입각한 삶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김세윤이 주장처럼 법정적 칭의와 관계론적 칭의의 융합도 불가능하고, 법정적 칭의와 구원파적 복음도 동일하지 않다. 한국 교회는 법정적 칭의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관계론적 칭의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새관점 학파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적인 신학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관계론적 칭의는 간접기독론에 근거한 윤리 준수(이중사랑계명)를 주장한다. 법정적 칭의에서 기독론은 칼케돈 신경의 그리스도 양성 교리에 근거했다.

김세윤은 롬 1:3-4절을 근거하여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을 인용했다고 제시했다(95, 97쪽). 예루살렘 교회 복음과 바울의 칭의 복음의 동일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복음을 계속한 것이 아니지만 동일한 것이다(갈 1:12, 17). 김세윤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바울의 모습을 주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이다. 기독론적 복음(성화)과 구원론적 복음(칭의)이 동일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한 바울 복음의 독특성을 약화시킨다.

김세윤은 “역사적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 아들 됨을 간접적으로 은근히 시사했는데, 부활한 예수는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고 제시했다(102-103쪽). 이 문장은 모호한 문장이다. 역사적 예수가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으로 제시해서 간접기독론을 주장하는데 ‘은근히’라는 형용사를 첨가해서 간접기독론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는 이제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라는 능동형이 아닌 ‘아들로 선포된 것’으로 수동형을 사용했다. 문장 이해가 마치 부활한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것처럼 느낄 수 있는데, 정작 부활한 예수가 선포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포한 것이다. 간접기독론의 전형적인 문장이다.

김세윤은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하나님 왕국과 사탄의 세력과 우주적 영역에서 투쟁하는 묵시적 틀이라고 제시했다(111쪽). 하나님 왕국과 사탄의 세력의 쟁투가 실제인지 허구인지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문장으로 보면 문학의 허구의 세계이다. 김세윤에게 바울은 하나님 나라와 사탄 나라의 대결인 묵시 문학적 틀(111쪽)을 사용하는 ‘묵시문학적 선지자’이다. 또한 예수도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와 대결에서 이긴다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바울과 동일하게 유대묵시문학적 선지자에 있다. 김세윤은 십자가에서 칭의가 시작(포괄적)했고, 완성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재림 때에 칭의가 완성되기 때문에 재림 어간인 현재는 칭의가 유보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가 확립한 바른 길을 배우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세워 종말까지 윤리적인 삶(이중사랑계명)을 진행할 것을 주장한다.

김세윤의 주장을 따르면 현재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1세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시작된 것이다. 법정적 칭의가 시작하는 것은 한 사람이 태어나 어느 시점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적 칭의와 관계론적 칭의는 융합될 수 없다. 관계론적 칭의에서는 현재 천상의 주 하나님(성자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택자를 효과적으로 부르는 구원 사역이 없다. 김세윤의 1세기에 칭의가 시작 되었다는 칭의 이해(포괄적 방식)는 복음 전도하는 방식에서는 오히려 구원파적이다. 그러나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서는 복음 전도 개념은 거의 없다. 신자가 윤리적 의무(이중사랑계명)을 준수하여 유보가 마친 마지막 때에 완전한 칭의를 이룰 때까지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윤이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로 보며, 한국 교회의 법정적 칭의를 계속 공격하는 것은 결국 나무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죽이려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또한 자기 신학의 목적을 감추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이 칭의한다는 사상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없는 구조이다. 무수히 ‘윤리 없는 칭의’를 구원파적 복음, 바리새파적 복음, 소극적인 복음으로 비판했다. 김세윤은 ‘윤리 없는 칭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성화와 윤리’를 동의어로 보는 것으로도 보인다. 윤리를 행하는 것이 적극적인 복음이다는 것은 영과 육을 융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교회가 불법과 과도한 행동이 많지만 바른 믿음으로 회복해야 할 주의 몸된 교회이지, 다른 신학 체제로 대체되어야 할 몹쓸 기관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였던 바울처럼 한국 교회를 향해서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보내길 바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배교자라고 배도자라고 외치지 않았고 회복을 위해서 가르치며 오래 참았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친절했다.

김세윤의 신학 이해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로 1980년대부터 한국 교회에 지성 체계를 이루었다. 김세윤의 많은 저서들이 베스트셀러로 유통되며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는 계속 침몰하는가? 말썽부리고 우는 아이에게 막대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막대사탕 하나를 주는 것이 오히려 회복과 교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지를 흔들면 과일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말라버릴 수 있다. 나무를 세우는 방법은 지지대를 세우고 거름과 물을 주고 가지를 잘라 주는 것이지 흔드는 것이 아니다. 자를 것이 있으면 자를 부분을 제시하라. 그러나 나무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법정적 칭의는 종교개혁교회(개신교)의 필수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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