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영역에서 가장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병을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공황장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정신세계와 그가 속한 사회, 문화적 배경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공황장애는 남녀노소, 서양인이나 동양인이 나를 막론하고 그 증상에 있어 매우 동일한 유형을 가지고 나타난다.제일 큰 공포는 사람에 대한 대인공포증이다. 사람을 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공포로 공항증에 빠진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든지 상대방이 자기를 안 좋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ob
정양호 선교사(KPM)오늘날 많은 미디어들이 마치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나타난 뱀처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등등을 여전히 뇌까리며 설친다. 아담의 아내 이브는 일언반구 대화 상대할 가치가 전혀 없는 거짓의 애비와 그 잘 난 대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 진리에 동조, 타협, 옹호, 신앙함으로 하여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
(이 글과 문서는 로버트 레담이 지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기술한 자료이므로 사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버트 레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P&R)1643년 9월 6일 제47차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칭의에 대한 부분에서 능동순종을 제기한 것 때문에 1643년 9월 6일 (수) 47차 회기부터 1643년 9월 12일 (화) 제52차 회기끼지 총대들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웨민의 원래 11조는 다음과 같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우리의 주되시며
능동순종은 장로교 신앙고백의 가르침이 아니다. 웨민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라고 가르치는데 능동순종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약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지 말하라고 하면 그 교수들의 실명을 들어 주겠다. 완전한 순종과 모든 순종은 분명히 다르다.장로교 목사, 또는 신학교에서 청교도 회중파의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어떻게 장로교 목사들이 회중파의 능동순종을 주장하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능동순종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장로교단을 떠나든지 아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명기 13장 1-2, 5)“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요즘 큰일 입니다. 지금 WEA 문제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목사들의 타락상 입니다. 판데믹 이후로 그들의 부패가 점점 심각해 지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이 교회를 사유화 하려고 하고있고 성스러운 선교단체를 이용하여 돈을 빼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합동이건 통합이건 부패한 목사들의 우상은 돈입니다. 위 영상의 수법과 다른게 없습니다.제가 아는 목사님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는 저럴 수가 없다 도둑놈이 목사노릇 한것이다” 라고 말 하더라고요. 위의 영상 마지막 부분에서 (고) 조용기 목사가 한
나는 지난 17년 동안 종말론을 연구해 왔다.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부활'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 필자는 약 2개월 전 이 지역에 있는 목회자들과 함께 '다니엘서와 70이레'라는 제목을 가지고 다니엘서를 1장 부터 12장 까지 6시간에 걸쳐 함께 공부한 한적이 있었다. 단 12장은 주로 종말론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필자가 부활, 특히 '영의 부활'과 '영의 사망'에 관해 강의 하던 중, 어느 목사와 토론을 했다. 그 목사는 "우리는 영혼불멸을 믿는데 어떻게 영이 살고 영이 죽을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또한 얼마
글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의 필자의 글이 [바른믿음] 사이트에 게재된 뒤, 이 글을 읽은 몇 몇 분들의 질문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분들은 필자의 글 서론에 잠깐 언급된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서 필자에게 질문한 것 같다. 이 분들의 질문은 하나같이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고 하는 항의성 짙은 의문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 분들의 의아함을 충분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로마서14:7-8)존경하고 사랑하는 아프리카 선교 동역자 여러분!무더운 여름 날씨가 어느덧 시원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금수강산 조국을 그립니다. 이곳은 아직 우기철로 무덥지만 갑자기 뿌리는 빗방울로 시원하답니다. 중반기 사역 보고를 드립니다.현재 이곳 우간다 상황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상반기에도 몇몇 학년만 수업을 진행하다가 델타바이
신복음주의 풀러신학교가 개교한 지 2년 정도 지날 때 1949년 30대의 빌리그래엄이 복음 전도 집회를 캘리포나아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16일 오켄카의 초대로 빌리그래이엄이 보스턴에서 집회를 열었다. 1950년 오켄카는 빌리그래이엄의 전도협회 설립의 도움을 주었다. 이때 오켄카는 빌리그래엄 전도협의 이사가 되었고, 빌리는 플러신학교의 이사가 되었다.빌리그래엄은 사실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빌리그래엄이 전도집회를 하면서부터 돈과 조직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자유주의와 기타 비복음주의 단
지인은 오래 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했다.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주춤한 적 없이 열정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생활도 아주 윤택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이끌어준 가장 존경하는 고마운 분으로 조 목사를 꼽았다. 나도 역시 그분의 설교 테입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고 어쩌다 이곳을 방문할 때면 앞자리에 앉으려 애쓰곤 했다.여러 목사님들이 그의 기복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 신앙을 비난했지만 평신도인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신앙이 이단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의 저서 에서 잘 드러나는대로, “모든 것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
1525년 윌리엄 딘테일을 비롯한 종교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복음주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이후 교회는 복음에 대한 신앙이 왜곡되고 급기야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정통신앙에 대한 바른 신앙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런 교회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 때문에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복음주의자”이다.19세기 영국 성공회에서 정식으로 복음주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여년이 흐른 오늘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는 신학적으로 교리상으로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또 얼마나 먼 위치에 있는가? 분명 오늘의 상황은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상호적 그리스도로 규정했던 심각한 갈등은 지금에 와서는 많이 완화되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정말 그 갈등은 완화되어 있는가? 오늘에 있어서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없는가? 분명히 옛날의 갈등이 완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천주교의 성사제도와 성적자의 사죄권에 관련된 문제는 개신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개신교회가 2가지 성례만(세례, 성찬) 인정하는데 반해 가톨릭교회는 7가지 성사(세례, 성찬, 신품, 고백, 견진, 혼인, 종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외형상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에 비해 성사제도가 5가지 더 많다는 차이보다도 성사제도에 대한 두 교회의 내적인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훨씬 더 심각하다.이 차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직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사죄권이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이다. 개신교회 목
글을 시작하며이국진 목사는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라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제목에서처럼 유나아가 여사도라고 주장한다. 그가 유나아를 여사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롬16: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에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가 통상적인 번역처럼 “그들은 사도들 사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요즘 우리는 알든지 모르든지 ‘다수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정의가 되어 버린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세상에서 아주 빠르게 나타나는 사상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사회 법규에 대한 이해도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교회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규율들이 다 사라지고 있고 교단 헌법과 예배모범은 이미 상실되었다. 특히 예배 가운데 이러한 모습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언론인 김갑수 님의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에 대한 기독교 변증의 두번째 글이다. 붉은 색 부분이 그의 주장이다.) 3. 죄책감의 종교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포한다. 본능대로 사는 것을 죄라고 단정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고 강요한다. 죄책감을 주어서 교회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은 기독교의 사업 전략이다. 찰라를 살다가 흙으로 소멸하는 짦은 세상에서 프라이드를 갖고 살기도 힘든데 원죄를 주장하며 위축시키는 기독교는 인간에게 해롭고 사악하다.하나님이 있다면 인간을 만들 때 왜 본능을 주었는
인기 언론인 김갑수 님이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를 말했다. 대부분의 비기독교인이 적극적으로 동감할만한 잘 정리된 내용이었다.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과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와 많은 사람들이 유사한 제목으로 글을 썼다. 이에 대해서 여러 기독교인이 반박하는 글을 썼고 나도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모든 반박 내용이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기독교가 ‘사탄’이라는 폭력적 단어를 사용하며 항변하므로 시끄러워서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작정하고 비판하겠다며 직설적으로 독설을 날렸다. 몸을 사리지 않는 그의 독설에 우선
우리 교단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WEA에 대하여 별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104회 합동 교단 총회에서 WEA와 교류를 금하는 헌의안이 상정되었을 때 교류금지 찬성이 아닌 반대 결의가 되었다. 사실 2020년 총회 당시 대다수의 총대들은 WEA가 어떤 단체인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거의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총신의 일부 교수들이 2016년부터 총신 신학대학원에서 발간하는 신학지남에 WEA에 대한 교류를 긍정적으로 해야 한다는 소논문을 기재하고 있었고 이것을 찬성하는 일부 목사들의 주장대로 총회결의가
글을 시작하며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기록만 해도, 현재와는 약 2000년의 엄청난 시간적 간격이 있으며, 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고대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더구나 그 기록들은 당시의 고대인들, 복음서는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관습이나 환경 등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이런 난관들을 염두에 두고 원문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