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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와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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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06  1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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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가 한국 교회에 미친 악영향은 너무나 크다. 그의 가장 큰 실수는 기독교의 기도를 이방 종교의 명상과 혼합시키는 관상기도를 한국 교회에 끌어드린 것이다. 자신에게 이단 시비가 주어지고, 교단들의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자 이동원 목사는 관상기도 운동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고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이단 시비로 까지 비화되는 것을 보고 나의 기대가 순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적 관상’이라는 화두는 후학들의 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상기도 세미나를 지난 2년간 유보해 왔고 이제 공식으로 이 세미나를 접고자 합니다."(이동원, 관상기도에 대한 나의 입장(2011년 7월) 

그런데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지난 해 이동원 목사가 운영하는 영성기도원 ‘필그림 하우스’에 방문에 보니 사실과 달랐다. 이동원 목사는 그곳에서 여전히 관상기도의 핵심을 붙들고 있었다. 일찍 이동원 목사의 관상기도 운동을 깊이 연구하여 한국 교회에 고발했던 림헌원 목사가 그때 함께 이동원 목사의 '필그림 하우스'을 방문했었다. 림헌원 목사는 당시 그곳에서 보았던 것을 나중에 이렇게 정리하였다.

“불행히도 수년 전에 다시는 관상기도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만 침묵훈련만 한다며 한국교회 앞에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경기도 가평 산골의 필그림 하우스로 들어갔던 이동원 목사의 거짓된 실체를 필자는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관상’이라는 말(contemplatio)이 이동원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필그림 하우스에서 버젓이 쓰여지고 있는 것을 직접보았다. ‘관상’이란 한글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관상'이라는 뜻의 외국어 ‘contemplatio’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관상의 핵심적인 요소인 ‘침묵’을 강조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버렸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필그림 하우스에서 ‘contemplatio’(관상)라는 단어와 그 개념을 실행하고 있으면서, 한국어 ‘관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니 필그림 하우스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contemplatio’(관상)라는 용어를 잘 모르고 필그림 하우스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한국교회를 조롱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contemplatio’가 곧 ‘관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동원 목사의 비서는 질문하는 필자와 정이철 목사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수 년 전 예장 합동과 예장 합신으로부터 이동원 목사가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여 정치적인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다. 그 때문에 관상기도가 도마에 올라 수난을 받았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고, 지금은 관계가 회복되어 필그림 하우스를 무탈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림헌원, 이동원 목사는 여전히 관상에 매료되어 있다, 바른믿음, 2016년 12월 12일)

   


관상기도 외에도 이동원 목사는 오래전부터 중보기도 운동도 교회에 도입하였다. 이동원 목사의 유명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중보기도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이동원 목사는 미국 워싱톤 지구촌 교회 목회를 하는 동안 중보기도 운동을 교회에 도입하였고, 나중에 관상기도에도 헌신하였다. 이동원 목사는 자신이 중보기도 운동을 교회에 도입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워싱톤 디시에서 목회할 때 안식년을 받아 6개월 동안 쉬는 동안에 기도를 배우겠다고 기도 세미나와 은사 세미나 등을 다 돌아다니며 참가했다. 주로 오순절 계통의 그런 교회들을 많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가면 예배로 안 끝나고 앞에 나가 기도하고 한다. 우리 부부는 겸손히 앞에 나가 기도를 받았다. 아내는 은혜받고 방언도 한다. 나는 이상하게 안 온다. 성령님이 오시다가 아내에게 다 가신다. 열심히 몇 달을 그렇게 지냈는데, 작은 경험들은 있었지만 전격적인 불같은 체험은 없었다.

그러나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일어났던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다. 안식년하기 전에 교인들 가운데 미운 교인, 싫은 교인, 못마땅한 교인들이 많았는데 내 마음이 넉넉하게 채워져서 미운 교인이 불쌍해지고 가서 기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그때 깨달은 것은 기도의 양적인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특히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러자 마음이 훨씬 순화되고 넉넉해진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기도하는 교회로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교회에서 중보기도 사역을 시작했다. 기도를 통해 훨씬 더 교회가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이동원, 건강한 목회위해 균형이 필요, 아멘넷, 2014년 9월 24일)

이동원 목사는 관상기도보다는 중보기도를 더 기본적인 기도사역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이동원 목사의 책 <중보기도 파티> 18 페이지에는 자신의 중보기도 세미나를 이수한 사람들에 한하여 관상기도 세미나에 참여하게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중보기도 운동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에는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았습니다 ... (중략) 그래서 저는 중보기도 사역이야 말로 한국 교회에 새로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또 하나 최근 목회의 여정에서 큰 축복이었던 것은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입니다. 아직도 많이 생소한 영역이지만 최근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몇 차례 관상기도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우선 중보기도 사역을 이수한 교회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말입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18)

이단은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내용을 왜곡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내용을 왜곡, 변질시키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결코 성령의 사람일 수없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귀하게 쓰시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원리를 왜곡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야 하고, 또한 이단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이단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이동원 목사는 여러가지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였다. 이동원 목사는 오순절 운동 이단들이 퍼뜨린 거짓된 방언기도를 기독교의 기도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다음은 이동원 목사의 고린도전서 14장을 강해하면서 했던 현대의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그릇된 내용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이예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언어입니다. 구체적 외국어예요 ...(중략) 그러나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그런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이것은 흔히 영음 방언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14장 14절을 보면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그냥 내 이성적 머리와 상식과 언어로 하는 보통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 ...(중략)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기도가 있는데 방언기도. 이것은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영음방언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영음방언. 영으로 드리는 기도다.”(http://m.blog.daum.net/soilsky/15214?np_nil_a=2)

조금만 성경을 주의깊이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이라는 것이 실제로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올바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고린도에 들어온 이단들이 퍼뜨린 거짓된 방언기도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다. . 이동원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할 때, 여러 오순절 교회 목사들에게 찾아가서 안수를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무렵에 종교다원주의하는 워싱톤의 이상한 곳에 찾아가서 그쪽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관상기도 아이디어도 얻었다고 했다. 이동원 목사의 영이 미혹되고 혼탁해져서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상실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이런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신학을 한 침례교단의 목사들 가운데 고린도전서 14장을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은 없다. 

이동원 목사는 사탄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현대의 거짓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중보기도 운동, 관상기도 운동에까지 자신을 헌신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전도사 시절에 서울 반포의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동원 목사의 설교 테입을 많이 구입하여 들으면서 운전했었는데, 오늘 날 이런 입장에 서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가야하고, 사람보다 하나님만을 중시해야만 마땅하니 어쩔 수가 없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사상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기 위해 그의 책 <중보기도 파티>를 살펴보았다. 그의 책 13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책에 사용된 중보자라는 개념은 결코 우리 주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중략) 오늘 날 전 세계 교회 특히 복음주의적 교회에서 영어로 ‘inter-cessory prayer’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의 중보기도는 그와 동일한 의미의 번역임을 아울러 밝히고자 합니다”(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도 다른 중보기도 운동가들처럼, 예수님의 자리에 대신 앉아서 중보기도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하기야 세상의 어느 누가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중보기도 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무지막지한 일은 천주교의 교황이나 마리아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는 올바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는 성경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리에 앉지 말란 말이야!”라는 논조로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 사상으로 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단체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운동
JAMA(박순영)의 중보기도 운동
엘리야(김종필) 중보기도 운동
인터콥(최바울) 상주 열방의 집의 중보기도 운동
아이합(마이크 비클)의 중보기도 운동
큰 믿음 교회(변승우, 김옥경)의 중보기도 운동
에스도기도운동(이용희)의 중보기도 운동

위에 언급된 대표적인 중보기도 운동관련자들은 왜 중보기도 운동이 비판을 받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결코 용어 문제나 예수님의 자리를 넘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세 가지 신학적인 핵심 사항은 다음과 같다. 부디 중보기도 사상이 비판을 받는 이유를 바로 이해하여 속히 중보기도 운동을 포기하기 바란다.

1) 원래 기독교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기도에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특별한 용어가 오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용어가 그릇되게 사용됨으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제라도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2)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예수님의 자리에 앉겠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 막나가는 이단은 보기 힘들다. 문제는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로 들어가서 조율하고 중재하는 기도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실질적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배하고 조육하는 기도를 드리시는 분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사람에게 적용하니 매우 비성경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중보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마귀에게 미혹되어 이상한 영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어야 할 중보기도자 개념이 참람하게 사람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배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3) 현재 중보기도 운동을 펼치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의 근원을 조사하면 공통적인 내용이 나타나다. 모두 거짓 사도 피터 와그너가 신사도 운동을 정립하기 전부터 시작한 중보기도 운동과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다. 피터 와그너가 70년대부터 중보기도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피터 와그너와 함께 중보기도 운동을 일으켰던 그 주변의 핵심 인물들에게 접신, 거짓된 계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열매가 바로 신사도 운동이다. 피터 와그너와 그의 중보기도 운동 친구들 대부분이 훗날 신사도 운동의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가 되었다. 열렬하게 중보기도 운동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접신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성경에 없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권세있게 기도한다는 중보기도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기도하다가 대부분이 귀신의 미혹에 걸려들었다. 중보기도 운동과 신사도 운동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운동도 결코 그 자신의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다. 그의 중보기도 이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신사도 이단 사상이 흔적이 나타난다. 중보기도 운동의 뿌리는 신사도 운동을 가장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거짓 사도들의 회을 결성하고 제2의 사도시대가 개막되었다고 선포한 피터 와그너에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동원 목사는 그림언어를 아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의 책 <중보기도 파티> 46 페이지를 보니, 그의 중보기도 이론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고르바쵸프 정권이 불안하게 새로운 소련의 역사를 책임지고 있었을 때, 공산당에 대한 향수를 지닌 친 공산주의자들이 과거 공산당으로 회귀하기 위한 반혁명 사건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부세력들은 탱크를 몰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진입했습니다. 그때 탱크 앞에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탱크 앞에서 기도하는 청년을 탱크는 넘어저지 못했습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46)

중보기도를 설명하는 아주 멋진 내용이다. 이동원 목사가 아니면 누가 이런 멋있는 말로 중보기도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엄청난 진실의 왜곡이 그의 이 말속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쿠데타 군의 탱크가 한 청년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그 청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 청년과 뜻을 함께 하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민심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소련 공산당 쿠데타 군의 탱크를 저지했던 한 사람의 용기를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영향을 미치고, 마귀를 결박하여 영적부흥을 이루어낸다는 현대의 중보자들의 기도의 권세와 비유할 수는 없다. 굳이 그 청년을 누구에게 비유를 한다면 오직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 묻은 십자가를 들고 자기 백성을 향한 진노와 심판을 취소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비웃는 마귀를 향하여 자기의 피 묻은 십자가를 들고 “너의 권세는 이제 끝났어!”라고 선언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비유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세미나 참석자들의 모습

이동원 목사는 이 글에서 직접적인 신사도 운동 사상이나 이미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우리의 죄 때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고, 한 사람이 우리를 헤치려고 덤비는 악한 마귀를 막아서면서 “나의 교회, 나의 조국, 나의 가족, 나의 선교단체를 해치려거든 먼저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야!”라며 용맹스럽게 기도하는 모습이 바로 신사도 운동의 권세있는 중보자의 이미지이다.

우리 보통의 인간들 가운데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고, 공격해 오는 악한 마귀를 정면에서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못하는 일이다. 특별한 사람이면 가능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것이다. 피터 와그너와 신사도 운동 이단들은 그런 사람을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 그들이 바로 영적 권세를 가지고 기도한다는 중보기도자들이다. 피터 와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중보의 권세를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세 가지 은사를 은사의 목록에 추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은사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성경의 어떤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과 사역을 통하여 얻은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은사는 다음과 같다. ‘중보기도의 은사’, ‘귀신추방의 은사’, ‘예배인도의 은사’”(피터 와그너)

스스로 중보기도의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신디 제이콥스도 성경에는 없는 중보기도 은사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중보기도의 은사는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음악의 은사나 교회에서는 안내 봉사의 은사, 혹은 음향기기를 직접 다루는 은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신디 제이콥스)

그렇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나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죄 값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가오니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약함과 죄를 빌미로 조롱하고 공격하는 마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나아가면 100% 해를 당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

“네 녀석이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더럽고 부족하다. 그러나 나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나의 죄 값을 지불하였다. 네가 나의 죄를 빌미로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네 녀석은 나를 건드리지 못 해!”

이동원 목사가 자신의 중보기도 이론을 풀어갈 때, 신사도 운동가들의 사상과 직접 관련된 내용을 말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막아서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중보기도를 이야기했다는 것이 바로 신사도 운동가들의 중보기도 아이디어이다. ‘하나님을 막아서는 한 사람’의 이미지로 중보기도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도를 변질시키는 신사도 운동가들의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중보기도 이론의 핵심이다. 이제 이것에 대해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사도 운동가들은 하나님을 막아서는 중보기도자 아이디어를 어떻게 만들고 정당화시켰을까? 완전한 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구약의 불완전한 인간 중보자들의 활동을 그릇되게 적용하였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은 실제로 진노하신 하나님을 막아서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중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 등의 신사도 운동가들은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중보사역을 현대의 거짓된 중보기도 이론에 대입하였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오른 날에도 진노하신 하나님을 막아서서 기도하는 특별한 중보기도자들이 있다고 오해하게 된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사상이 결국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동원 목사의 책에서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에스겔, 이사야 등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이야기를 현대의 중보기도자들에게 대입하는 모양새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다. 실제로 이동원 목사의 책 <중보기도 파티>의 45-62 페이지의 내용을 보니,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중보기도 이론을 위해 활용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동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전망해 보자면, 중보기도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45)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선지자, 왕, 제사장이 등장하기 전 그 모든 기능을 통합적으로 행사하였던 족장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였다. 그러므로 이동원 목사가 아브라함의 신앙 이야기를 지금 우리들에게 직접 대입하여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권리이고 의무입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혼란하게 만드는 오류이다. 

이동원 목사는 다음과 같이 더 심각한 내용도 말했다.  

"공동체의 방향을 바꾸는 중보자(소 제목). 우리의 기도에 따라서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중보기도를 더욱 더 특권으로 인식하게 된 말씀을 소개합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54)

바로 이 내용이 신사도 운동가들의 하나님의 막아서는 영적인 권세와 은사를 가진 중보기도자 사상이다. 대체 지금 누구에게 하나님을 막아서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인류과 교회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루터나 칼빈에게 하나님을 막아서서 기도하여 역사와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사역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을 통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셨을 뿐이다.

그러면 이동원 목사는 무엇을 근거로 우리의 중보기로 인해 공동체의 운명이 변한다고 하는 것일까? 신사도 운동가들이 이 부분에서 반드시 끌고오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을 돌리키는 기도를 했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이야기이다. 모세가 진노하신 하나님을 막아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동원 목사도 자신의 이론의 성경적 근거로 구약의 하나님을 막아선 인간 중보기도자 모세의 이야기를 제시하였다. 

"출애굽기 33장 1-4절과 같은 장 12-16절을 비교 관찰해 봅시다. 먼저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 33:1-4)(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54).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내용을 이동원 목사는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막아서서 계속 이스라엘과 동행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중보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을 뜻을 돌이키셨다. 마음을 바꾸시어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기로 하셨다. 이동원 목사는 이러한 내용을 기술하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중략) 모세가 호소하면 중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아주 신기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그러헥 중보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여기서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러면 내가 갈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처음에는 안 가시겠다고 하다가 모세가 기도하니까 가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 56)   

이것은 이동원 목사가 중보기도 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핵심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보기도 사상의 허구이고, 모든 중보기도 운동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비성경적인 허구성이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변한 것은 모세를 하나님께서 오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인간 중보자로 삼으셨기 때문이지, 모세에게 하나님을 막아설 수 있는 거룩이나 권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동원 목자 자신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바꾸고 하나님의 가시는 길을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친히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했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중보기도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신사도 중보기도 이론의 허구가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이론에서도 정확하게 나타난다.

이동원 목사의 책 <중보기도 파티> 62 페이지의 소제목은 “진노를 막아서는 한 사람”이다. 여기서도 이동원 목사는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고 할 때, 인간 중보자 모세가 중보기도로 하나님을 막아섰다는 구약의 실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에스겔 22장 30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에는) 중보기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았어요. 똑 같은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용서를 경험하고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극명한 차이는 한쪽에는 중보기도자가 없었고, 또 한쪽에는 중보기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 안에 중보기도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가정 안에 중보기도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p.62-63) 

이동원 목사는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었다. 구약의 모세와 같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현대 교회에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세나 에스겔 시대의 중보기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임시 인간 중보자들이었고, 그리스도가 오시어 중보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이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에스겔 시대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임했던 것은 그 당시의 인간 중보자들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졸지도 아니하고 저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

이동원 목사는 이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교회와 가정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있으면 큰 복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피터 와그너 등이 일으킨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사상의 핵심 이론이다. 이들의 이론에 속아서 자신이 모세와 같은 중보기도의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했던 많은 사람들이 귀신에게 미혹되어 불쌍해지고 말았다. 이동원 목사가 신사도 운동가들의 중보기도 이론과 동일한 이야기로 신자들의 신앙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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