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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와 신사도 이단의 중보기도 비교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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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06  1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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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가 한국 교회에 미친 악영향은 너무나 크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의 가장 큰 것은 기독교의 기도를 이방 종교의 명상과 혼합시켜버린 관상기도를 한국 교회에 끌어드린 것이다. 이단판정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자 이동원 목사는 공개적으로 그의 관상기도 운동을 철회한다고 선언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지난 해 이동원 목사의 영성기도원 ‘필그림 하우스’에 방문에 보니 사실과 달랐다. 여전히 관상기도의 핵심이 그곳에서 실행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이동원 목사의 기도원을 방문했던 림헌원 목사는 당시 본 것을 나중에 이렇게 정리하였다.

“불행히도 수년 전에 다시는 관상기도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만 침묵훈련만 한다며 한국교회 앞에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경기도 가평 산골의 필그림 하우스로 들어갔던 이동원 목사의 거짓된 실체를 필자는 다시 목격하게 되었다. ‘관상’이라는 말(contemplatio)이 이동원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필그림 하우스에서 버젓이 쓰여지고 있는 것을 직접보았다. ‘관상’이란 한글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관상이라는 뜻의 외국어 ‘contemplatio’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관상의 핵심적인 요소인 ‘침묵’을 강조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버렸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필그림 하우스에서 ‘contemplatio’(관상)라는 단어와 그 개념을 실행하고 있으면서, 한국어 ‘관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니 필그림 하우스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contemplatio’(관상)라는 용어를 잘 모르고 필그림 하우스를 찾는 많은 사람들과 한국교회를 조롱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contemplatio’가 곧 ‘관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동원 목사의 비서는 질문하는 필자와 정이철 목사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수 년 전 예장 합동과 예장 합신으로부터 이동원 목사가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여 정치적인 어려움을 당했다고 했다. 그 때문에 관상기도가 도마에 올라 수난을 받았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고, 지금은 관계가 회복되어 필그림 하우스를 무탈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림헌원 목사)

   


이동원 목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보기도사역 컨퍼런스를 열고 있었고, 그의 유명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중보기도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이동원 목사는 ‘관상기도 운동’보다 ‘중보기도 운동’을 더 먼저 시작하였다. 이동원 목사의 책 <중보기도 파티> 18 페이지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중보기도 운동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에는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았습니다 ... (중략) 그래서 저는 중보기도 사역이야 말로 한국 교회에 새로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또 하나 최근 목회의 여정에서 큰 축복이었던 것은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입니다. 아직도 많이 생소한 영역이지만 최근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몇 차례 관상기도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우선 중보기도 사역을 이수한 교회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말입니다.”(이동원 목사)

이단은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내용을 왜곡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내용을 왜곡, 변질시키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결코 성령의 사람일 수없고, 하나님이 귀하게 복 주시고 쓰시는 사람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앙의 원리를 왜곡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으로 알려져야 하고, 이단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이단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이동원 목사는 여러가지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였다. 저렇게 유명한 목회자가 그런 일을 했다니 ...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동원 목사는 오순절 운동 이단세력들이 퍼뜨린 방언기도를 기독교의 기도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고린도전저 14장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이예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언어입니다. 구체적 외국어예요 ...(중략) 그러나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그런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이것은 흔히 영음 방언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14장 14절을 보면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그냥 내 이성적 머리와 상식과 언어로 하는 보통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 ...(중략)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기도가 있는데 방언기도. 이것은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영음방언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영음방언. 영으로 드리는 기도다.”(이동원 목사)

조금만 성경을 주의깊이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이라는 것은 당시 고린도에 들어온 이단들의 거짓 방언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말임을 다 알고 있다. 이동원 목사는 미국의 여러 오순절 교회 목사들에게 찾아가서 안수를 받았다고 스스로 자신의 신앙의 변질 여정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 종교다원주의하는 워싱톤의 이상한 곳에 찾아가서 그쪽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관상기도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자신의 영이 미혹되고 혼탁해져서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상실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이런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신학을 한 침례교단의 목사들 가운데 고린도전서 14장을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사탄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거짓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중보기도 운동, 관상기도 운동에까지 자신을 헌신했으니 이동원 목사의 신앙이 참 안타깝다. 내가 전도사 시절에 서울 반포의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동원 목사의 설교 테입을 많이 사서 매일 그의 아름다운 설교를 들으며 운전했었는데, 그리도 존경하고 배우고자 했던 이 분을 이리 비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사상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기 위해 그의 책 <중보기도 파티>를 대략 살펴보았다. 그의 책 13 페이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에 사용된 중보자라는 개념은 결코 우리 주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중략) 오늘 날 전 세계 교회 특히 복음주의적 교회에서 영어로 ‘inter-cessory prayer’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의 중보기도는 그와 동일한 의미의 번역임을 아울러 밝히고자 합니다”(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도 다른 중보기도 운동가들처럼, 예수님의 자리에 대신 앉아서 중보기도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하기야 세상 어느 누가 천주교의 교황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옆자리에 함께 앉아서 중보기도한다고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리에 앉지 말란 말이야!”라는 논조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운동
JAMA(박순영)의 중보기도 운동
엘리야(김종필) 중보기도 운동
인터콥(최바울) 상주 열방의 집의 중보기도 운동
아이합(마이크 비클)의 중보기도 운동
큰 믿음 교회(변승우)의 중보기도 운동
에스도기도운동(이용희)의 중보기도 운동

나를 비롯하여 중보기도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핵심은 다음의 세 가지이니, 위에 언급된 대표적인 중보기도 운동관련자들은 올바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의 핵심을 바로 짚어 속히 중보기도 운동을 포기하기 바란다.

1)원래 중보기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기도에만 적용되는 말인데, 지금 그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제라도 고치자는 것이다.

2)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예수님의 자리에 앉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로 들어가서 조율하고 중재하는 기도를 한다고 하니 매우 비성경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누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배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3)현재 중보기도 운동을 펼치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의 근원을 조사혐 한결 같이 피터 와그너가 신사도 운동을 정립하기 전부에 시작한 중보기도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피터 와그너가 70년대에 중보기도 운동을 강하게 펼쳤는데, 그 핵심 인물들에게 접신과 계시 현상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서 신사도 운동이 형성되었다. 피터 와그너와 그의 중보기도 동무들도 훗날 사도와 선지자들이 되었다. 지금 중보기도 운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접신에 빠지는 경우가 없지않다.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권세있게 기도하는 특별한 (성경에도 없는) 중보기도 은사와 중보자 직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귀신의 미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보기도 운동과 신사도 이단 운동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중보기도 운동을 그만 두어야 한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사상이 자신의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의 이론에서 신사도 이단 사상과의 유상성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보기도 운동의 뿌리는 신사도 운동을 설립하고 사도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제2의 사도기대의 개막을 선포한 피터 와그너에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동원 목사는 그림언어를 아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의 책 <중보기도 파티> 46 페이지를 보니, 중보기도 사상을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말로 그려주었다.

“모스크바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고르바쵸프 정권이 불안하게 새로운 소련의 역사를 책임지고 있었을 때, 공산당에 대한 향수를 지닌 친 공산주의자들이 과거 공산당으로 회귀하기 위한 반혁명 사건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부세력들은 탱크를 몰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진입했습니다. 그때 탱크 앞에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탱크 앞에서 기도하는 청년을 탱크는 넘어저지 못했습니다.”(이동원 목사)

아주 멋진 중보기도에 대한 말이다. 이동원 목사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말로 멋있게 중보기도에 대해 선동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엄청난 진실 왜곡이 그의 말속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탱크가 한 청년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그 청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청년과 뜻을 함께 하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민심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쿠데타 군의 탱크를 저지한 한 사람의 용기를 하나님의 역사경영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마귀를 결박하고 격퇴하여 영적부흥을 이루어낸다는 현대의 중보자들에게 비유해서는 안 된다. 굳이 비유를 한다면, 우리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자기의 피 묻은 십자가를 들고서 자기 백성을 향한 심판을 철회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죄를 빌미로 비웃으며 장난하려는 마귀를 향하여 자기의 피 묻은 십자가를 들고 “너의 권세는 이제 끝났어!”라고 선언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비유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세미나 참석자들의 모습

이동원 목사는 이 부분에서 신사도 운동 사상을 한 글자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우리의 죄 때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고, 한 사람이 우리를 헤치려고 덤비는 악한 마귀를 막아서면서 “나의 교회, 나의 조국, 나의 가족, 나의 선교단체를 해치려거든 먼저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야!”라며 용맹을 발하면서 기도하는 이미지는 신사도 이단들의 중보기도 이미지이다.

보통의 인간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고, 공격해 오는 악한 마귀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못하는 일이다. 특별한 사람이면 가능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할 것이다. 피터 와그너와 신사도 이단들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냈다. 피터 와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중보의 권세를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세 가지 은사를 은사의 목록에 추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은사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성경의 어떤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과 사역을 통하여 얻은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은사는 다음과 같다. ‘중보기도의 은사’, ‘귀신추방의 은사’, ‘예배인도의 은사’”(피터 와그너)

스스로 중보기도의 장군이라고 자처하는 신디 제이콥스도 성경에는 없는 중보기도 은사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중보기도의 은사는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음악의 은사나 교회에서는 안내 봉사의 은사, 혹은 음향기기를 직접 다루는 은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신디 제이콥스)

그렇다면 성경적 신앙에서 신자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포악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대처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진노하시는 하나님께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나가면 100% 살아남고 영생할 수 있다.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의 중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뵈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취하면 100% 이길 수 있다.

“그래 어쩔 것이냐? 나는 여전히 더럽고 부족하나, 나의 중보자 그리스도가 대신 나의 죄 값을 지불하였는데, 네가 나의 죄를 빌미로 더 이상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너는 나를 건드리지 못 해!”

이동원 목사가 자신의 중보기도 이론을 풀어갈 때, 신사도 이단 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말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막아서는 한 사람의 이미지로 중보기도를 이야기했다는 것은 특별한 기도의 권세와 은사를 가지는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아이디어이다. 아니면 한국의 귀신론 쪽에서 만들어 낸 ‘천사동원권’, ‘기도응답권’ 등의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동원 목사를 관상기도의 세계로 인도하였던 그 불순한 영이 중보기도 이론도 그렇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막아서는 한 사람’의 이미지로 중보기도 사상을 수립하고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도를 변질시키는 신사도 이단운동의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중보기도 이론의 핵심이다. 이것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신사도 이단운동가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막아서는 중보기도자 아이디어를 어떻게 정당화시켰을까? 그것은 완전한 중보자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활동했던 구약의 불완전했던 인간중보자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의 실제 하나님을 막아서는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구약의 인간중보자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직접 대입하는 교묘한 사기를 저질렀다.

이동원 목사의 중보기도 사상이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신사도 중보기도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동원 목사의 책에서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에스겔, 이사야 등의 구약의 실제 인간 중보자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있다. 안 나올 수가 없다. 실제로 그의 책의 45-62 페이지의 내용을 보니, 이동원 목사는 자신의 중보기도 이론의 근거를 구약의 실제 인간중보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 사상을 만들어 낸 신사도 운동의 아버지들의 허구이고, 멋모르고 중보기도 중동에 편승하는 사람들의 허황된 모습이다. 이동원 목사의 책의 62페이지의 소제목이 “진노를 막아서는 한 사람”인데, 진노하신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고 할 때, 중보자 모세가 중보기도로 하나님을 막아섰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에스겔 22장 30절의 말씀을 아주 요긴하여 사용하였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이동원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할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결국 심판을 베푸셨는데, 오늘 날에도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위해 중보하는 기도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피터 와그너가 완성한 신사도 이단 중보기도 사상의 핵심이다. 이동원 목사는 신사도 이단 패거리들과 동일한 논리로 자신의 중보기도 사상을 풀어내고 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임시 인간 중보가로 세워진 사람이니 범죄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진노하신 하나님을 막아섰고, 짐승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보장하는 언약을 이끌어냈다. 사무엘도 인간 중보자로 세워졌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모이게하여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기도를 드려서 이스라엘을 부흥케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그런 인간 중보자를 세우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오시어 친히 십자가로 중보를 완성하셨고, 자기의 피로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 백성되게 보장하는 ‘새 언약’을 수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원 목사를 비롯한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중보기도 사역을 오늘 날의 교회에 직접 대입하여 중보기도하는 특별한 인간을 만든다. 그렇게 신앙을 왜곡하니 미혹하는 영들이 그들을 가만히 두겠는가? 중보기도 사상에 빠지면 반드시 귀신에게 놀아나게 되다. 그리고 귀신에게 놀아나는 사람들이 중보기도 운동에 더 빨리 매료된다. (다음에는 이동원 목사의 책에서 고스란히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신사도 이단의 중보기도 이론들을 살펴볼 것이다. 중보기도 운동은 신사도 이단과 무관할 수가 없음을 더욱 더 자세하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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