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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에는 우열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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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에는 우열이 있는가?
  • 이창모
  • 승인 2016.08.17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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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8회)

은사 목록에 나오는 은사의 순서를 놓고 방언 폐기론자들은 그 순서가 은사의 우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위치한 방언은, 방언 통역을 포함해서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것이다.1) 그러나 반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2)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을까? 불행하게도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 8-10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 전후에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모두 귀중한 은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틀림없는 사실 한 가지는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방언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로 설명했듯이,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 중에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은사도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은사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에 어찌 우열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방언 폐기론자들이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다고 해서 방언을 가장 열등한 하급 은사로 단정하는 것은 아마도 방언을 부정하고 싶은 일념에서 비롯된 성급한 결론이라고 여겨진다.

사실상 우리는 은사 목록에 나타난 은사의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이 무슨 의도로 은사를 이런 순서로 나열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은사의 순서에 대해 바울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울이 은사 목록을 기록할 때,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작위로 은사를 나열했을 수도 있다.3) 그러나 나열된 은사의 순서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바울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나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두 군데의 은사 목록(고전12:8-10, 28)에서 방언이 맨 나중에 언급된 것은 왜 일까?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군데 다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방언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단지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다. 필자는 은사 목록의 순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인 가치 면에서 성령의 은사에는 고급과 하급, 우등과 열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서로 단순 비교해서 은사의 고하와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마다 처해 있는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한 은사(고전12:22 참고), 즉 더 많이 쓰이는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병자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유의 은사가 요긴할 것이며, 로마교회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에 대립으로 긴장관계에 있는 교회에서는 서로 섬기는 은사가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서 “첫째는”, “둘째는” 이라는 순서를 매긴 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더 요긴한 은사의 순서를 말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교회의 상황이라면 순서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의 은사 목록에서 왜 방언의 은사가 가장 끝에 나오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한 은사의 순서대로 나열했다’라는 가설에 입각해서 고린도전서의 은사 목록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12:28).

교회에서 가장 요긴한 은사는 교회의 터인 사도들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들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초대 교회가 다 같을 것이다.4)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세워진 교회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가르쳤다. 교회에서 이보다 더 요긴한 은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바울 당시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한 교회에 상주해 있지 않고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가르치며 지역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따라서 당시의 지역 교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부재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아마도 위 본문의 은사 목록은 사도와 선지자들의 부재를 전제한, 즉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를 요긴한 순서대로 나열한 것 같다.

그렇다면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없는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요긴한 은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동안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가르쳐진 계시의 말씀들을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혜의 은사였을 것이다. 또 이 계시를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그것을 다시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지식의 은사도 지혜의 은사만큼이나 요긴한 은사였을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3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히 다룬다). 그래서 은사 목록 맨 앞에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가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은사 목록 모두에서 방언의 은사는 맨 나중에 언급되고 있다(고전12:8-10의 은사 목록에는 맨 나중에 나오는 은사가 통역의 은사지만 통역은 방언의 은사에 부속된 은사이므로 결국 방언의 은사가 맨 나중에 언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방언의 은사가 다른 은사들에 비해 가장 열등한 은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덜 요긴한 은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어쩌다가 교회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고린도 교회의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통역에 의해서만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은사였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에 외국인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예 필요 없는 은사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 현지인 신자들에게 사도나 선지자들이 없을 때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은사이므로 방언의 은사보다 훨씬 더 요긴한 은사였음이 틀림없다. 특히 영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 교회에는 무엇보다도 예언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요긴했을 것이다. 이것이 은사 목록에서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앞에 위치한 이유일 것이다.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고전12:31; 13:1; 14:1, 5, 6, 19, 24, 39을 보라).
 

--- 각 주 ---

1)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71;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26. 그러나 옥성호 형제는 같은 책 p.130에서 은사에는 등급이 없다고 말하므로 일관성을 상실했다.

2)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실상 방언의 은사를 가장 우수한 은사로 여기는 모순을 보인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방언의 은사가 다른 모든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라고 말하고 있으며(이것은 김동수, 리어든, 손기철, 김우현 등 거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들이 방언이 모든 은사의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 은사의 시작이 방언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히 다룬다.), 다른 은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언의 은사의 장점들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우월한 은사가 틀림없으며, 그렇다면 그들도 결국 은사의 우열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3)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p.104-105.

4)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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