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다음의 말이 방언기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33. 기도는 일상용어로 해야 한다” (존 칼빈).

칼빈이 마치 현대의 방언 기도의 존재를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의 방언 기도가 칼빈의 시대에도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칼빈이나 모든 사람들의 글의 어떤 모호한 부분은 전후 문맥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영어로, 라틴어로, 독일어로, 헬라어로 ... 그 어떤 언어 버전으로 읽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후 문맥이다. 

칼빈의 이 말은 당시 프랑스의 로마교회 신부들과 어떤 사람들이 프랑스 말로 기도하지 않고 로마교회의 본부가 있는 이탈리아 말(라틴어)로 기도하면서 다른 신자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지식과 특별성을 과시하는 교만한 행태를 비판하는 <기독교강요> 3권 20항 33장의 내용이다.

<기독교강요> 3권 20항 31장을 후대의 학자들이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붙였다. 말 그대로 성도들이 기도하다가 말하기도 하고 노래하기도 하는 현상에 대해 다루었다. <기독교강요> 3권 20항 32장을 후대의 학자들이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라고 제목을 달았다. 교회의 노래 문화에 대해 다룬 것이다. <기독교강요> 3권 20항 33장을 후대의 학자들이 “기도는 일상용어로 해야 한다”라고 제목을 달았다. 신자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여기서 칼빈이 다룬 내용은 교회에서 자기 모국어로 기도하지 않고 외국어로 기도하는 일들을 비판하였다. 이타리아 사람이 그리이스 말로 기도하는 모습, 프랑스와 영국 사람이 이탈리아 말로 기도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하였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3권 20항 33장에서 말한 전문을 보자.

“그러므로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사랑이나 친절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바울의 권위와 그가 한 분명한 말에서 다소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삼상 1:13), 모든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항상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되어 폭발한다.

기도할 때에 보통 보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3권 20항 33장).

후반부의 내용만 잘라서 보면, 마치 칼빈이 현대의 방언기도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그리고 그 시대에도 방언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무 문맥 안에서 보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이 교회에서 라틴어로 기도하면서 남들을 무시하고 자기의 특별성을 과시하는 오만한 자세를 지적하는 글에서 왜 갑자기 방언기도 이야기를 하겠는가?

칼빈인 인용한 성경 구절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라는 괴이한 소리를 기도하고 주장하였던 성경의 그 사람들의 현상과 다른 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개인기도와 공적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자세를 비교하는 내용일 뿐이다. 칼빈에게 방언기도는 함께 예배하는 신자들과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기도하는 것이었다. 칼빈에게 방언이라는 말 자체가 외국어였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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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