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율법과 칭의에 대한 이해는 아직 중세의 신앙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의 신앙 상태라 함은 로마교회의 이신칭의 신앙을 뜻한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 즉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적극적 의인의 상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무흠상태’로 복귀되고, 이후 신자 자신의 의로운 삶으로 칭의가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믿어 타락 이전의 무흠상태가 된 로마교회 신자들이 적극적인 의를 가진 인간이 되는 길은 율법이 이루어지는 삶이다.

로마교회의 이런 칭의 신앙은 아담이 중립적으로(임시적으로, 무흠상태로) 창조된 후 자신의 의지로 율법을 준수하는 공덕을 쌓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는 펠라기안 신학이 로마교회의 신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법적인 의를 믿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자기의 죗값을 다 갚은 것으로 간주됨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의 신앙을 회복하였다.

종교개혁 칭의 신학에서 칭의를 위해 율법이 하는 일은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의 칭의를 위하여 율법준수를 해야 하거나,  또는 우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가 대표로 율법준수에 성공해야 할 필요는 없다. 종교개혁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되어 얻어지는 칭의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사람이나 그리스도가 율법이 주는 칭의를 얻어야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신앙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장로교회를 보면,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칭의 신앙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다. 중세의 이단 칭의 신앙으로 복귀해 버렸다. 몇 가지 예를 보자.
 

 

김세윤 교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단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표현만 다르지,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범죄 이전의 아담의 상태, 즉 무흠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과의 올바른 상태로 들어간 그 신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 이행함으로 역사 끝에서 있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한 칭의를 선고받는다고 하였다.

표현만 다르지, 자기 의지로 그리스도를 믿은 후 완전한 율법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야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는 펠라기안, 로마교회, 알리니안, 웨슬리안 신학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청교도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믿는 신학자들도 율법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칭의를 믿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성취’의 의미이다. 이것을 어떤 개념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가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율법의 성취는 바로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사람에게 직접 칭의를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율법을 제정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율법을 사람에게 의를 주는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를 주는 수단으로 율법을 제정하셨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피 흘리심이 아닌 직접적인 율법의 방법으로 칭의를 얻게하셨을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칭의를 얻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 사이의 관련성을 0.00001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3).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우리의 신앙 대표) 아브라함이 오직 자기를 믿게 하심으로 칭의를 주셨다. 그때는 율법이 아직 제정되지도 않았던 때이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도 오직 자기를 믿게하심으로 구원을 주신 후 자기 백성답게 살게 만드는 방법으로 율법을 나중에 주셨다.

기독교 신앙에서 칭의(구원)를 얻는 것과 율법을 알거나 지키는 것은 0.00001도 연관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믿도록 은혜를 주시어 사람이 자기를 믿으면 칭의를 선언하셨다.

그런데 지금 한국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들은 하나님의 칭의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친다. 거기서 멈추면 다행인데, 우리가 칭의를 위해 율법을 지키지 못하니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칭의를 주었다고 한다.
 

 

고신 우병훈 교수의 논문, “교회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읽게 되었다. 우 교수는 초대교회의 이레나이우스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다른 표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우 교수는 이레나이우스의 저서 <이단논박>의 일부를 인용한 후, 이레나이우스가 말한 ‘율법의 성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것을 확장하고 성취시키는 분이시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기에,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의가 필요하다” (우병훈 2022, 17).

우 교수의 '율법의 성취'에 대한 이해는 율법 조항들을 하나씩 모두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하나 하나 다 준수하심으로 율법이 주는 의를 얻으셨고, 그것으로 우리가 칭의되게 하였다는 뜻이다.

우 교수의 율법과 칭의 이해는 중세 사람들의 신앙과 같다. 단지 우리 대신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준수했다는 것이 차이이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를 얻는 것과 율법준수 사이에 0.00001과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칭의를 직접 주기 위한 용도로 율법을 제정하시지도 않았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사람에게 칭의를 주려는 의도로 율법을 제정하셨다면, 의인이 되는 길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닌 율법 준수 안에서 준비하셨을 것이라는 뜻이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19).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직접 칭의를 주려고 의도하지 않았고, 칭의를 위해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려고 율법을 제정하셨다는 의미이다.
 

 

칼빈 (1559, 1.6.2, 2.7.2)은 율법이 직접 인간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소망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방법을 알게 만들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신학자 박윤선 (2015, 124, 178)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기 위해 율법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받는 인간이 자기의 부족함과 죄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율법이 왔다고 설명했다.
 

 

서철원(2019, 48-49) 박사도 율법의 기능과 칭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

한국의 장로교 신학자들은 율법준수와 칭의 사이에 0.00001의 관련성도 없다는 성경과 기독교의 매우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중세의 율법준수 칭의 신학이 한국의 장로교 신학자들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나 이 큰 사단의 구름이 걷힐까? 

그렇다면 구원을 위한 율법의 성취(완성)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죽는 것이다.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죄인들은 죽어야 한다는 율법이 성취되어야 한다. 율법은 나를 죽으라고 정죄했으나, 그리스도가 나 대신 죽어서 율법의 성취를 이루셨다. 그리고 율법과 전혀 관련없이 오직 자기의 은혜로 우리에게 칭의를 주셨다. 

 

우병훈. 2022. “교회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 한국장로교 신학회. 320.

존 칼빈. 1559기독교강요 (김충호 역).

박윤선. 2015. 계시의존 사색. 서울: 영음사.

서철원. 201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서울: 쿰란출판사.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