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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교수의 신학자질이 너무 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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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교수의 신학자질이 너무 딸려
  • 이창모
  • 승인 2015.05.29 22:4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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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김동수 교수의 거짓 방언'(3회)
한국의 대표적 거짓 방언 옹호자 김동수 목사(평택대 교수)

평택대학교 교수인 김동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을 옹호했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김동수)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그가 과연 정상정인 신학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전후문맥을 무시하고,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어린아이 수준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진술임을 간과하고서 단지 문자대로만 본문을 읽은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위의 바울의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아 충족성에 빠져, 복음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여겼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왕들이 되었다’라며 자만하는 그릇된 신앙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1)

바울은 이들의 그릇된 자만을 인용하면서 냉소적으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다.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의를 염두에 두고 8절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이미 배부른 자들이 되었구나(너희는 이미 부요한 자들이 되었구나). 우리를 떼어 놓고 너희는 벌써 왕이 되었구나! 실제로 너희가 이미 왕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의 왕 노릇함에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2)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수 교수식대로 이 본문을 문자대로만 해석한다면, 고린도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통치에 왕처럼 참여하고 있으며,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해석인가? 이러고도 어찌 김동수 교수가 방언을 논할만한 신학자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과 마음과 육체를 다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기도(기도하는 자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수식어는 더러 쓰지만(엡6:18; 유20절) “영으로”라는 수식어는 굳이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과 육체와 함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거짓 방언자들은 방언기도가 무슨 특별한 기도라도 되는 것처럼 “영으로 기도한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고,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정상적인 기도를 회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에 힘써야 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수련회에서 거짓 방언을 받은 이후 30년 동안 그것으로 기도(?)했었던 필자는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짓 방언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이제라도 허망한 방언기도를 버리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라. 그리고 자신이 아는 말로 또박또박 하나님께 기도하라. 비록 처음에는 힘이 들지라도 말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방언으로 밤새 기도하기는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말로 진실을 토하며 밤새도록 기도하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크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작은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방언자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소통하는 바른 기도를 빨리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표현한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을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넋을 놓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기도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과 마음이 함께 기도함으로써 영과 마음이 다 아는 바른 기도를 할 것이며, 찬송도 영과 마음이 다 아는 바른 찬송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에서 방언기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언기도의 폐해(자신과 소통되지 않음)를 지적함으로 방언기도를 버리도록 고린도 교회를 설득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6-17절에서도 14절에서 언급한 방언기도의 불소통의 폐해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 14절이 방언기도를 하는 ‘당사자 자신’에게 미치는 불소통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16-17절은 ‘교회’에 미치는 불소통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 영으로” 하는 방언기도의 폐해를 명백히 알고 있는데도,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겠다.’, 즉 방언으로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을 리는 결코 없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살피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대상이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으로 너무 어린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너희가 하는 방언기도는 거짓 은사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바울은 5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고전3:1-2 참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그러나)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그러나)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괄호 안의 ‘그러나’[de, 데]는 헬라어 원문에는 있으나 개역개정에는 없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의 의미는 방언기도도 하고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영과 마음이 함께 하는 기도’, 즉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말이다.3)

사람을 영적인 존재라고 말할 때, 이미 ‘영적’이라는 의미 안에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과 마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도 바울이 굳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분리해서 표현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굳이 이런 표현으로 ‘너희들은 영 따로 마음 따로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나는 영으로 기도할 때 또 마음으로도 함께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거짓 방언자들의 주장대로 방언기도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그렇게 능력 있는 기도가 사실이라면 기도할 때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내 마음이 아는 것보다 더 심오한 것을 아는 내 영이, 비록 내가 아는 언어는 아닐지라도 하늘 언어로 놀라운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기도쯤은 안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거짓 방언자들에 따르면 일반적인 기도의 능력은 감히 방언기도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이 점이 사실이라면 기도하는 자들은 능력이 출중한 방언기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방언기도를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면 능력이 별로 없는 일반적인 기도라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출중한 능력의 방언기도를 하고 나서 굳이 별 볼 일 없는 일반적인 기도까지 또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만약 바울이 15절에서 방언기도와 함께 일반적인 기도도 하겠다는 뜻으로 말했다면 바울도 어리석은 자임이 틀림없다.

어떤 거짓 방언자들은 바울의 이 말을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통역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리석은 짓이기는 마찬가지다. 거짓 방언자들은 방언기도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영적 비밀을 하늘 언어(방언)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를 하늘 언어로 표현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해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란 말인가? 더 기막힌 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표현한 방언기도를 어떻게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해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설령 통역이 된다고 하더라도, 거짓 방언자들의 말대로 마귀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하나님께 은밀하게 하는 것이 방언기도라면 더 더욱 통역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마귀에게 비밀이 탄로 나면 하나님이 곤란해지실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이들이 하는 방언기도와 통역이 거짓이기 때문에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순이다.

바울은 14절에 언급한 비정상적인 방언기도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15절에서 부정 접속사 ‘데’(de, 그러나)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그리고’(kai., 카이) 마음으로도 기도하겠다.”는 것으로도 자신의 뜻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만, 부정 접속사 ‘데’를 의도적으로 ‘카이’ 앞에 덧붙여서 “영으로 기도하고”보다 “마음으로 기도하고”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결심을 더욱 분명히 한다. 이것은 “영으로 기도하고”와 “마음으로 기도하고”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백하게 밝힘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영으로 기도하고’가 14절에서 언급한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 즉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다.

바울은 이어 16-17절에서 마음, 즉 이성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으로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밝힌다. 여기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도 역시 ‘불소통’이다. 바울은 방언기도나 방언 찬송이 설령 신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는 자신이나, 그것을 듣는 다른 사람들이 방언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14:16-17).

여기서 바울이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영으로 축복”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거짓 방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면 16-17절의 방언을 왜 거짓 방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에 나타난 방언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 현지인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지인 신자들과는 소통되는 말(아마도 헬라어)이 있는데도 소통되지 않는 방언으로 말하고, 다시 그것을 통역해서 소통하려는 것은 바보짓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도 이런 바보짓에 역사하실리 없기 때문에 16-17절의 방언은 거짓 방언으로 단정해도 무방하다. 만약 “네가 영으로 축복”하는 말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이 방언은 통역할 수 있다. 그러면 바울은 고뇌하는 대신에 5절과 13절에서처럼 이들에게 통역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네가 영으로 축복”한다는 방언에 대해서는 통역하라고 말하지 않고 불소통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방언은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거짓 방언의 특징은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이다. 만일 이런 거짓 방언이 교회 안에 범람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의 불소통으로 교회와 하나님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며, 지체들 간의 불소통으로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것이다(고전14:11).

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서로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심판의 전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몸 된 교회가 결국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고린도 교회는 서로 다투며, 고소하고, 당을 짓는 등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과 지체들 서로에게 외국인이 되는 심판의 전조를 피하려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과 지체들 간에 소통해야 한다.

즉 현지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는 뜻 모르는 방언 대신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해야 하며, 방언을 말할 때는 통역할 수 있는 방언을 말함으로 외국인들뿐 아니라 현지인들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을 풍성히 구해야 하며(고전14:1, 5, 19, 24, 39), 방언을 말할 때는 통역이 가능한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전14:11-13).

 

--- 각주 ---

1)빅터 C. 피츠너, <고린도전서>(이기문 옮김)(서울: 컨콜디아사, 1990), pp.79-80.
2)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p.91.
3)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115.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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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2015-06-11 02:00:32
정상적인기도를밝혀주신목사님께감사와격려를보냅니다

투덜이 2015-05-30 07:39:57
평택대학교 전체를 수준 이하로 볼 수는 없겠지만, 김동수 교수가 있는 신학과만큼은 상당한(?) 수준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네요~~

김주승 2015-05-30 03:17:18
평택대학교의 수준이고 또 한국 교회의 수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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