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성우 목사(이후 정성우)의 <청교도 준비교리란 무엇인가>의 1장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여섯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율법의 기능과 관련하여 청교도들은 ‘준비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를 주장하였다. 이는 성령께서 은혜 언약 가운데 택자들에게 율법의 기능으로 역사하사 죄인된 인간들, 즉 구원을 위하여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하사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정성우, 30)

청교도들이 율법의 기능을 불신자들에게 먼저 적용하여 죄인들이 자신 비참함을 알게 하여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그랬다고 정성우가 주장하는 것이다. 결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지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은 하나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이다. 지금부터 4500년 전의 아브라함이나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10분 전에 구원받게 될 사람이나, 구원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을 부르시어 믿게 하심으로 구원이 발생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하심(칭의)을 얻었고,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3)

아브라함 때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이 훗날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작정 안에서 구약의 사람들이 자기를 믿게 하실 때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미리 적용하심으로 구원을 주셨다. 아브라함 이후 모든 구약의 사람들이 그와 동일한 믿음의 원리 안에서 구원 받았다.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자 율법을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율법 준수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자 나중에 시작했다. 하물며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구원을 위해 율법을 먼저 배우고 지켜야만 제대로 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정성우의 회심준비론이 어디 가당한 것인가? 신약의 어느 사도가 정성우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로 밀치고 먼저 율법의 기능으로 사람들에게 무슨 변화를 일으키려고 시도했었는가? 성경 앞에서 우스운 소리이다. 정성우는 이제 그 입을 다물고 바르게 배워야 할 것이다.
 

“1, 준비교리란 사실상 율법의 용도(기능)과 같은 개념이다. 따라서 준비교리를 이해하기 이해서는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 멜랑히톤, 츠빙글리와 칼빈이 말하고 있는 율법의 3용도를 이해해야 한다.” (정성우, 30)

정성우는 조금 앞에서 “인간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하사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30)이라고 자신의 회심준비론을 설명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원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게 함으로 그들이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함을 발견하여 겸비해짐으로 스스로 그리스도를 찾게 한다는 것이 회심준비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조금 뒤에서는 회심준비론이 이미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의 성화를 측정하는 것이 회심준비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성우가 회심준비론이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뭔 소리를 하는가?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성령충만하여 신실하게 사는 성도에게는 율법이 지적하는 죄가 나타나지 않아야 정상이라는 가르침이다. 정성우의 회심준비론은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를 강조하는 이론인가? 대체 무슨 말인가?
 

“청교도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에 의한 준비 개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비주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은혜를 바탕으로 한 청교도 교리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종종 방해해 왔다.” (정성우, 31)

정성우가 로마교회의 준비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준비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정성우의 말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믿음을 택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로마교회, 알미니안, 청교도의 구원론(회심준비론)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움의 은총’을 먼저 주시니 인간의 자유의지가 반응하여 믿음을 가지기로 결정함으로 구원의 길로 접어든다고 가르친다. 알미니안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행(先行)은혜’를 먼저 베푸시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반응하여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율법이 선포되고 성령이 역사함으로 영적각성이 일어난다고 가르쳤다. 영적각성은 구원과는 무관하고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각성되어 자신의 죄와 비참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며 구원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로마교회의 '도움의 은총', 알미니안들의 '선행 은혜', 그리고 청교도들의 '영적 각성'은 모두 사람이 자유의지로 구원의 길을 찾게 한다는 점에서 같은 개념들이다.
 

 

“청교도들은 회심(conversion)을 순간적 또는 단번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대신 청교도들은 회심을 은혜 언약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인을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시는 전체의 과정으로 보았다.” (정성우, 3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심은 순간적 또는 단번의 사건으로 보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청교도의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항상 이분법에 빠져 ‘인간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회심은 전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정성우, 32)

개종(회심, conversion)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들과 불신자들, 그리고 무신론자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개종은 순간의, 단번의 사건이지 장기적, 연속적 사건이 아니다.  정성우가 말하는 모호한 회심 개념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의 신앙성장 또는 성화라고 해야 맞다. 개혁신학은 성령이 택자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한 성령이 역사하여 죄인이 믿음고백에 이르게 되는 순간 구원이 완전하게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개와 기도와 예배와 성화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정성우가 말하는 죄인이 변화되는 전체적 과정으로서의 회심은 성경과 개혁신학에 맞지 않고, 또한 웨신서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다. 웨신서는 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말씀을 수단으로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 이후 성례를 통해 구원 받았음에 대한 믿음이 강화된다고 가르친다.

“선택된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믿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행하신 일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으로 그리고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로 그것은 증가되고 강화된다.” (WCF 14:1)

 

 

서철원 박사는 구원을 회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르지 않고 회개라고 해야 맞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에로 돌이킴을 통상적으로 개종 혹은 회심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회심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고 회개라고 해야 한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가 주 예수에게로 돌이킨 경우에도 회심 내지 개종으로 말할 것이 전혀 아니다.” (구원론 71)

“복음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과 동시적으로 성령의 권면을 따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을 하게 된다.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한다. 믿음고백과 회개는 언제든지 같이 가기 때문이다.” (구원론, 66)

성경은 구원 얻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회심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회심했다고 하지 않고 ‘생명 얻는 회개’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웨신서도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회심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 즉 성령의 역사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며, 그 교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 (WCF, 15:1)

정성우는 구원이 성령의 순간적 사역이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의미로 회심이라고 우기는데, 계속 그럴 것이면 기독교를 떠나 청교도로 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 목사하지 말고 청교도 목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목사로 있으면서 계속 그처럼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될 것이다. 기독교는 성령이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동시에 은혜로 역사하시어 믿게 하심으로 즉시, 그리고 영원히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연속적 중생 사상과 유사한 정성우의 회심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율법의 기능과 율법의 행위를 혼동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와 사람이 하는 행위를 구분하지 못한다. 준비교리는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 또한 문론 중요하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수고하고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열매이다.” (정성우, 33)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열매라고 정성우가 비교적 바른 말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불신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고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가 율법준수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과 무관한 사람에게 먼저 율법을 가르쳐서 지켜보라고 강조한 후 적당한 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회심준비 사상을 주장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정성우의 신학과 사상이 너무 심오하여 파악하기 어렵다. 
 

“율법의 기능은 중생 이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고, 율법의 기능이 중생 이후에 온다고 하는 자들은 준비교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중생 전부터 시작하여 죄인된 인간들의 비참함을 깨닫게 하며 그들을 소망 없는 자들로 만들어 자신이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임을 알고 그리스도에게 달려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정성우, 33-34)

소설이다. 누가 정성우에게 이런 소설을 쓰라고 했는가? 대체 성경 어디에 구원 받기 전의 사람에게 율법을 들이밀면서 지켜보라 강요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중생받지 못한 사람에게 율법이 그 죄인의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발휘한다고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아브라함은 먼저 자기를 불러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칭의(구원)된 후에 율법을 대표하는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의 신앙의 여정이 먼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이고, 모두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구원론과 다른 구원론을 가르치는 정성우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이 맞는가? 정성우의 믿음의 조상은 누구인가?

정성우는 칼빈과 하교리문답이 자기의 이론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정성우가 인용하는 자료들은 모두 엉터리이다. 정성우는 동일 단어 수집에 미친 사람 같다. 같은 단어, 예를 들어 칼빈의 글에서 '준비'라는 단어만 나오면 덮어놓고 칼빈이 회심준비론을 가르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정성우가 인용한 내용들을 조사하고 싶지도 않다. 
 

“청교도의 준비교리를 가르치면 성도들이 낙심과 우울증에 빠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이란 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도들이 절망하고 낙심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말한다.” (정성우, 34)

조나단 에드워즈가 회심준비론을 부지런히 하면서 부흥을 일으켰으나 그의 교인들 가운데 정신이 약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자살하였다. 그래서 부흥도 끝났고 그 교회도 이상해지고 말았다. 에드워즈가 준비론 목회를 잘못했다는 증거 아닌가? 정성우의 교회 신자들이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라는 소문도 들려온다. 죄를 강조하다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정성우의 말 자체가 이상하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이 생기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곳에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죄에만 집중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성령이 그 교회에서 역사하지 않고 어디에 가셔서 깊이 주무신다는 것이다. 그곳에 복음이 없으므로 그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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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