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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언약이 구원의 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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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언약이 구원의 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 정이철
  • 승인 2020.04.13 08:1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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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세 번째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고 있고, 특히 그들의 개혁운동의 신학적 동력원인 행위계약 사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저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세 번째 소감이다.

“퍼킨스는 ... ‘하나님은 사람에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요컨데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퍼킨스는 언약의 일방성과 양방성 모두를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안 교수의 말/ 112 페이지)

안 교수는 퍼킨스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야 하나님이 주신 구원 언약이 성립된다고 가르쳤다고 소개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기회(은혜)를 주시고, 사람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함(언약의 조건)으로 구원 언약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구원론이 청교도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의 신학에서 그대로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안 교수는 퍼스의 이런 언약 사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퍼킨스는 언약의 일방성과 양방성 모두를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안상혁 교수)

결국 안 교수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부정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함으로 구원 언약이 완성된다고 하면 신인협력구원론이고 행위구원론이다. 이런 위험한 주장을 청교도주의자들은 언약의 일방성과 쌍방성의 조화라고 미화한다. 퍼킨스가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이 전파되면 잉글랜드 국민들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면서 종교개혁의 주체가 되는데 장애가 올 것이므로 사람에게 구원을 위한 역할을 부여하여 스스로 분발하게 만드는 청교도 언약 신학을 도입하였는데, 결국 신학의 변질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데 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칼뱅의 작정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청교도 언약 신학을 규정하는 시도 역시 퍼킨스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정과 언약은 퍼킨스의 신학 체계 안에서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안 교수의 말/ 112 페이지)

칼빈의 신학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상이 전혀 없다.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쳤다. 칼빈이 퍼킨스와 같이 언약 신학을 따로 정립한 적은 없으나,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과 은혜가 그의 모든 신학과 사상의 중심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 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21.1)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기독교강요, 3.21.1)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과 은혜를 전적으로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의 반대가 펠라기안 신학, 알미니안 신학, 천주교의 구원론인데,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합당한 반응을 조금 추가할 뿐이다. 사람의 반응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 다고 가르치는 교회의 신자들이 더 부지런히 회개하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단지 문제는 영원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비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퍼킨스는 국민들 모두가 종교개혁자가 되도록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을 약화시켰다. 언약의 하나님의 일방적 요소를 약화시키고 사람의 반응과 역할을 함께 강조하는 쌍방적인 언약 신학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결국 칼빈의 예정 신학을 옆으로 밀쳐내는 대안 신학으로서 퍼킨스의 언약 신학이 등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교도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기를 싫어한다. 청교도주의자들은 안 교수처럼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칼빈의) 예정과 언약은 퍼킨스의 신학 체계 안에서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112 페이지)

필자는 안 교수의 책에서 퍼킨스로부터 시작된 청교도 언약 신학이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벗어났고 성경적 구원 신앙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다음의 이 내용이다.

“멀러(R. A. Muller)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퍼킨스의 저작인 <황금사슬>(A Golden Chaine)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은혜 언약과 하나님의 선택 교리 사이의 조화이다. 이 논문에서 퍼킨스는 언약을 하나님의 ‘선택 작정’을 구속사 속에서 실행하기 위한 ‘외면적 수단’으로 규정한다.”(안 교수의 말/ 112-113 페이지)

필자는 아직 행위계약 사상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퍼킨스의 책 <황금사슬>을 읽지 못했으나, 조만간 읽고 서평을 하려고 한다. 안 교수의 스승인 칼빈신학교(은퇴)의 멀러 교수의 논문 속에 퍼킨스의 <황금사슬>에 나타나는 심각한 오류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퍼킨스는 언약을 하나님의 ‘선택 작정’을 구속사 속에서 실행하기 위한 ‘외면적 수단’으로 규정한다.”(안 교수가 인용한 멀러의 말/ 113 페이지)

멀러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퍼킨스는 하나님이 언약을 구원을 주시려고 선택한 사람에게 구원의 수단으로 주셨다고 말했다는 의미이다. 과연 성경의 언약들은 누구에게 주어졌었는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는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는가? 퍼킨스와 멀러와 안 교수는 하나님이 장차 구원하려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언약을 받은 사람의 반응과 행위가 구원의 완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언약 신학, 즉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천주교의 신학을 용인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언약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언약의 용도는 이미 구원 받고 하나님 백성된 사람들에게 구원을 영원히 보증하시고,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수단이 아니었던가? 청교도 언약 신학이 가르치는 것처럼, 그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주셨는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언약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과 행위가 구원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의 언약들이 누구에게 주어졌었는지 살펴보자.

1)아담과 맺은 첫 언약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내용이 명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는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언약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서철원 박사가 잘 설명하였다.

“언약의 장인 창세기 2장에는 이 진리가 명기되지는 안했으나 그 문맥에 의해 분명하고, 3장의 타락 기사에서 더욱 분명하며, 12장 아브라함의 소명과 17장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그 이후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와 그 후 구약 전체가 다 처음 언약 체결의 목표와 합의 사항이 이 진리이었음을 분명히 한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23)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없어진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려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과 반복적으로 주신 언약들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창조하신 후 아담이 영원히 하나님 백성으로 살고, 하나님은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이 되자는 언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아담의 행위를 규정하는 언약을 주셨다고 해석하면, 기독교와 하나님의 성품이 성경의 전체 내용과 달라진다. 먼저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구원)을 주시고 하나님 백성 삼으신 후 언약을 주셨다면, 은혜의 하나님이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러나 아담이 장차 영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 하나님 백성될 수 있는 방도로서 언약을 주셨다면, 아담의 행위와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진다. 구원도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고, 사람의 노력과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구원으로 전락한다.

더욱 더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구원(생명)도 없었고 하나님 백성도 아니었던 아담이 구원 얻고 하나님 백성될 수 있는 기회(언약)를 살려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회개가 용납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를 내렸다고 가르치는 것이니, 기독교의 출발점인 아담의 원죄가 바르게 설명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인격도 이상하게 비틀어지게 된다. 여러 요소들을 볼 때, 하나님의 첫 언약은 이미 하나님 백성이며 선악과 밖에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아담과 하나님이 영원히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으로 남기 위해 맺으신 언약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2)노아와 맺은 언약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지개를 증거로 삼는 언약, 즉 또 다시 물로 심판하여 인류를 멸망사키지 않으시고,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게 만드시겠다는 복을 보장하는 언약도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 백성된 사람들에게 주신 언약이었다. 그 언약을 받을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이 영원히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새 인류의 조상으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으므로 그 언약을 주신 것이다.

3)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구원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확증하셨다. 그리고 동일한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준비한 쪼개어진 짐승의 몸들 사이를 친히 통과하시는 방식으로 언약을 주시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9-17)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자기의 생명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이 언약을 주실 때,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이었고, 이미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사람이었다. 앞으로 구원 받고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그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4)시내산에서 모세의 중보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언약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의 유월절 예식, 사도 바울이 신약의 세례와 성찬과 일치시킨 홍해도하와 만나와 생수체험을 한 후 시내산에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짐승의 피를 중보로 하여 언약을 받았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약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언약이었다.

5)여호수아의 중보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여호수아가 중보자가 되어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도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이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언약이었다. 결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한 언약이 아니었다.

6)요시아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왕하 23:2,3)

구약의 종교개혁자 요시야 왕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도 앞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 백성들이 될 사람들에게 구원의 과정과 수단으로 주신 언약이 아니었다.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이었다.

7)그리스도의 중보로 맺어진 영원한 새 언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1-33)

구약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는 최종적 언약,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물로 삼고 맺어지는 최종적 언약을 예언한 구약의 예언에서도 하나님의 최종적 언약은 앞으로 구원 받을 사람들과 맺어지지 않고, 이미 구원을 얻은 백성들을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하시는 최종적인 언약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최종적 새 언약도 이미 구원 받은 자기의 제자들과 체결하셨다. 더 이상의 추가적인 언약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종적 새 언약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이미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체결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모든 성도의 구원의 영원함을 보장하는 언약이었지, 예수 믿고 구원 받을 기회를 열어주는 차원의 언약이 아니었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은혜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주어졌다. 택하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과 절차로서 언약을 주신 적이 없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의 언약 조건에 잘 반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천주교의 신학이 성경적인 신학이 되었고, 종교개혁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퍼킨스가 도입한 청교도 언약신학은 행위구원, 신입협동구원을 조장하는 거짓 신학이고, 그 목적은 잉글랜드 국민들이 노력으로 구원을 얻게 만드는 대중적 청교도 개혁운동을 성공시키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신 자기 백성들에게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언약들을 주셨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여 새 언약을 주신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은혜로 구원하신 자기의 (죄악된) 백성들을 끝까지 은혜로 보존하시어 역사의 끝에서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먼저 택하시고 구원하여 내신 백성들을 영원히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 스스로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으로 남으시기 위해 언약들을 주셨다.
 

맺는 말

퍼킨스와 리차드 멀러와 그들의 신학을 배운 안상혁 교수, 모두가 성경의 거룩한 언약을 왜곡했다. 성경의 언약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한 백성들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지키시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베푸신 언약들이다. 그런데 청교도들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와 자유주의 신학과 감리교 신학을 배운 리차드 멀러, 그들의 신학을 분별없이 수용한 안상혁 교수는 구원받기 위해 예정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결국 언약을 받은 사람들의 행위, 노력, 조건, 역할이 언약의 완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마땅히 해아 할 일을 하여야 한다는 신인협력구원론, 즉 펠라기우스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 그리고 천주교의 구원론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청교도 신앙의 아버지 윌리암 퍼킨스가 도입한 청교도 언약신학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런 그릇된 신학 사상을 청교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퍼킨스는 언약의 일방성과 양방성 모두를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안상혁 교수)

“퍼킨스의 저작인 <황금사슬>(A Golden Chaine)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은혜 언약과 하나님의 선택 교리 사이의 조화이다.”(리차드 멀러)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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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2020-04-21 23:25:33
창세기 2장은 결코 행위언약을 통한 것이 아닌
창조주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피조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선언이라 조심스레 말하고 싶군요
행위언약의 피력은 이해도 안가고 말되 안되는 듯 하고
성경구절을 보아도 도통 행위언약의 제시와 의미는 눈에 보이질 않고 그렇군요
아직도 신학의 무지랭이나 그런가??

김리훈 2020-04-15 22:58:37
예수를 믿고 중생한 (성령 받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맞는 말이나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알미니우스사상 입니다. 구원 받았던 사람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구원파 신학 입니다.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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