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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혁 교수님의 책 '언약신학' 독서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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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혁 교수님의 책 '언약신학' 독서를 시작합니다
  • 정이철
  • 승인 2020.03.05 07: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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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1장에 대한 소감 소감

(안상혁 교수와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코로나 환난으로부터 건지시고 복음의 일꾼에게 주시는 힘을 더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영국의 청교도 시대에 부상된 ‘행위 언약’은 성경과 우리의 신앙을 훼손한다. 그리고 타락한 중세의 천주교로부터 참 신앙을 회복시킨 칼빈의 신학을 계승했다고 할 수도 없다. 행위언약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찾고자 안상혁 교수(합신)의 <언약신학>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신학자들은 행위언약(계약)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제시하였다. 행위계약(언약)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주로 이렇게 말한다. 

“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셨어야 했는가?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저주 받았으므로, 즉 행위언약을 파괴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담 대신 율법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으로 행위언약을 다시 복구하고 의를 얻으셔야 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미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 소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사상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설명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능동순종 사상은 창조주께서 친히 우리의 의가 되시려고 죄와 무관한 출생으로 완전히 의롭고 거룩하신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파괴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어 구원을 주시려고 성육신하셨다.

2)구약에서도 율법은 사람에게 의를 얻게 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율법과 무관하게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시내산에서 처음 율법을 받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훗날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시하는 유월절, 신약의 세례에 배유되는 홍해도하, 신약의 성찬으로 비유되는 만나와 반석의 생수의 은혜를 이미 누리는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구약에서도 율법은 믿음으로 의를 얻은 사람의 신앙과 삶의 실천 강령이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백성의 여전히 남은 죄를 지적하는 수단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도입하는 특별계시였다. 

3)신약 성경은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로 인해 성도에게 의가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율법도 지켜서 의를 더 얻고 전가하셨다는 가르침이 전혀 없다. 

아담과 하나님의 행위언약이라는 것을 보조하는 가장 주요한 것이 이처럼 허황된 능동순종 교리이다. 필자는 전적으로 웨민고백서를 경배하고 숭배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일이 아주 싫고 참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합신의 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을 차분하게 독서하기로 했다. 오늘은 1장의 시작부터 행위언약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저자 안상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밀러 테제’와 ‘칼뱅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칼뱅 테제’”(22 페이지)

패리 밀러(Perry Miller)는 일반 역사학자로서 청교도 신학을 깊이 연구했던 사람이다. 밀러는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학이 칼빈의 신학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신학은 칼빈의 신학에서 벗어났고 영국의 선배 청교도들의 신학에서도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그러므로 ‘밀러 테제’라는 말은 칼빈의 신학과 후대의 청교도 신학이 같은 내용의 신학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칼뱅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칼뱅 테제’라는 말은 스스로 칼빈의 신학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청교도들이 진짜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뜻한다. 즉, 바로 나(정이철) 같은 사람들의 외침이다. 언약신학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칼빈의 언약 이해가 과연 청교도들의 행위언약 개념과 같은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안 교수는 언약 신학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 패러다임이 학계에 존재한다고 했다. 1)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중시하는 관점, 2)하나님과 사람 상호간의 의무와 조건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계에 널리 알려진 소위 ‘두 전통 테제’에 따르면 개혁주의 언약 신학은 두 개의 전통, 곧 칼뱅이 대변하는 제네바 전통과 하인리히 볼링거가 대표하는 취리히 전통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를, 후자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쌍방적 언약의 전통을 각각 발전시켰다.”(27 페이지)

아쉬운 점은 성경이 묻어나는 안 교수 자신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계속하여 “A는 이렇게 설명했고 B는 저렇게 설명했는데, 어찌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내용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서로를 보완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식으로 전개하였다. 겨우 이 책의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기대하면서 독서하려고 한다. 계속해서 누구인지도 모를 많은 인물들의 이름들과 그들의 견해가 소개되었다. 간추리면, 성경의 언약의 본질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적인 문제인가? 이것이다. 안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목할 것은 같은 신학 전통 안에서도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조직신학의 중요한 주제들과 관련을 맺을 때는 성경의 언약들에 대한 해석을 두고 언약 신학자들 사이에도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대다수의 언약 신학자들은 성경의 언약을 소위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양분하는데 동의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은 ‘행위 언약’의 존재를 부인한다.”(38 페이지)

“17세기에 들어서면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7세기 중엽 영국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신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포함시켰다.”(39 페이지)

행위언약을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웨민고백서(7, 19장)에 들어 있는 행위언약, 즉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에 의해 이 처음 도입되어 일부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에게 전파된 행위언약이 언약 신학 논의의 중심인 것이다.

안 교수는 웨민고백서에 행위언약이 기술되기 전에 이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저자들이 ‘자연 언약’, ‘창조 언약’ 개념을 진술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행위언약 개념을 가졌던 사람들, 어거스틴, 우르시누스로부터 윌리엄 퍼킨스를 비릇한 여러 명의 청교도 신학들을 아우르는 총 42명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들과 그들의 주장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므로 마치 안 교수의 <언약신학>은 기존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쓰여진 책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우르시누스가 웨민고백에 들어있는 청교도들의 행위언약을 발전시킨 사람이라는 안 교수의 입장에는 동의되지 않았다.
 

사무엘 루더포드와 토마스 후커의 행위언약

안 교수는 루더포드와 후커의 행위언약(계약) 사상을 비교했다. 루더포드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로서 웨민총회에 참석했던 사람이고, 후커는 초기 뉴잉글랜드의 대표적인 회중파 청교도 신학자이다. 루더포드는 행위언약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행위에 근거하여 영생을 주실 것을 계획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려고 계획하셨다고 보았다. 혹시 아담이 행위를 잘 하여 영생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은 아담의 공로에 따르는 보상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쳤다. 후커는 아담의 성공적인 행위, 즉 율법준수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했다고 가르쳤다(46-47 페이지). 행위언약에 대한 장로교 조상의 관점과 회중교회 조상의 관점이 조금 달랐던 것이다.
 

안상혁 교수(합신)
안상혁 교수(합신)

머리와 클라인

안 교수는 머리와 클라인의 행위언약에 대한 논쟁도 소개했는데, 그 둘의 입장은 루더포드와 후커의 주장들보다 거리가 더 멀었다고 평가했다.

“어떤 의미에서 머리와 클라인 사이의 간격은 루더포드와 후커의 차이보다 더욱 멀어졌다. 루더포드는 ‘행위 언약’의 개념을 거부하지 않았으나 머리를 거부했다. 후커의 경우 아담의 행위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으나 클라인은 그것을 반대했다.”(안상혁 교수/ 47-48 페이지)

머리(Murray, 존 머레이)는 루더포드와 달리 웨민고백서의 행위언약 사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 교수는 한국인 전정구 교수가 머리와 클라인의 논쟁을 검토한 후 머리의 입장이 전통적인 개혁파의 행위언약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고 소개했다(49 페이지). 클라인은 아담이 행위를 잘하여 영생 얻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본 후커의 견해를 반대했다. 클라인은 아담이 행위를 잘하여 영생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담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보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필자는 행위언약 신학의 허구성을 보게 되었다. 클라인의 입장을 설명하는 안 교수의 말 속에 행위언약이 거짓 신학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타났음을 안 교수 는 알지 못했다. 다음은 클라인의 입장을 설명하는 안 교수의 말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으로 선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가 의롭다함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적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과 그리스도 모두 언약의 대표이고,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공로적 의가 각각이 대표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뿐 아니라 첫 사람 아담 역시 ‘행위 원칙’이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이 틀림없다고 클라인은 주장한다.”(안상혁 교수/ 51 페이지)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을 복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하시어 영생의 의를 얻으시어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교리가 행위언약의 근거라는 것이다. 안 교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공로적 의’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얻으셨다는 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어 우리 죄에 대한 배상으로 일생 동안 고난의 삶을 사시고, 종국에 십자가를 지신 공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아담이 지키지 못한 영생 조건의 행위, 즉 율법을 준수하시어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거짓 사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된다. 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은 반드시 쌍으로 붙어 간다는 것이다. 행위언약이 무너지면 능동순종도 무너진다. 능동순종이 거짓이면 행위언약도 함께 무너진다. 또 안 교수는 다음과 같이 클라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첫 번째 아담에게서 행위 원칙과 그것에 근거한 공로적 의를 박탈하는 것은 곧 두 번째 아담의 공로적 근거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택자들이 전가 받을 칭의의 공로적 근거와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은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클라인은 경고한다.”(51 페이지)

아담이 영생을 위한 행위, 즉 율법준수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도 행위를 잘 하여 영생의 의를 얻을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의 의를 부정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것이라고 클라인이 말했다는 것이다.

매우 이상한 내용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의를 얻으셨다는 가르침이 없다. 그런데 성경에 한 줄도 없는 그 거짓 교리를 성경보다 높이 평가하면서 “만일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행위를 근거로 하는 영생에 대한 행위언약이 없었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지켜 의를 얻으셨겠는가?”라는 주장으로 행위언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성경에서 단 한 문장도 찾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율법순종의 의 교리를 당연한 진리로 상정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아담이 행위를 잘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는 행위언약을 진리로 확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와 거룩함이 되시려고 성령의 특별한 역사하심으로 마리아의 몸을 이용하여 잉태되시었다. 성령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특별하게 보호하시어 아무 죄도 그리스도의 인성에 침투하지 못하게 특별하게 역사하셨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죄와 무관한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셨으므로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거룩하고 의로우셨다.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생각하지도 않았고, 죄를 마음에 품지도 않았고, 죄의 욕심대로 행동하시는 것이 단 1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점의 허물과 죄가 없으셨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성화되어야 하는 분이 아니었다. 성령으로 거듭나시거나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성령을 더 받으실 이유가 없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다. 우리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려고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다. 친히 완전히 거룩한 의인으로 오시어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받아주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니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인으로 인정받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성육신하신 것도 아니다. 죄와 무관한 완전히 거룩한 의인으로서, 또한 신성과 인성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사람의 능력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고 죄 없으신 하나님-사람으로서 완전하게 사셨던 것이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와 의를 동시에 얻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친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 위해 자신이 율법을 지킨 공로의 보상으로 의를 얻어야 하였다는 가르침은 성경에 없다. 율법에게 그런 기능이나 능력도 없다. 율법은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고 인정되고, 그 이전에 세례와 성찬까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하물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영생을 위한 의를 얻으셔야 했다는 것이 가능한 말이겠는가? 성경은 오직 완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믿는 사람이 의를 얻는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안 교수가 사전에 이 같은 기본적인 성경 이해를 가졌다면, 행위언약을 옹호하기 위해 그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나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 교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왜곡하는 클라인의 말도 직접 인용하였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의 행위가 공로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칭의-승인의 근거로 하나님 백성에게 전가될 어떤 공로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클라인의 말/ 안 교수의 책 51 페이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중시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클라인의 말의 허황됨을 안 교수가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의가 아니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어떤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가르침이 있는가? 행위언약의 근거가 결국 거짓된 능동순종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주장은 성경과 칼빈,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계승하는 서철원 박사 같은 분들에 의해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4.14.12)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2.1.4)
 

“행위언약은 위의 언약체결 논의에서 살폈듯이 잘못 설정된 언약개념이다. 처음 창조 시 아담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셔서 계명을 지키면 영생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전적으로 어긋난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시사는 없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과 그 준수 강조를 행위언약으로 바꾼 것이다.”(서철원 박사, 인간론, 168-171)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창조경륜을 몰랐으므로 선악계명이 하나님 섬김을 하느냐 거부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은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이 구원섭리를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어요. 히브리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언약의 계명을 지키므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여겨 오늘의 참상을 이루어냈습니다."(서철원 박사, 왜 웨민(WCF의 구원론과 아브라함의 구원이 맞지 않습니까?, 바른믿음, 2019.7.1)
 

팔머 로벗슨과 마이클 호톤의 행위언약

안 교수는 행위언약에 대한 팔머 로벗슨(Palmer Roberson)과 마이클 호톤(Michael Horton)의 입장을 대조하면서 행위언약 부분을 마쳤다. 로벗슨은 행위언약을 지지하지만, 하나님이 영생을 위해 아담에게 율법 지키라고 하신 것 그 자체를 은혜라고 본다. 호톤은 아담이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공로라고 본다. 호튼은 아담의 영생을 위한 율법준수가 그 자신의 공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그리스도)는 언약적 대표로서 자기가 창조 언약을 성취한 사실에 기초하여 이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의 공로적 보상을 배분할 수 있게 되었다.”(호튼의 말/ 안 교수의 책 53 페이지)

행위언약 강력 지지자 호튼도 결국 능동순종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가 영생의 자격을 얻은 것처럼, 아담도 행위언약 안에서 율법을 지켜 영생의 권리를 얻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대체 아담에게 무슨 율법이 있었다는 것일까? 성경에는 오직 하나님께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다고 한다. 선악과가 어떻게 율법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에덴동산의 또 다른 나무, 생명나무는 무슨 율법이었는가? 그러나 성경에 그리스도가 율법 지켜 자신과 우리의 영생의 자격과 권리, 즉 의를 얻었다는 가르침은 1도 없다. 성경은 죄 없는 의롭고 거룩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죄를 사하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가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맺는 말

1장의 행위언약 부분에서 저자의 성경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안상혁 교수 자신의 말이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안 교수가 자신의 신학을 피력해야 독자로서 무슨 비판이나 논쟁을 할 것인데, 자신의 연구와 신학을 표현하지 않고 기존의 설들을 소개하기만 했다.

안 교수에게 이 점을 생각해 보라 권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담에게 회개가 소용없고 불가능한 영원한 저주의 심판을 내렸을까?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을 받지 못한 아담이 영생을 위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회개가 소용없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에 처했다는 것이 타당한 이론일까? 어쩐지 어색한 신학 전개라는 생각이 들이 않는가? 행위언약 개념은 이처럼 어색하다. 

아담과 우리가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다시 얻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어 아담을 대신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아담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시는 정도의 희생을 치르셨을까? 하나님을 섬기도록 영생과 은혜를 충분하게 받은 아담이 하나님을 섬김는 믿음으로 살기를 더 이상 원치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아담의 원죄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자연스러워진다. 은혜와 영생이 없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이 스스로 행위(율법)를 잘 해서 영생을 취득하도록 하나님이 아담과 행위의 계약을 맺었다는 신학은 성경과 하나님을 훼손한다. (안상혁 교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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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사리 2020-03-06 11:01:17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막10:45, 새번역)

인자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준수를 대행하러 온것이 아니고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성육신의 목적은 이토록 너무나도 분명하여 더하거나 감하지 못합니다.

Minn 2020-03-05 15:09:24
행위언약과 능동적 순종이론은 운명을 같이 합니다.
행위언약을 바로잡으려면 신학은 더 성경적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도 아직 답을 내놓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가 된다라는 주장을 반박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성경으로 반박이 가능합니다.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제물되심은 필연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고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끝, 말씀과 지혜라는 해석 안에서 행위언약과 기존의 개혁신학 이론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3:6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전에 순수했으나 지혜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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