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8 10:21 (토)
“구하라 주실 것이요 . . .”에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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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주실 것이요 . . .”에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 이창모
  • 승인 2020.02.29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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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9)

 

글을 시작하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는 불신자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마도 이 유명세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안에 이 말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마7:7의 예수님의 말씀은 헬라어 원문 상으로 단어 하나 다르지 않게 눅11:9에도 똑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산상수훈의 마7:7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7:7의 말씀이 눅11:9에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하나를 놓치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눅11:9은 제처 놓고 산상수훈의 마7:7만 읽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구하라 주실 것이요....”의 원론적인 의미는 눅11:9과 마7:7이 동일하다. 즉 두 군데 다 예수님의 기도 명령과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각 본문 안에서의 실제적인 의미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 본문의 배경이 마7:7은 마7:1-6이며, 눅11:9은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로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제부터 보통은 잘 살피지 않는 눅11:9을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와의 전후문맥 속에서 살핌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찾아내려고 한다. 물론 마7:7이나 눅11:9을 제대로 살피려면, 전후문맥 외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므로 거지가 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거지 구호”라는 것과 또 헬라어 원문의 “kai”(카이)를 번역 성경에서 “그러면”(and)으로 잘못 번역한 오역을 살피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필자가 검토한 번역 성경들 중에는 유독 NIV에서만 “kai.”를 “and”가 아닌 ‘세미콜론’으로 표시함으로써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다), 이 작업은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눅11:9을 중심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추적할 것이다.
 

본문 속으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9절)

만약 “구하라....”의 예수님의 말씀이 산상수훈(마7:7)에만 있었다면, 예수께서 하신 또 하나의 다른 중요한 기도 명령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떡 세 덩이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뒤이어 “구하라....”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이것은 누가의 의도적인 편집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떡 세 덩이의 비유”에 비추어 전후문맥 속에서 볼 수 있음으로써 마7:7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예수님의 중요한 기도의 명령 한 가지를 더 찾아낼 수 있다.

마7:7과 눅11:9에 대하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똑같은 기도의 명령인데, 중복을 피하려는 유대인의 언어 습관에 따라,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 명령을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 한 가지는 예수님이 하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기도 명령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적극적이고 심층적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하라”보다 “찾으라”가 더 적극적이고 심층적이며, “찾으라”보다 “두드리라”가 더욱 적극적이고 심층적인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들은 일견 일리는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 명령의 중심 의도에서는 조금 비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에서 우리가 놓친 것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명령과 기도 응답의 약속을 하시면서 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다른 표현의 말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도 명령을 하셨는가? 또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의 기도 응답의 약속도 왜 세 번씩이나 다른 표현의 말로 반복해서 하셨는가?

눅11:9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 교훈을 발견하려면, 먼저 헬라어 원문에서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들의 “태”(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주실 것이요”(doqh,setai u`mi/n/도데세타이 휘민/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와 “열릴 것이요”(avnoigh,setai u`mi/n/아노이게세타이 휘민/그것이 너희에게 열려질 것이다)는 ‘수동태 3인칭 단수’인데 반해 유독 “찾아낼 것이요”(eu`rh,sete/휴레세테/너희가 찾아낼 것이다)만 ‘능동태 2인칭 복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주실 것이요”와 “열릴 것이라”는 ‘수동태’인데 반해 “찾을 것이요”만 ‘능동태’인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이 좀 이상하다고만 여겼을 뿐(짐작컨대 이들은 저자나 필사자의 실수로 여기는 듯하다), 왜 예수님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아마도 그들은 “찾을 것이요”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안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왜 예수님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는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 중에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쓰인 까닭은 저자나 필사자들의 ‘실수’나 ‘우연’(저자가 ‘찾을 것이요’를 수동태로 써도 되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어쩌다가 능동태로 쓴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하라.....”의 기도 명령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기록한 마태와 누가가 동시에 이런 실수를 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인 까닭은 예수께서 무엇인가 중요한 기도의 교훈을 제자들에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찾을 것이요”를 ‘능동태’로 말씀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명령을 하시면서 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을까? 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이 말씀 바로 앞에 기록된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와의 전후문맥 속에서 눅11:9을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예수께서 바로 전에 말씀하신 “떡 세 덩이의 비유” 안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눅11:9을 원문대로 직역한 것을 보면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살펴보자.

“너희는 구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너희는 찾으라. 너희가 찾아낼 것이다. 너희는 두드리라. 그것이 너희에게 열려질 것이다”(눅11:9)

-NIV/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Luke11:9)

원문대로 직역한 눅11:9을 다시 정리하면, “너희는 구하라. (너희가 구하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너희는 찾으라. 너희가 (찾는 그것을 너희 자신이 직접) 찾아낼 것이다. 너희는 두드리라. (너희가 두드리는) 그것(문)이 (하나님에 의해서) 열려질 것이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은 기도하는 자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일이며, 기도하는 자가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일이다. 반면에 기도하는 자가 해야 하는 일은 ‘구하는 일’과 ‘찾는 일’과 ‘두드리는 일’과 더불어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직접 찾아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열어주시겠지만, 너희가 찾는 것은 너희가 직접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 안에서 위의 설명(눅11:9)을 관련지어 살펴보자. 아래에서 이 비유의 주인공을 “A”로 설정하겠다.

어느 날 여행 중이던 A의 친구가 한 밤중에 A의 집을 방문했다. 그래서 몹시 시장해 보이는 A의 친구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A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A의 집에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이 없었다(유대인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항상 새 빵을 내어놓는다). 다시 말하면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한 밤중의 A의 집 형편으로는 방문한 친구를 대접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A의 집 형편이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고 그냥 방치한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A의 집은 물론이고 A의 마을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유대인들은 죽음보다 수치를 더 싫어하는 강력한 수치 문화가 있다). 만약 이 사실을 내일 아침 A의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A의 가족을 마을의 명예를 더럽힌 집으로 규정하고 마을에서 쫓아낼 것이며, 설령 그렇게 하지 않는다할지라도 A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밤중에 친구가 찾아온 A의 집은 졸지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A는 가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A는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했다. 그러고 나서 A는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갈래로 찾기 시작했다. A는 아내와도 자신의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마침 아내가 A에게 말해주었다.

“오늘 아침에 빵 구울 때 보니까(큰 부자를 제와한 보통의 유대인들은 아침에 여러 가구가 함께 모여서 그날 먹을 빵을 함께 굽는다) 아비가일의 집에서 내일 먹을 빵까지 구웠어요. 아마 지금 가면 새 빵 세 덩이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보, 아비가일의 남편과 당신은 절친한 친구잖아요? 한 밤중이라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한 번 가보세요.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A는 아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A는 방금 전에 했던 “구하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깨달았다. A는 “구하라”의 기도 후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새 빵 세 덩이를 찾았지만, 하나님은 A 자신이 새 빵 세 덩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A는 한 밤중이었지만 옆집에 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새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임을 믿고, 한 밤중이지만 용기를 내어 옆집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A는 친구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새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한 밤중이었지만, 하나님은 A의 친구로 하여금 문을 열도록 도와주셨고, 그래서 A는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 세 덩이를 손에 들고 기쁨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A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주께서 구하면 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의 약속을 굳게 믿고, 위기의 순간에 친구를 대접할 수 있도록 새 빵 세 덩이를 주께 구했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방법을 열심히 찾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새 빵 세 덩이를 손에 넣기 위해 새 빵이 있는 옆집 친구 집에 가서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옆집 친구의 집 대문을 열어주시고 내 손에 새 빵 세 덩이를 쥐어주실 줄 믿었다. 드디어 옆집 친구는 한 밤중이었지만 기꺼이 대문을 열고 나에게 새 빵 세 덩이를 빌려주었다. 나는 기쁨으로 집에 돌아와서 친구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예수님의 기도 명령과 기도 응답의 약속대로 신실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께서 “너희가 찾으라”고 명령하시고 “너희가 찾아낼 것이요”라고 ‘능동태’로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의 과정에서 내가 행동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구하라”를 “골방 기도”로, 그리고 “찾으라”와 “두드리라”를 “행동 기도”라고 명명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구하라”의 골방 기도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주님이 약속하신 “주실 것이요”의 기도 응답 약속을 믿고 골방에서 기도하면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대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약속대로 반드시 주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구하라”의 기도와 함께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도 함께 해야 할 때가 있다(필자의 판단으로는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라”의 골방 기도와 함께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혹시 내가 골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우리의 기도에서 발견된다면, 이제라도 골방에서 나와서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심히 찾아야 하며, 또 그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냈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찾아낸 해결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기도들 중에 아직까지 응답되지 않고, 그래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골방 기도 후에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 기도를 등한히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을 마치며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주님의 기도 응답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이들 중에 아직 어려운 문제들로 힘들어 하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지체들이 있는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계속 답보 상태에 있는 지체들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혹시 나는 “구하라”의 기도는 잘 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명령대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찾으라”의 행동 기도를 등한히 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 만약 “찾으라”의 행동 기도에 문제가 있다면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는 불가능할 것이며, 그렇다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문 열림”의 기도 응답도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심각한 지경에 있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 사태가 빨리 종식될 수 있도록 각자 골방에서, “주실 것이요”의 기도 응답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께 “구하라”의 기도를 간절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주께서 말씀하신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명령대로 우리가 해야 할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슴은 아프지만 교회가 공 예배와 여러 가지 모임들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개개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며,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고, 정부 당국의 여러 가지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지금 당장 교회와 우리가 해야 할 “찾으라,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일 것이다.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기도 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우리가 애타게 구하며 두드리는 “코로나19 종식”의 대문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열려지는 기도 응답이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을 믿으며 소원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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