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은 날마다 즐기고 만끽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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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날마다 즐기고 만끽할 수 있는 것인가?
  • 이창모
  • 승인 2020.01.23 0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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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김 삼 목사 방언 비판(2)


글을 시작하며

김 삼 목사는 <방언....그리고 그 다음은?>이라는 제목의 글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언은 '일회용 체험'이 아니다. 결코 자랑거리도 아니다! '폼'으로 끼고 있을 장식품도 아니다. 계속 활용해야 할 삶의 평생도구이다. 방언이 괴롭고 번거로운 짐이 돼선 안 된다. 날마다 즐기고 만끽하는 기쁨의 채널이어야 한다. 사도 파울은 거의 24시간 방언을 즐겼다(코린토A서 14:18).”

김 삼 목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른 무지한 은사 옹호자들보다도 더욱 무지하다. 그럼에도 그가 방언의 은사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기적이 따로 없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위해서는 이런 엉터리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기적들은 수많은 영혼들을 사탄이 사냥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의 주권에 의해 한 사람에게 반복될 수도 있는, 그러나 일회용 선물이다

아마도 김 삼 목사는 고전 12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ca,risma”(카리스마/은사/gift)를 누군가에게로부터 받아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그래서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선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방언은 '일회용 체험'이 아니다.......계속 활용해야 할 삶의 평생도구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독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한 번 받으면 평생을 소유하면서 자신이 원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마음대로 꺼내서 즐기고 만끽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원하심에 따라(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때마다 어떤 사람을 택하여 교회(성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고전12: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원함에 따라 마음대로 언제든지 즐기며 할 수 있는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일시, 단회)적인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나 인위적으로 터득한 능력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김 삼 목사는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표현 때문에 은사를 마치 선물 꾸러미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은사가 한 번 주어지면 주머니에 물건을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것처럼, 은사자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성령의 은사를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성능 좋은 물건처럼 생각하는 김 삼 목사 같은 사람들은, 성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은사를 사용하다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은사가 녹슬었다고 생각하거나(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령의 은사를 녹슬지 않는 플라스틱 물건보다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코미디다) 성령이 은사를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이것도 성령 하나님을, 선물을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으로 매도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1)

 

김 삼 목사가 운영하는 블로그 모습
김 삼 목사가 운영하는 블로그 모습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단회)적인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비상시(단회)적이라는 말은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을 때 교회가 그 은사로 어떤 일을 수행해서 그 일을 마치면, 은사도 자연히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 교회에 그 은사가 또 필요해지면, 성령은 그 교회의 필요에 따라 그 은사를 또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은사의 소멸과도 일맥상통한다(고전13:11). 주님이 재림하시면 교회는 완성될 것이므로 더 이상 은사가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완성된 교회에는 어떤 은사도 다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령의 은사는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사도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며,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은사이며 직분(이것을 신학 용어로 비상직원이라고 한다)이다. 그러므로 이 은사의 목적이 달성된 후 사도의 은사는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있지만 성령의 은사자는 따로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의 뜻대로”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사람을 선택해서 주시기 때문이다.2) 아마도 초대 교회 당시에는 교회가 소규모여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을 만한 사람도 극히 소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여러 번 반복적으로 주셨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이런 초대교회의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은사가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필요할 때마다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이 아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신약 성경에서 기적을 베푸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는가? 물론 전혀 없다.3) 사도행전을 살펴보라. 사도들은 기적이 일어날지 않을지를 염려하면서 누군가를 고치려고 시도하거나 실험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기적을 행하겠다고 공포한 적도 없었다. 사도들은 결코 “제가 오늘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방언을 받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말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성령께서 어떤 은사를 언제 어떻게 주실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때에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사도들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그들이 그때그때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을 뿐이다.4)

사도행전에서 기적을 여러 번 일으켰던 사도들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우는 초대 교회 최초의 신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떤 이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였다(행3:2).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날마다 정해진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어제도 그저께도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만약 신유의 은사자가 있어서,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신유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3장의 치유 사건 이전 어느 날에 벌써 그 사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유의 은사로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날마다 그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령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신유의 은사를, 그들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주는 사건이 나온다. 귀신들린 여종 하나가 여러 날을 바울과 그 무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 때문에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다. 드디어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에 바울은 여종 안에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므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 만약 바울에게 오늘날 아주 용한 신유의 은사자나 신사도라 자칭하는 자들처럼 언제든지 귀신을 쫓아 낼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 때문에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한 것은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 이전에는 축귀 능력(신유의 은사)이 바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행16:18).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사람의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바울은 많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며 사역했다(롬15:19; 고후12:12). 그럼에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낫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죽을까봐 전전긍긍 근심까지 했다(빌2:27). 디모데의 위장병에 대해서도 바울은 ‘신유의 은사자’를 불러다가 기도하라거나, 내가 나중에 가서 기도해서 낫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디모데에게 포도주(포도주는 당시 소금, 올리브유와 함께 가장 보편적인 치료약이었다)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을 뿐이다(딤전5:23).5)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치유하기는커녕 밀레도에 그냥 두고 떠나가기도 했다(딤후4:20).

바울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자들에게는 위장병조차 낫게 해주지 못했을까? 특별히 바울은 왜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었던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드로비모의 병을 치료해 주지 못했을까? 바울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신유의 은사가 녹슬었거나, 성령이 그에게 준 은사를 거두어 가셨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울이 아무 때나 신유의 은사로 신유를 행할 수 없었던 까닭은, 성령이 그때그때 은사를 주셔야만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사역 거의 끝부분에, 로마로 가는 여정의 멜리데 섬에서 열병과 이질에 걸린 보블리오의 부친을 안수하여 낫게 했다(행28:8). 성령은 한 동안 바울을 통해서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않으셨지만, 멜리데 섬에서는 특별히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료하게 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은사의 비상시성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 성령의 은사는 한 번 받으면, 은사자가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어 마음대로 쓰며 즐길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결코 아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이 신유의 은사를 주실 때만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100% 즉시, 완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유의 은사자의 치료 상황을 보면, 모든 병자들이 다 낫거나 완치되는 일은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치료율마저 거의 자연 치료율 수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의 기도는 성령의 은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자의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신적인 치유의 능력은 없고, 단지 심리적인 효과와 기도하지 않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낫는 자연 치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역 거의 끝부분에, 로마로 가는 여정의 멜리데 섬에서 열병과 이질에 걸린 보블리오의 부친을 안수하여 낫게 했다(행28:8). 성령은 한 동안 바울을 통해서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않으셨지만, 멜리데 섬에서는 특별히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료하게 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은사의 비상시성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은사와 관련해서 사용된 ‘주다’의 의미로 사용된 동사 “di,dotai”(디도타이)는 모두 다 현재 시제이다.6)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의 동사는 현재 시점에서 어떤 행동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낸다. 즉, ‘은사를 주다’에서 ‘주다’라는 동사의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성령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은사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은사를 반복적으로 주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아주 빈번했기 때문에 교회에 은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이런 소멸 현상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 이하에서 말하는 은사의 소멸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사의 소멸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은사의 능력 자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은사의 횟수는 초대교회 이후 확연이 줄어들었으며, 현재에는 중지된 것처럼 보일만큼 은사의 횟수는 거의 없다), 주의 재림 때는 교회가 완성될 것이므로 미숙한 교회에 주어졌던 은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막론하고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역사가 없으면, 사람이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 때나 마음대로 시행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 신유의 은사가 그러하며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오직 성령이 계시하실 때만 예언할 수 있다(고전14:30; 행11:27-28; 13:1-2; 21:10-11 등 참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때만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방언의 은사에서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여서 언제든지 원할 때 할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은사라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자신이 마음대로 하고 있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임스 페커도 현대 교회의 방언은 인위적으로 습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7)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던 제자들이 그 후에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다.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역사할 때는 누구라도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사역이 끝난 뒤 일상에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고, 또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글을 마치며

성령의 은사는 어떤 은사이든지 간에, 한 번 주어지면 지속적으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때그때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불특정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김 삼 목사가 말하는 방언은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기에다가 즐길 수까지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다. 이렇게 김 삼 목사가 말하는 방언이 시도 때도 없이 마음대로 즐기기까지 할 수 있는 은사인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 삼 목사가 주장하는 거짓방언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와 상관없이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즐기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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