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목사님,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시는 친척이 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배운 복음과 구원의 확신을 버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모일 때마다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매일 울면서 기도하고, 구약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준비하고 있어야 구원을 주시는 성령의 회심을 경험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부활절과 성탄절도 비성경적이라면서 지키지 않습니다. 권사직도 비성경적이라며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진정한 개혁신학을 한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답변>
권사직이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부활절과 성탄절도 비성경적이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보는 각도에 따라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전의 교회에서 배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확신을 버리고, 다시 철저하게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회심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라는 그 목사의 가르침은 심각한 이단사상입니다. 결코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확실한 이단사상이므로 그런 것을 가르치는 그 청교도 목사의 교회에 친척이 더 나가지 않게 강하게 설득하는 마땅합니다.

영국에서 청교도가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우리 나라의 목회자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그 당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앵글랜드에게 정치적으로 복속되었거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아일랜드와 웨일즈로 구성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는 독자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웨일즈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개혁의 영향권에 속하였으므로 독자적인 움직임이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잉글랜드의 국왕 핸리 8세가 천주교와 결별하고 자신이 스스로 대표가 되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1534년)를 세움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종교개혁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개혁자들과 ‘영국 국교회’와의 처절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영국 국교회 측은 자신들이 종교개혁 교회이니 자신들을 따르라고 우겼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고 유럽 대륙에서 칼빈이 추진하는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개혁자들을 ‘청교도’(Puritan)라는 말로 비하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개혁운동을 청교도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나 종교개혁 사상을 배운 존 낙스(John Knox, 1513~1572)를 중심으로 '언약도(장로파)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칼빈과 칼빈 사후 칼빈의 제자 베자에게서 배운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중심으로 장로파 청교도가 일어났습니다. 동시에 잉글랜드에서 영국 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였던 '독립파 청교도'와 영국 국교회를 교회로 간주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추구하였던 '분리파 청교도'가 일어났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원래 분리파 청교도였던 사람에 의해 '침례파 청교도' 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는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에 ‘언약도’라는 명칭으로 일어난 청교도와 잉글랜드에서 독립파 청교도입니다.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장로파 청교도는 신학적인 특성보다 정치 제도에 대한 특성이 강했고, 세력이 약하여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침례파 청교도 역시 세력이 약하여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독립파 청교도와 분리파 청교도는 신학과 사상이 같았습니다. 분리파는 처음부터 영국 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네덜란드 등으로 망명하였고 가장 먼저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회중교회를 세웠습니다.

결국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언약도, 훗날의 장로교)와 독립파 청교도(훗날의 회중교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80년대까지는 스코틀랜드 청교도가 우세하여 장로교가 영국의 종교개혁의 대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서서히 회중파 청교도가 약진하면서 더욱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연합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를 준비할 때까지 장로파 청교도와 회중파 청교도는 큰 갈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47년 웨민고백서를 완성하고 1648년 의회의 승인을 받던 때부터 곧 바로 사생결단의 태도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독립파 청교도 신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난후 장로파 인물들을 전부 의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1648년).

이후 역사에서 장로파와 회중파가 다시 화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이 주도하여 연합신앙고백서(WCF)를 함께 작성하기는 했어도 이후 곧 바로 서로 길을 달리하였습니다. 회중파는 1659년에 자신들만의 신앙고백(The Savoy Declaration)을 발표하여 실질적으로 장로파와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1662년 영국 국교회 내에서 청교도 운동의 완전한 종식을 선고한 대추방령이 선포됨으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을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후의 상황을 상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영국(웨일즈, 아일랜드)에서는 영국 국교회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류 종교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2)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의 신학을 직접 배운 청교도들이 처음에 ‘언약도’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교회가 나중에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을 청교도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청교도라 불리우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3) 분리파 청교도(회중파)들은 가장 먼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회중교회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독립파 청교도들도 많이 이주하여 합류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청교도 신앙'이라고 알려진 것은 모두 이들의 사상입니다. 오직 이 회중교회(회중파 청교도)의 신학사상이 '청교도 신앙'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4) 대륙에서 칼빈에 의해 직접 시작된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5) 루터에 의해 시작된 ‘루터교회’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바르게 계승한 정통 개혁교회로 인정받는 것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입니다. 회중파들이 신대륙에서 발전시킨 회중교회와 루터에 의해 시작된 루터교회의 신학을 정통 개혁신학으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회중교회와 루터교회 중에서 정통 개혁신학에 가까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루터교회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루터교회에는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중교회에는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학이 실질적으로 없습니다. 회중교회의 구원론은 앞에서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칼빈과 같이 말하면서, 뒤에 가서는 사람이 구원을 위한 조건과 역할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화를 구원과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회중교회의 구원론의 앞 이마에는 칼빈주의가 새겨져 있고, 뒷통수에는 알미니안주의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회중교회의 신학은 정통 개혁신학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청교도 목회’,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거창하게 말해지고 있는 것은 영국에서 시작된 회중파 청교도와 신대륙에서 회중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킨 그 후예들의 사상입니다. 칼빈이 직접 세운 유럽의 '개혁교회' 사상도 아니고, 칼빈에 의해 간접적으로 세워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사상도 아닙니다. 회중교회는 입으로 자주 칼빈의 신학을 말하기는 해도 실질적으로 칼빈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학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말해야 마땅합니다.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망가뜨린 변종 킬빈주의’

‘종교개혁을 망쳐버린 종교개혁 이단’

‘종교개혁을 그르친 종교개혁 적폐’

친척이 나가는 교회의 청교도 목회자가 다른 교회에서 이미 배운 구원의 복음을 부정하고 이제부터 철저하게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의 회심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가르치는 회심준비론은 회중파 청교도들이 주장한 이단사상입니다. 당시 영국의 전 국민은 영국 국교회, 천주교 등에 속하여 있었고, 국민들 가운데 교회와 무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가득한 교회를 100% 구원받은 사람들로만 채우려고 회중파들이 만들어 낸 것이 회심준비론입니다. 근본적으로 지금 한국이나 미국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의 회중파들은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는 불신자들(일반 국민들)을 진정 구원의 복음에 이르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악을 써도 매 주일마다 꾸역꾸역 교회에 나오는 그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불안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고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 그 불신자들의 마음이 항상 편할 것이므로, 먼저 율법의 저주를 넘치도록 퍼부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자신들이 장차 가게 될 지옥에 대해 벌벌 떨게 만들어야 예수님의 은혜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회중파 청교도들은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말하지 않고, 주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생생하게 실감나게 만드는 설교를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하나님이 지옥의 불로 지지고 볶는다는 설교를 자주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발 나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시면 좋겠다”는 소원과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성령이 그런 마음을 일으키신다고 보았고, 그것이 그들의 회심준비론이라는 주장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과 성경의 사람들 그 누구도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주 숭악한 이단사상입니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 저주받을 이단사상이었습니다. 그 청교도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매일 율법의 저주를 듣고 배우면서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구원의 증거를 드러내기 위해 더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구원 받음의 증거이고 열매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 청교도들의 주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율법타령이었습니다. 이것이 회중파 청교도(회중교회)의 율법주의입니다. 청교도 율법주의는 이미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복음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는 없습니다. 친척이 나가는 교회의 그 청교도 목사는 이 사상에 젖어 있는 심각한 이단입니다. 그 교회의 청교도 목사의 사상은 이단 중에서 상 이단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복음의 왜곡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꼭 신천지 같은 것만 이단이라고 여기는 경향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병이 꼭 암(cancer)하나만이 아닙니다. 고혈압도 사람을 죽이고, 당뇨병도 사람을 죽이고 ... 사람을 죽이는 병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암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하고 조심하였는데, 갑자기 고혈압으로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대게 그런 청교도 이단 사상에 빠진 목사들이 방언기도, 은사주의, 신사도 운동, 자유주의, 복음주의, WCC, 천주교 등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매우 투철하고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못지 않은 심각하게 위험한 사상이 바로 그들이 추종하는 청교도 사상입니다. 영혼을 죽이기는 매 일반입니다.

청교도 신앙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이단성이 있습니다. 

1) 성경적 교회의 근본인 이신칭의(법정적 칭의) 신앙을 거부합니다. 앞에서는 이신칭의를 말하지만, 뒤에 서는 하나님의 구원제시에 대한 인간의 동의, 승인, 조건과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화가 구원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강하게 가르칩니다. 앞에서 보면 칼빈주의이고 뒤에서 보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2) 성경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다른 구원론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가 십계명 등의 율법준수로 하나님 백성의 자격, 권리를 획득하였고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를 얻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십자가의 죽으심보다 실질적으로 더 중시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조금 말하고 성경에 있지도 않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많이 말합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청교도 사상은 예수로 예수를 뭉개는 이단사상입니다.   

3) 청교도 신앙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심각하게 경고했던 영원한 저주를 자신들과 신자들이 먹고 마시게 하는 이단사상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율법의 저주를 듣고 배우면서 회심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증거로서 철저한 율법준수를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몽학선생이었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율법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청교도는 율법주의 이단입니다. 

4) 청교도 목회자들은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을 매우 실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이 청교도 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칼빈과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 '법정적 칭의'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구원을 율법준수의 여부로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칭의, 즉 성령의 내적증거로 구원을 확인하였습니다.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원의 최고의 증거로 여겼습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부흥 시절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환상을 보고, 몸이 마비되는 현상이 많았습니다. 청교도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 1703~1758)는 그것을 매우 높이 숭상하였습니다. 자기 부인 사라에게서 그런 현상이 가장 많이 나타났는데, 에드워즈는 자기 부인을 최고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칭송했고, 그런 현상을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 불렀습니다. 실은 훗날의 오순절 운동의 성령재세례와 신사도 운동의 성령의 기름부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청교도들에게는 최고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이 오순절-신사도 운동을 비판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5) 청교도들은 신비주의 명상에 집착했습니다. 신비주의 명상이란, 중세의 수도사들이 육체의 죄성을 초월하여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완전한 하나님 형상을 미리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신인합일을 목표하였던 신비주의였습니다. 중세의 신비주의 수도사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에 의해 성행하게 되었는데, 칼빈과 루터는 그의 건전한 교리만 선별하여 수용하였고 그의 신비주의 성향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청교의 아버지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가 버나드의 신비주의를 묵상이라는 명칭으로 청교도 안으로 도입하였습니다. 이후 청교도들은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현대의 관상기도와 같은 신비적 명상을 묵상이라는 명칭 으로 실행하였고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삼위일체를 직접 맛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체험하고, 신랑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달콤하게 경험하고, 하나님과 자주 대화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대표적인 인물로 들 수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처럼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고 있는 심각한 이단사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친척이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가지 않도록 눈물로 설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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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