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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와 회중파의 신비주의 스승 버나드의 신인합일 영성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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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0  1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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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가 심각한 신비주의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 동안 어느 학자도 지적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대체 에드워즈의 어떤 부분이 신비주의 성향이라는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에드워즈의 '묵상'에 관한 내용이다.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들이 ‘묵상’을 잘 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의 거두 에드워즈도 묵상의 달인이었다. (필자는 회중파 청교도가 겉으로는 칼빈주의를 표방했을지라도 실상은 칼빈의 신학과 성경에서 멀러 벗어났고, 여러 종류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전파했으므로 사실상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중파 청교도를 국내에 소개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표현해 주면,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자신들 때문에 미혹된 신자들을 성경적인 신앙으로 돌이키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건의와 조언이 많으므로, 앞으로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라고 할 것이다.) 

필자는 외국의 에드워즈 연구자들이 저술한 에드워즈의 일대기에서 에드워즈의 이상한 묵상에 대한 내용을 처음 접했다. 에드워즈가 묵상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체험은 결코 건전한 말씀 묵상의 결과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체험은 이단들에게서 보이는 신비주의 신인합일 체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내용인데, 지금까지 모든 에드워즈 연구자들이 그의 이상한 점을 ‘칼빈과 모든 교회사의 인물들을 능가하는 에드워즈의 하나님 체험’이라고 되려 극찬하였다. 
 

   


백금산 목사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에서 에드워즈의 신비적 명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보게되었다. 에드워즈는 청년시절부터 들판이나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고, 후대의 학자들은 그것을 '에드워즈의 자서전'이라고 부른다. 백금산 목사가 그 내용을 다 번역하여 자신의 책에 담았으므로 우리는 에드워즈가 묵상하면서 체험한 일들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백금산 목사, 이상웅 교수 등 한국의 에드워즈 연구자들은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영성(이단성)을 엉뚱하게 미화하여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혼란을 일으켰다. 특히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의 자서전을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4페이지의 지면에다 먼저 실었는데,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가졌다는 표현을 20번이나 사용했고, 에드워즈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다는 말도 2번이나 했다.

백금산 목사는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전파하는 인물이다. 백금산 목사가 운영하는 ‘부흥과개혁사’는 외국의 개혁신학 서적들을 한국 교회에 보급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이단적 영성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에드워즈의 그런 점이 칼빈과 모든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영적 거장의 면모라고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이 에드워즈의 자서전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입니다. 다루고 있는 삶의 기간이나 기록의 분량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방대하지만,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에드워즈의 자서전이 훨씬 더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1)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학의 중요한 핵심과 골격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자신의 회심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

또 다른 에드워즈 연구자 총신신대원 이상웅 교수도 에드워즈의 신비체험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아마도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이의 글이 아니라 다른 무명의 성도의 간증문이었다면 이것은 순전히 날조된 신비주의라고 말 할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처럼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을 자주 했으며, 그 결과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3)

사도들 이후의 그 어떤 인물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거나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등의 체험이 가능할 수 있을까? 개혁신학의 기초인 특별계시의 완성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너무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문제이다. 에드워즈나 주기철이나 칼빈이나 서철원이나 ... 누구라도 이제 하나님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체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종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의 저자


에드워즈가 묵상하면서 체험한 내용의 정체를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원하는 독자들은 원종천 교수의 책『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대한기독교서회, 2013)를 읽기 바란다.  원종천 교수는 필자의 석사과정(Th.M)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신 선생님인데, 신비주의 영성에 대해 매우 관대한 입장에서 연구하셨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이 책을 읽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들에게 중세의 신비주의 명상의 대가였던 버나드의 책이 많이 읽혀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버나드의 신비주의 신인합일 영성에 대해 연구한 원종천 교수의 책을 통해 에드워즈가 묵상하면서 경험한 내면의 하나님 환상, 삼위일체의 영광, 신랑과 신부의 애정적(감각적) 관계로 표현되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대화' ... 등의 에드워즈 신비주의 영성의 뿌리가 버나드의 신비적 명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종천 박사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버나드의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버나드는 정통 교리를 가진 매우 건전한 면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신칭의, 인간의 전적타락, 구원에 대한 인간의 공로 거부, 교황주의 비판 등의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 성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루터와 칼빈에게서 존경받았으며, 그들의 저술에서 버나드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타난다.

2)버나드는 인간이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완전함을 지상에서 신비적 명상을 통하여 맛보는 하나님과의 합일체험으로 미리 맛볼 수 있다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버나드는 신비적 명상을 통해 외적인 하나님 환상, 그리고 더욱 일반적인 형태로서 하나님이 명상가의 내면으로 부어주는 하나님 환상을 통해 신인합일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버나드에게는 특별계시의 종결 개념이 없었다. 지금도 인간이 신비적 명상을 통해 이사야의 하나님 체험, 바울의 삼층천, 사도 요한의 하늘보좌 환상 등의 체험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명상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환상 체험을 통해 타락으로 망가진 인간의 하나님 형상(모양)이 회복되고, 인간의 삶이 크게 변한다고 가르쳤다. 루터와 칼빈은 버나드의 정통교리에 대해서는 존경하였으나, 그의 신비적 명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 사상에 대해서는 일체 동조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의 저술에서 버나드의 신비주를 인용하고 지지하는 내용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3)종교개혁은 버나드의 정통교리를 계승하였으나, 그의 신비주의 명상과 신인합일 영성은 제거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회중파 이단 청교도의 초기 인물 리처드 십스(Richard Sibbs, 1577-1635)에 의해 버나드의 신비주의가 다시 교회에 도입되었다.4) 리처드 십스는 윌리엄 퍼킨슨과 함께 회중파 청교도를 대표하는 초기의 인물이고, 퍼킨슨이 설교하였던 교회에서 설교한 인물이다. 

이 사실을 통해 회중파 청교도가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다시 확인되었다.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사상들이 개혁신학으로 포장되었다.

(1)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를 취득,전가전했다는 능동순종 교리, 
(2)죄인의 영혼이 깨어나서 스스로 자신의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는 회심준비론,
(3)회심한 영혼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황홀경, 몸의 마비, 환상 등의 체험을 주고 그것으로 인해 성화가 급속히 진전된다는 신적인 성화의 빛 사상(훗날의 오순절 운동의 성령(재)세례-신사도의 기름부음과 같은 것),
(4)하나님 환상, 하나님 체험을 경험하는 신비주의 묵상 등이다. 

4)칼빈주의 정통 개혁신학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에드워즈의 신비적인 하나님 체험은 버나드의 신비적 명상을 통한 신인합일 영성의 연장이다. 시편에서 볼 수 있는 다윗의 묵상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내면의 환상, 삼위일체 영광의 체험 등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나타났다고 해도 다윗은 특별계시 수납자이고 선지자였으므로 에드워즈의 묵상과 비교할 수도 없다. 에드워즈의 신일합일 신비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신비주의자들의 행태도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에드워주가 묵상하면서 경험한 내면의 하나님 환상과 체험들에 대해 에드워즈가 기록한 내용을 통하여 직접 살펴보자. 다음은 백금산 목사가 에드워즈의 자서전을 번역하여 자신의 책『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에 소개한 내용이다. 괄호 속의 숫자는 그 책의 페이지이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166)

->명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내면의 환상, 상상이 이어지는 것은 건전한 묵상이 아니고, 리처드 십스를 통해 회중파 청교도들에게 계승된 버나드의 신비적 명상의 하나님 체험, 즉 신인합일의 모습이다. 버나드는 하나님 환상이 내면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 하나님과의 합일이라고 가르쳤다.

“거의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요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순수함,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그리고 이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167)

“해마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종 숲 속이나 조용한 곳을 혼자서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68)

“종종 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조용한 곳에서 휴식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달콤한 시간을 가졌습니다.”(173)

->버나드는 하나님과 성도의 영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애정적 관계로 기술하였고, 신랑되시는 하나님이 신부인 성도에게 찾아오는 경험을 ‘달콤함’이라는 단어로 자주 표현하였다. 동일한 모습이 에드워즈의 묵상(사실은 명상, 관상) 신비주의에서 나타난다.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177)

->에드워즈에게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정상적인 말씀 묵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았다’(아마도 ‘맛보았다’는 의미) 것도 버나드가 가르친 하나님과 합일, 즉 하나님이 에드워즈에게 내면의 환상을 부어주었다는 의미이다. 결코 말씀이 삶에 적용되는 정상적인 묵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79)

->삼위일체를 눈으로 본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칼빈이나 그 어떤 교부들에게도 일어난 적이 없고,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명상과 체험이 버나드 등의 신비적 명상의 단골 소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에드워즈에게 일어났다는 이런 현상이 신비적 체험(이단현상)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나는 종종 그리스도의 탁월한 충만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온유하시고 적임자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만 왕으로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180)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충만하게 체험했다는 것도 성경의 말씀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한 체험이다. 버나드의 신인합일 신비주의 영성을 염두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180-81)

->에드워즈는 자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움을 마치 사도 요한이 천국보좌의 환상을 본 것처럼 보았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이 말은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환상이 외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의 내면으로 이 환상이 부어졌다는 의미로 보인다. 내면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환상을 체험하면서 황홀경을 체험하는 것은 버나드 신비주의에서 최고의 체험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인합일 체험이었다. 버나드는 이런 체험이 일생에 한 두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하다고 했고, 이 체험을 위해 수도사들은 일평생 수도생활하면서 노력한다고 했다.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을 느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샘으로 나타나셨습니다.”(181)

“최근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더욱 충만하게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계시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4-85)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에드워즈처럼 내면으로 부어지는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느끼는 것은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최고로 치는 신비체험이다. 에드워즈의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샘으로 나타나셨습니다”라는 표현과 체험도 사도들의 저술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신비적인 내용이다.
 

맺는 말

에드워즈는 신비주의 이단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묘한 인물이었다. 에드워즈가 그 시대의 회중파 청교도들에게는 매우 기초적이었던 것 즉 알미니안주의를 경계하였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탁월한 칼빈주의자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웨드워즈를 연구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바르게 연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그들이 신학적으로 거의 장님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의 사상과 신학은 칼빈과 종교개혁 신학과는 너무 다르다. 에드워즈는 칼빈과 종교개혁 사상에서 벗어난 비성경적인 회중파 청교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 미주 ---

1)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부흥과개혁사,2011), 153.

2)앞의 글, 154.

3)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부흥과개혁사, 2013), 70.

4)원종천 교수의 책 『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 9장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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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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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동사리 2019-06-12 12:58:22

    이토록 뻔뻔하고 당당하게 미화되어 존경과 숭상을 받는 이단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강력하게 경계시키기는 커녕 양들에게 그의 이단성을 미화시켜 팔아먹고 그의 탁월함이 자기것인양 흉내내며 사는자들이 있으니..신고 | 수정 | 삭제

    • 복음주의 2019-06-11 03:53:52

      이상한 논리를 주장합시는 군요.
      1)어거스틴도 버나드처럼 신비적 명상을 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신비주를 추구했습니까?
      2)만일 어거스친이 그랬다면, 어거스친이니까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이 당시의 수도원의 기능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어거스틴이 버나드와 에즈워즈처럼 신비적인 명상으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신인합일을 추구했다는 말은 전혀 못 들었습니다. 그랬다면 어거스틴도 이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업혀 가려는 시도는 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버나드는 신비주의 이단이었고, 회중파 청교도가 칼빈과 루터가 제거한 버나드의 신비주의를 다시 되살렸다고 정 목사님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인정하지 않는 신인합일 명상 신비주를 회중파가 다시 도입하였다고 합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오직 믿음으로 2019-06-11 01:04:07

        이 글이 설득력을 확보하는 것은 개신교인에게 성 버나드가 확정적으로 문제적 인물이며 이단적인 인물이라는 결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일은 사상적으로 모든 면에서, 확정적으로 어거스틴도(10세기에 정리된 사상으로) 버나드와 같은 부류라는 결론이 있게 됩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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