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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의 칼빈과 준비론에 대한 주장은 이상하고 엉성해『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2장 하반부 분석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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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6  12: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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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비키는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2장의 앞부분에서 ‘회중파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이하 ‘준비론’)이 어거스틴의 신학 전통에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2장의 한반부에서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에서도 준비론과 일치하는 내용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비키는 먼저 회중파 청교도의 신학이 칼빈의 정통 개혁신학으로부터 이탈했다고 주장하는 로버트 켄달(Robert Tillman Kendall, 1935- )의 말을 소개했다.

“켄달은 청교도 준비교리는 전적으로 이질적이었으며, 실제로 칼빈의 신학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칼빈의 신학은 ‘믿음을 위한 준비에 대해 인간의 어떠한 기여도 배제시킨다 ... 칼빈의 의중에는 믿음에 앞선 율법적 역사를 포함하여 중생의 과정에서도 인간이 준비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부분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조엘 비키, 17페이지)

비키는 먼저 반대 입장에 서 있는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 후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그 방식이 더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비키는 잘 아는 것 같다. 칼빈과 청교도의 준비론을 연관시키려고 수고하는 비키의 글을 보니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칼빈 쟁탈전”

비키는 칼빈의 성경 주석들과 『기독교강요』에서 준비론을 지지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을 차지하기 위해 소리없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비키의 주장에는 무리한 점들이 많다. 먼저 비키는 요한복음 6장 44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준비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 칼빈은 인간은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강압적 강제는 아니다. 요한복음 6: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며’에서 ... 칼빈은 ‘'이끌다'라는 표현은 실로 참되다. 그러한 이끄심은 외부적 힘에 의해 인간에게 강요할 만큼 강제적이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은 성령님의 강력한 자극이며, 이로 인해 이전에 비자발적이며 주저했던 인간은 자원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라고 썼다.” (조엘 비키, 17-18)

비키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택하신 죄인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청교도 준비론과 연관시켰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어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시어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신다는 사실은 종교개혁 신학자들 모두가 당연히 인정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이 자신의 회심을 준비하는 모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 글이 업로드 된지 불과 몇 시간 후 성경 원문 연구에 능한 한국의 이창모 목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댓글로 올려주었다. 

   

"요 6:44절의 ‘이끌지’로 번역된 헬라어 ‘헬퀴세’는 동사 ‘헬코’의 부정과거 가정법이다. ‘끌다’, ‘끌어당기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헬코’는 강한 힘을 가진 주체가 ‘억지로 ~시키다’, ‘강제로 이끌다’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같은 단어가 요 2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헤일쿠센)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에서 사용되었다. 어부들이 힘으로(강제로) 그물을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 6:44절의 ‘이끌지’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신다는 의미이다. 요 6:44절에서 사용된 ‘헬퀴세’는 단순히 ‘인도하다’, ‘이끌다’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을 그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강제로 이끄 신다'는 의미이다." (이창모 목사))

비키의 준비론에 대한 주장은 “회중파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의 핵심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청교도 준비론은 하나님이 지옥과 천국, 하나님의 존재, 영혼의 운명 등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즉 영적으로 죽었으나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는 당연한 사실을 가르치는 이론이 아니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핵심은 죄인에게 먼저 율법의 저주를 선포함으로 그 영혼이 깨어나고 겸비해진 후, 스스로 지옥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죄와 불행한 영혼의 운명을 슬퍼하고,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간절하게 구원을 열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준비론을 가르치는 교회들이 조엘 비키의 책과 함께 신자들에게 권하는 또 다른 책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의 모든 내용은 “각성 받아 근심하면서 구원을 열망하게 된 자들이여!”라는 한 문구를 중심으로 전체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첫 페이지의 첫 문단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단에까지 이 문구가 나온다. 그 중의 한 문장만 읽어보자. 

“각성 받고 구원에 대해 열망하며 근심하는 죄인이여, 저는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권하는 바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토로하는 그 감동적이고 보배로운 방식을 특별하게 주목하라고 말입니다 ... 여러분의 발자취를 따라서 뒤로 거슬러 올라가 범죄를 행했던 각 장면마다 생각하고, 그럼에도 여러분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인내가 어떠한지 멈추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102 페이지)

전통적 청교도 준비론은 죄인의 영혼이 각성되어 스스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는 반페라기우스-웨슬리안 신학의 구원론과 그 배경이 일치한다. 복음보다 율법을 먼저 선포함으로 영혼이 깨어나서 스스로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회심을 준비하게 된다는 것이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핵심이다.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회심준비론'이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칼빈이 요한복음 6:4절을 해설하면서 말한 내용은 청교도 회심준비론과 무관하다. 칼빈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며”(요 6:44)를 해설할 때, 저주의 율법선포로 죄인의 영혼이 깨어난 후 스스로 죄를 미워하고 구원을 열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서 나서게 된다는 청교도 준비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비키의 말은 칼빈에 대한 일종의 조작이다. 비키는 그 바로 뒤에서 다음과 같은 비슷한 말을 했다.  

“언뜻 보기에 칼빈이 모든 형태의 회심을 위한 준비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칼빈은 윌리엄 오캄(1288-1348)과 같은 중세 신학자들 중 명목론파로부터 파생되었던 준비의 개념을 거부했던 것이다.” (조엘 비키, 67 페이지)

‘윌리엄 오캄(1288-1348)과 같은 중세 신학자들 중 명목론파로부터 파생되었던 준비의 개념’이라는 비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회심을 위한 준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공로’로 간주하는 로마교회의 구원론과 관련된 말이다. 칼빈이 준비론을 반대했던 이유는 인간의 준비를 구원을 위한 공로로 간주하는 경향 때문이지, 인간의 준비가 구원을 위한 공로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칼빈도 굳이 준비론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미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와 상관없이 죄인에게 은혜를 주입시키며 그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의 은사를 발휘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 ... 하지만 중세 명목론자들은 인간이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적절한 보상(협력적 공로)으로 은혜를 주입하실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 (조엘 비키, 67-68 페이지)

오캄을 비롯한 명목론(유명론)자들은 인간의 준비가 구원을 얻는 ‘공로’가 된다고 가르쳤으나, 아퀴나스는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오직 은혜와 사랑에 의거하여 구원을 주신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과연 아퀴나스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신학자들이 아퀴나스를 로마교회의 행위구원론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비키의 아퀴나스에 대한 말은 너무 다르다.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의 아퀴나스에 대한 말을 보자.

   

“토마스는 또 믿음을 공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믿는 것은 지성이 신적 진리에 찬동하는 행동이므로 믿음이 공로적 행동인 것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찬동이 의지적인 역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믿음의 행동이 비록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로 움직였어도 자유의지에서 나온 한은 공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서철원,『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94.)

비키가 주장하는 준비론이 전통적인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먼저 아무 공로없는 택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믿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을 비키는 청교도 준비론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독자들이 비키가 말하는 회심준비론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키는 복음보다 율법을 먼저 전해야 한다는 준비론의 핵심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실하면서, '준비'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회심준비론과 조금 다른 내용을 말한다. 동시에 칼빈의 글을 인용하니 준비론의 앞뒤를 다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혼란이 클 수 밖에 없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을 준비시켜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고 말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나님께서 죄인을 준비시키시는 한 예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간절함(눅 19:1-10)들었다.” (조엘 비키, 68 페이지)

비키는 칼빈이 누가복음의 삭개오의 회심 이야기를 해설할 때, 이미 청교도 준비론과 유사한 내용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삭개오가 구원받도록 미리 마음을 준비시켰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독자들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기존의 준비론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율법으로 자극을 주니 죄인의 영혼이 깨어난 후,  스스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신의 운명에 근심하면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비키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초점을 더 많이 하나님께로 돌린다. 결과적으로 구원받기 전에 삭개오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었는데, 영혼이 각성된 삭개오가 스스로 구원을 그리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죄인(삭개오)의 마음을 그렇게 준비시켰다고 비키는 말한다. 결국 같은 의미인데, 반펠라기우스-웨슬리안의 냄새가 확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것이 비키의 기술이다. 

기존의 개혁신학도 택하심 받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하나님께서 이끈신다는 사실은 충분하게 강조한다. 하나님이 죄인의 마음에 손길을 주시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하나님께서 일부를 택하시고, 택하신 자를 위해 그리스도가 먼저 피 흘리게 하시고, 택하신 자를 하나님의 때에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시고, 택하신 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의 눈과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택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이 같이 은혜를 주시어 준비하신 영혼들만 구원에 이른다.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갈망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손이 그의 마음을 준비시켰기 때문이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가서 그 길로 지나가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열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나님의 손이 그 마음을 터치하셨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 과연 청교도 준비론이 이와 같은 기존의 신학의 내용과 같은 주장이었던가? 비키는 택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원리를 청교도 준비론이라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전의 회중파 인물들이 가르친 것과 다른 내용을 회신준비론으로 이야기하면, 비키가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다른 내용을 말하고 싶으면, “나의 새로운 준비론은 다음과 같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핵심은 율법선포와 하나님의 역사로 죄인의 영혼이 구원을 향하여 깨어나고, 죄인이 구원의 길을 찾기시작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에서 말하는 '도움의 은총'을 받았을 때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하나님의 선행은혜가 왔을 때 인간의 자유의지가 협동함으로서 시작되는 회심에 대한 웨슬리의 주장과 유사한 내용이 기존의 청교도 준비론이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저주의 율법을 듣고 배운 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지나가실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삭개오가 자기 영혼의 비참한 운명을 슬퍼하고 회개하면서 자신의 구원의 길을 모색하였다는 내용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이런 내용이 없으면, 삭개오의 이야기는 청교도 회심준비론과 연관성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로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보신 예수께서 먼저 삭개오를 부르셨고, 삭개오의 집에서 유숙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삭개오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만남이 일어났고, 구원이 일어났다.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힌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했다. 청교도 준비론에 의하면, 삭개오의 이런 변화와 회개는 뽕나무에 올라가지 전에 이미 일어났어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삭개오가 믿음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뽕나무에 올라가는) 간절함은 믿음을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종종 인간들에게 은밀한 갈망을 부여하시는데, 이러한 갈망은 그들을 그분께로 인도한다.’고 기록했다.” (조엘 비키, 68페이지)

비키는 자기의 주장을 위해 칼빈을 조금씩 비틀고 있다. 비키는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마음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고 한다. 문론 하나님이 삭개오를 준비시킨 것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자에게 먼저 은혜를 주시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신다는 기존 개혁신학에서 이미 가르치는 내용을 회심을 위한 인간의 ‘준비’라고 한다면,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특징이 없어져 버린다. 원래 회중파 청교도들이 말하는 회심준비라는 이론은 율법선포와 하나님의 역사로 영혼이 각성된 죄인이 스스로 구원을 위해 근심하고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회심을 준비한다는 주장이다.

아직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택자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청교도 준비 개념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비키는 둘을 같은 의미의 준비론으로 만들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리고 비키는 율법의 저주를 먼저 선포하면 인간의 영혼이 구원을 향하여 각성되게 만든다는 전통적인 청교도 준비론의 주장을 반복하였다. 칼빈이 디모데서신과 디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했다.

“율법은 아담의 모든 자손을 정죄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쳐져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과 지옥 불에 삼켜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고, 어떤 소망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가 된다 ... 우리 안에 단지 영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 겸비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았는 구원을 구해야 한다.” (칼빈의 디모데, 디도서 주석 50-51 페이지. 조엘 비키, 72 페이지)

그런데 여기서 비키는 칼빈의 말을 칼빈의 의도와 다르게 인용하였다. 칼빈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율법의 저주를 선포하여 죄인이 엎드리게 만들어야 그리스도가 들어갈 영적인 자리가 생긴다는 청교도 준비론 사상을 가지고 위의 말을 한 것처럼 혼란을 주었다. 『기독교강요』를 보면, 칼빈은 신.구약의 긴 역사 속에서 율법의 기능과 의미를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항상 저렇게 말했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말을 읽어보자.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사도는 단언한다 ...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기독교강요, 2.7.6.)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6.2.)

칼빈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의 저주받은 상태를 율법이 설명한다고 가르쳤다. 원래 율법은 의로운 것이므로 만인 죄인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면, 율법을 통해 구원이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부패한 죄인에게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율법은 마치 먹지 못할 맛있는 떡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쳤다. 결국 그리스도가 오시어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시어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했고,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들 속에서 칼빈이 복음과 율법에 대하여 하는 모든 말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의 방대한 분량의 『기독교강요』에서 거짓 선생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을 찾아서 이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청교도 준비론의 율법의 능력, 즉 먼저 저주의 율법을 전하면 죄인이 겸비하여 자신의 회심을 준비하게 되고, 그 후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 성령이 구속의 역사를 베푸신다는 청교도 준비로 사상과 칼빈의 가르침은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선교했던 사도 바울은 항상 구약을 배경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설했다. 구약의 모든 중요한 것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한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때 성령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택자의 영혼을 살리면서 동시에 믿고 구원에 이르게 했다. 복음과 율법에 관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도 언제나 사도 바울과 동일했다. 그러나 비키는 독자들이 칼빈도 회심준비론을 지지했다고 오해받기 좋게 『기독교강요』의 일부 내용들을 인용한다. 비키가 인용한  『기독교강요』의 말들을 얼른 보면, 정말 칼빈이 회심준비론을 지지한 것처럼 보인다. 

“준비론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를 주는 것은 회개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기게 된다는 칼빈의 개념이다. 그는 ‘죄인의 마음은 회개로 기울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각성되어야 한다.’(기독교강요, 3.3.7)고 말했다.” (조엘 비키, 75 페이지)

그러나 비키가 인용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의 앞뒤를 보면, 칼빈의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회심을 준비하는 과정의 회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의 신학에서 회개는 구원받는 믿음과 동일하고, 구원을 받는 순간부터 회개가 시작된다고 한다. 칼빈의 이 말은 청교도 준비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비키가 인용한 부분을 『기독교강요』의 다른 번역본으로 한 문장 앞에서부터 다시 찾아보았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3.3.7)

칼빈의 또 다른 말을 보자. 칼빈은 항상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받기 전에 인간에게 회개가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여 죄가 용서됨을 알리는 목적은 죄인들이 사탄의 압박과 죄의 멍에와 타락한 생활의 속박에서 풀려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하려는 것이므로 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를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서며 회개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능력을 깨달은 일이 없고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각을 한다.” (기독교강요, 3.3.1)

구원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나려면 나중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중생한 자에게 임하셨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신앙이 나타난다. 비키가 인용한 이 내용이 있는  『기독교강요』 3권 3장의 제목이 “믿음에 의한 중생: 회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칼빈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회심준비 과정의 회개를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비키가 인용한 칼빈의 다음의 말은 우리를 매우 곤욕스럽게 한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덕이 있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기독교강요, 2.7.11)

비키가  『기독교강요』에서 인용한 칼빈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먼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깨닫고 겸손해진 후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고 칼빈이 가르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칼빈이 청교도 준비론이 주장하는 내용과 같은 뜻으로 이 말을 했다면, 필자는 앞으로 칼빈을 다시 볼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 특히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실천한 복음전도 방식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이 말한 내용은 현실적으로도 맞지 않다. 오늘 날 한국이나 미국에 사는 불신자에게 구약의 율법의 저주를 가르친다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자기의 영혼의 운명을 슬퍼하며 구원을 열망하는 자세를 보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직 개인적 구원의 신앙에 이르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성을 당연시하는 기독교 신정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율법을 전해듣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교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사람이 지금 한국이나 미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주변의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저주의 율법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비싼 밥 드시고 그리 할 일이 없으시나요?"

그러나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중세시대의 유럽, 종교개혁 당시의 유럽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근거하여 사회, 정치, 교회, 교육 등의 중요한 요소들이 구성되었던 때이다. 기독교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의 황제가 세계적인 종교회의를 소집하였고, 모든 나라의 황제들이 세례를 받아야만 했고,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직접적인 이유도 프랑스의 황제에게 종교개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시대에는 구원받지는 못했으나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해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악인들에게 율법의 저주를 선포하여 ‘율법(적)의 회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칼빈의 말이 이해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적)의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복음(적)의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몇 가지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율법의 회개"라고 부른다. 죄인은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의 회개"라고 한다.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과 공포심에 대한 위로와 불행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다.” (기독교강요, 3.3.4)


맺는 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이용하여 청교도 준비론의 타당성을 증명하려는 비키의 시도는 매우 엉성하다. 특히 칼빈과 준비론을 연결해 보려는 시도가 성공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비키가 결론적으로 말한 다음의 내용은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미사일을 혼자만 좋아서 쏘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율법으로 마음을 준비시켜야 한다. 율법은 돌 같은 마음을 망치로 두들겨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율법을 쓰시기 전에 표면을 매끄럽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회개라 물렀지만, 칼빈은 이것을 참된 회개로 이끄는 믿음을 위한 준비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칼빈이 회심의 일반적인 방식은 믿음을 위한 준비를 포함한다고 가르쳤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조엘 비키, 7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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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n 2019-05-17 17:22:37

    기독교강요 2-7-11 는 칼빈이 율법의 세가지 용도를 설명하는 장에서 나온 부분입니다. 첫번째 용도 (2-7-6 부터 9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정죄를, 두번째 용도 (2-7-10부터 11까지)는 공포심을 일으켜 악행을 억제하는 것을, 세번째 용도 (2-7-12부터 13까지)는 성도의 선행을 촉구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여기서 2-7-11은 10과 같이 연결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도덕법이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것은 국가적으로 법으로 쓸 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생겨서 법을 짓지 않으려고 하므로 사회가 안정되고, 두려움을 가졌던 사람들 중 택자들은 중생 후에는 두려움과 공경을 넘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에게 적용되는 율법의 기능은 2-8-51에서 59까지 설명되고 있습니다.

    2-7-10의 내용입니다. 제가 한글 번역본이 없어서 영어로 씁니다. Nevertheless, this forced and extorted righteousness is necessary for the good of society, its peace being secured by a provision but for which all things would be thrown into tumult and confusion. Nay, this tuition is not without its use, even to the children of God, who, previous to their effectual calling, being destitute of the Spirit of holiness, freely indulge the lusts of the flesh.

    여기서 자녀가 부르심을 받기 전의 율법의 용도는 회심을 일으키는 준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율법이 좋은 사회에 필요하고, 부르심을 받기 전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라는 해석이 됩니다.

    2-7-11은 순전히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 2-7-10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을 통해 그리스도로 이끈다는 점에서 율법의 기능이 있으나, 성령의 인도에 의해 되는 것이지 율법자체가 깨달음을 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율법을 배운 이스라엘 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택자들은 믿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셨듯이 (눅 24:44), 택자들은 율법과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택자들은 성령의 힘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같은 율법과 성경을 배운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키는 율법이 몽학선생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장성일 2019-05-17 11:30:47

      확실하고 선명하게 분석해 주시니까 감사합니다.
      조엘 비키가 청교도 회중파 회심준비론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그것을 칼빈의 권위를 통해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자, 자신의 생각이 가미된 회심 준비론을 가지고, 칼빈의 견해와 같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결론적으로 청교도 회중파 회심준비론을 칼빈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의 구미에 맞게 이상하고 엉성하게 해석했네요...신고 | 수정 | 삭제

      • Minn 2019-05-17 10:39:29

        개혁교회 목사들이 기독교강요를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신학자들이 칼빈을 이용하면서도 칼빈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개혁신앙이 이제는 아퀴나스와 가톨릭의 합작품입니다.
        인간의 노력을 높이 여기는 가톨릭적인 사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으니 오장육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부흥회니 컴퍼런스니 이름만 좋지 막상 가면 자기열심을 내라고 부추깁니다. 내 열심을 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신나지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나를 위해서니까요.
        우상을 섬기다는 것은 창조주를 믿지 않고 나와 같은 창조물을 내 손으로 빚고 깎아 바로 '내 작품', '나'라는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주를 믿지 않고 내 능력을 믿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만 '사람'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신고 | 수정 | 삭제

        • 이창모 2019-05-17 10:28:57

          조엘 비키는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요6:44의 “이끌지”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요6:44의 ‘이끌지’로 번역된 헬라어 “e`lku,sh|”(헬퀴세)는 동사 “e[lkw”(헬코)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끌다, 끌어당기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e[lkw”(헬코)는 강한 힘을 가진 주체가 ‘억지로 ~시키다’, ‘강제로 이끌다’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요한복음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한 요21:11을 보면 요6:44의 ‘이끌지’의 의미가 강제로 이끄는 것임이 더욱 분명해 진다.

          요21: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ei[lkusen/헤일쿠센)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끌어올리니’는 어부들이 힘으로(강제로)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6:44에 사용된 “e`lku,sh|”(헬퀴세)는 단순히 ‘인도하다, 이끌다’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강한 힘으로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끄신다”는 의미이다.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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