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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준비론, 칼빈의 교회론을 거부한 회중파 청교도들의 망상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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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2  12: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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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메리 여왕이 죽은 후 개신교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하자 영국의 종교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독일과 스위스 등에서 망명생활하고 있던 종교개혁자들도 큰 기대를 품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개혁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천주교와 종교개혁의 중간 정도의 노선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도움으로 종교개혁을 이루어 보려던 소망이 사라지자 청교도들은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하원의 많은 의석을 차지하여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고, 여왕의 추밀원의 몇 석을 차지하였다. 서서히 청교도 혁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출판을 통하여 종교개혁 사상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분리파(독립파) 청교도 등장

이 무렵 청교도 내부에서 영국 국교회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순수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분리주의자',  또는 '독립파'라고 불리웠던 그들이 회중파 청교도의 시조이다. 1560년 대 후반, 런던에 최초의 분리된 교회가 생겼다. 1580년경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노리치(Norwich)에 또 하나의 분리된 교회를 세웠다. 로버트 브라운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장로파 청교도의 조상인 토마스 카트라이드의 제자였으나 분리주의자(회중파)로 노선을 바꾼 브라운은 나중에 생명의 위기를 만나자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영국 국교회로 회귀하여 분리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분리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대명사 ‘브라운파’(Brownist)의 창시자가 되었다.

   

상규 교수는 “분리파 청교도와 이향성(離鄕性): 신앙의 자유 찾아 나그네적 삶을 추구”에서 브라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라운은 화란 젤란드(Zeeland)지방에 피난민 교회를 세우고 화란에서의 회중주의를 전파하는 책, <종교개혁론>(A Treatise of Reformation)을 집필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그의 책에서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주창하였다. 교회가 국가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게 되면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다고 보았고, 영국교회와 같은 국가교회나, 장로교회와 같은 국민교회도 부정하였다. 브라운이 이상으로 여겼던 교회는 국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계약만 있었던 초대교회와 같은 형식의 교회였다. 브라운은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주창한 것이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 역사신학)

이 당시 얼마나 많은 분리된 교회가 생겨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590년대, 핸리 베로(Henry Barrow), 존 그린우드(John Greenwood)에 의해 런던에 또 하나의 분리된 교회가 생겼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1593년에 처형되었다. 그들을 따랐던 신자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606년에 링컨셔의 게인즈버러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분리된 교회가 존 스미스(John smith)의 지도하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세웠다. 1607년에 또 한 그룹의 분리주의자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고, 1609년에는 또 다른 한 그룹이 라이덴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세웠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했던 이런 사람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뉴잉글랜드로 갔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리주의자들(회중파 청교도)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회중파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권징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성토했다. 바로 이점이 회중파 청교도 조상들이 개혁신학의 기초인 종교개혁자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다른 종교개혁 신학을 바르게 배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칼빈은 교회를 세우는 시금석으로 오직 말씀선포와 성례집행을 강조했지, 결코 권징을 교회의 핵심 요소로 가르치지 않았다.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이 표준을 시금석으로 적용해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집단이 교회에 바칠 존경을 확신있게 드려야 한다.” (기독교강요, 4.1.11)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면 이런 표식이 있는 단체를 교회로 인정해도 좋다는 충분한 보장이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이 표식을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1,1,12)

이미 몇 차례 설명한 것처럼, 회중파 청교도의 초기 조상 윌리엄 퍼킨슨과 윌리엄 에임스는 칼빈이 아니라, 칼빈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 베자에게 종교개혁 신학을 배웠다. 그래서 처음부터 칼빈의 교회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날 한국의 개혁신학은 교회의 기초를 칼빈이 가르친 대로 ‘말씀선포’와 ‘성례의 집행’이라고 하지 않고, 회중파 청교도들의 교회론을 따라 권징을 교회의 기초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성경적인 권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정치적인 복수와 배반의 권징이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2) 영국 국교회가 처음부터 합당한 구성원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회중파 조상들은 영국 국교회가 무의미하게 전 국민을 교인으로 여긴다고 비판하였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세웠다가 처형된(1593년) 핸리 베로는 칼빈을 “교황제의 연기 자욱한 용광로에서 갓 벗어났기 때문에 시온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볼 수도, 그것에 도달할 수도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칼빈이 "아무 정밀 심사도 없이 그 도시 전체, 심지어 모든 무지하고 독선적인 자들을 교회의 품으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성례를 집행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칼빈이 "온 유럽에 해로운 본이 되어 동일한 과오를 범하게 했다"고 평가하였다.  

어떤 종파가 형성되는 초기의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의 말과 주장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후배들은 선배 순교자를 존경하면서 그 순교자의 핵심적인 주장과 사상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따르게 된다. 주기철, 손양원이 남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라! 회중파 청교도의 초기 조상이고, 존경받는 순교자인 핸리 베로가 공개적으로 칼빈의 교회론을 비판하였다는 것은 이후 회중파 청교도의 신학의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회중파에서 매우 존경하는 초기의 조상이 칼빈의 교회론을 비판하였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는 개혁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 즉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신학 전개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 물론 고대교회의 교리를 기본 진리로 받아서 신학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131)

이때부터 회중파 청교도들은 교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언약과 서명을 중시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교회에 대한 개개인들의 언약과 서명, 그리고 권징이 참된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1세(6세)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제임스 1세는 스크틀랜드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영항을 받았으므로 이번에도 많은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1604년에 ‘햄프턴 궁정의 회담’에서 “감독 없이 국왕도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영국 국교회 중심의 정치 노선을 지향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곧 이어 자신에게 방해되는 300명의 청교도 목사들을 추방되었다. 이때 여전히 영국 국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청교도들에서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났다.

1)국왕의 정책을 따라가는 순응주의 파(conformists)

장로파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세우자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영국 국교회에 남아서 종교개혁을 추구하였다. 이상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분리파와는 달리 비분리파 청교도는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원치 않거나 분리를 잠정적인 것으로 보는 그룹 인데 장로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교회 안에 있으면서 개혁을 이루려고 시도하였던 온건한 그룹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을 떠나 새로운 대륙으로 이주해 간 청교도는 어느 그룹의 사람들일까? 자명한 일이지만 그들은 분리파 청교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적 인사들이 아니라 분리주의적 회중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상규 교수)

2)국왕의 정책을 따라가지 않는 비순응주의 파(non-conformists, 비국교도파)

비순응파에서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본격적으로 주장되었다. 초기에 방법론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 ‘독립파’(Independents)와 하는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로 나뉘었으나, 결국 이들이 회중파 청교도(Congregational churches)의 시초가 되었다. 이들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08년 최초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는 한 그룹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였다.

1) 교회는 오직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2) 교회의 회원 자격이 구체적으로 명문화 되어야 한다.

3)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특성은 일치해야 한다.

4) 교회의 회원이 될 사람에게서는 구원의 증거가 명확하게 나타나야 한다.

5)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계명(율법) 순종에 대한 언약을 해야 한다.

회중파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세울 때 참고하였던 최초의 선례는 1554년 메리 여왕의 박해 당시 망명한 종교개혁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세운 교회였다. 그 교회는 입교의 조건으로 교회에 대한 복종, 선한 행실 약속, 신앙고백 요구하였는데, 회중파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세울 때 바로 그 교회의 선례를 참조하였다. 

1606년, 암스테르담에 세워진 분리주의 교회(회중파 청교도 교회)는 교회 회원 자격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명시하였고, 사람들에게 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1)순종에 의해 증명된 믿음

2)구원에 대한 교리적 지식

3)경건하고 의롭고 근신하는 삶

1630년대부터 영국 국교회를 참교회로 인정하면서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르면서 개혁을 추구하였던 비분리파 청교도(국교회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 사람들에 의해 회중파 청교도(바빙크는 청교도 칼빈주의라고 표현)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장로파 청교도를 제외하고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했던 청교도들과 분리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였던 청교도들의 신학이 같았으므로, 그들은 신대륙에서 하나의 회중교회를 세웠다.

참고로 바빙크는 신대륙에 세워진 칼빈주의 교회를 ‘청교도 칼빈주의’(회중파 청교도)와 ‘장로파 칼빈주의’(장로파 청교도)로 일찍부터 구분하였고, 회중파 청교도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이라는 거짓 부흥이 일어난 후 뉴잉글랜드의 칼빈주의 교회가 양분되었는데, 거짓 부흥을 반대하는 ‘옛 빛파’를 장로파 칼빈주의 교회(장로파 청교도)로, 찬성하였던 ‘새 빛파’를 청교도 칼빈주의(회중파 청교도)로 구분하였다. 바빙크는 에드워즈의 제자들과 아들 등의 회중파 청교도들에 의해 원죄가 부정하고 보편속죄를 주장하는 신학이 발전되었고, 더 시간이 지나면서 도르트신조와 웨민고백서를 부정하고, 자신들만의 또 다른 신앙고백서(1880년)를 작성했다고 지적하였다.

1630년대부터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들은 교회의 새 회원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확증하는 방법에 관한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신대륙의 회중교회들은 남자가 교회의 회원이 될 때에는

1)전 교인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구했고 (약 15분 동안 하나님에 대해 간증),

2)그의 신앙고백에 대해 교인 다수가 동의하면 주요 교리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신앙을 점검했고,

3)그 다음에는 기존의 선거권 가진 교인들이 그를 회원으로 받을 것인지에 대해 투표하였고,

4)마지막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5)그러나 여자인 경우에는 본인이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목사가 낭독하였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회중파 청교도 교회는 100%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사람들로만 교회가 구성되어져야 한다는 지상교회에서 실현될 수 없는 교회론을 추구하였다. 보이는 지역교회(개 교회)와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의 특성을 일치시키려는 무리한 의욕이 회중파 청교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기준을 세운 칼빈은 100% 구원받은 사람으로만 이루어지는 교회는 지상에서 불가능하다고 가르쳤고, 과연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가르쳤다.

 

   


“주께서는 분명한 표시와 증거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셨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 (딤후 2:19).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마 24: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기독교강요, 1. 1.8)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다고 믿음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교회는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여 성찬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그가 이후에 자신 스스로의 행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이 없는 인생임을 드러내기 전까지 아무도 그가 참 교인인지 거짓 교인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회중파 청교도들은 인간의 한계와 지상교회의 한계와 불완성을 스스로 뛰어 넘어 지상의 완전한 교회를 구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벗어나 구원의 단계와 과정에 대해 사변과 지식 체계로 도식화하는 비성경적인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회중파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이다.

회중파 청교도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가 망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찬식 참여와 교회 회원 자격을 위해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고백 이상의 구원의 확증을 신자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성령의 ‘신적인 빛’이라는 신비적(이단적) 성화론에 빠져 거짓 영의 역사로 환상을 보고, 몸이 마비되고, 신비적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거듭난 성도의 진정한 영적 체험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 참고 자료 ---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 2017).
->이 글의 상당부분이 이 책의 자료에 근거하였다.

고경태, “바빙크, 뉴잉글랜드 회중파 칼빈주의와 장로파 칼빈주의 구분.”

이상규, “분리파 청교도와 이향성(離鄕性): 신앙의 자유 찾아 나그네적 삶을 추구.”

김경식, 페트루스 라무스의 생애와 사상으로 본 서유럽 종교개혁 지형도』 (이새의 나무, 2016).

손석춘,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 기독교를 바로 알기 위한 12개의 인문학적 통찰 (시대의창, 2017).

서요한, 『청교도 유산』 (그리심, 2016).

존 칼빈, 『기독교강요』 (한국문화사).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쿰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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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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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직 복음 2019-04-22 23:27:11

    재침례파가 권징을 중시한 것과 회중파가 권징을 중시한 것이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요?신고 | 수정 | 삭제

    • 김리훈 2019-04-22 23:12:46

      칼빈이 제 1차 제네바 종교개혁에 실패한 후 스트라스부르 에서 난민교회를 개척할때 여러 지역에서 종교의 박해를 피해 온 여러 종파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중의 한파가 재침례파 였습니다. 그들로 부터 권징 이라는 지침이 나왔으며 오늘날 장로교에서도 그것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침례파는 자기들만 참교회라고 하는것이죠.그들이 재침례파라고 자처하는 것은 중생한 자들만이 세례를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수 없는 유아신고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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