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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장로교-청교도 운동과 회중교-청교도 운동의 시작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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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3  13: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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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대해 기존의 정리된 자료가 없으므로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면서 퍼즐 맞추듯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내용은 계속 보충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자주 방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에서 청교도라는 신앙 물결이 일어날 때, 그 안에 어떤 특성을 가진 분파들이 있었을까? 이것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자료를 아직 보지 못했다.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지역에 당시 존재하였던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라는 나라들이 있었다. 웨일즈는 1536년, 1543년 두 번에 걸쳐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 의해 복속되어 잉글랜드의 왕을 수장으로 삼는 영국국교회에 편입된 상태였다. 아일랜드 역시 1536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에 의해 정복되어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므로 아일랜드에서도 독자적인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는 통치하는 왕이 따로 있었다.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왕은 잉글랜드의 왕과 친척 관계였다. 잉글랜드에 '피의 메리' 여왕이 통치(1553-1558)하고 있을 때, 우연하게 같은 이름을 가진 여왕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통치(1542-1567)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혼동한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죽인 사람은 잉글랜드의 피의 메리를 계승한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자식이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메리의 아들,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를 계승하는 왕이 되어 두 나라를 통치하였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제임스 1세로 이름이 바뀌었다.
 

   
 스크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낙스

 

1.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청교도 운동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천주교 신부였으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활동에 가담하다 노예 신분으로 떨어진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를 통하여 일어났다. 낙스는 잉글랜드 군대에 의해 노예 생활에서 구출된 후 잉글랜드에 거주하다 '피의 메리' 여왕의 박해 때 독일로 망명하였다. 낙스는 독일에서 제네바로 다시 옮겼고, 그곳에서 칼빈을 만나 종교개혁 신학을 배웠다.

1559년에 낙스가 조국으로 귀환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비교적 일찍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열매로 1560년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가 작성되었다. 

라은성 교수는 존 낙스가 중심이 되어 만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철저하게 칼빈의 신학 사상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 ... 그러는 가운데 낙스가 한 일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어요. 이것을 다섯 명이 작성했는데, 전부 John이예요. 존 낙스, 존 더글라스, 존 로 ... 존 들이 모여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습니다. 철저하게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기초로 했습니다.” (라은성 교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청교도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교회들은 자신을 ‘언약도’라고 표현하였다. 장로교라는 명칭은 약 100년 후부터 사용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청교도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표현하였는지에 대한 라은성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163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나잖아요? 1차 종교개혁은 1559-60년에 일어났고, 1843년에 3차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 (스코틀랜드의) 2차 종교개혁 때에도 이 사람들이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에 장로교라는 용어를 안 쓰잖아요. 자기들을 ‘언약도’라고 했어요. 존 낙스가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에 뿌리를 내렸다고 해도, 용어상으로는 장로교라는 말을 안 쓴 것입니다. 그 용어는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약도의 이름으로 100년 동안 살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와서 장로교라는 이름을 채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은성 교수)

 

2. 잉글랜드의 장로교-청교도 운동

잉글랜드에서는 장로교-청교도 신앙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잉글랜드의 장로교 청교도 운동의 시작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은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이다. 카트라이트는 1550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스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종교개혁 사상을 접하였다. 1553년에 즉위한 피의 메리 여왕의 박해 때 추방되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성요한 대학(St. John's College),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카트라이트는 매우 뛰어난 설교자였고, 신학 토론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1564년 그가 교수로 일하는 대학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였을 때, 당시 명성이 자자하였던 토마스 프레스톤(Thomas Preston, 1537-1598)를 상대로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논쟁하면서 청교도 신앙에 대해 탁월하게 변증하였다. 

1567년, 카트라이트는 캠브리지 대학의 신학부 교수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종교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의 부패가 성직자들의 계급적인 구조에서 온다고 판단하고 성경적인 교회의 정치와 제도를 연구하였다. 교회의 제도를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전환할 것, 교회 안에 치리를 위한 장로를 세울 것, 설교할 능력이 없는 자를 목사로 세우지 말 것, 교인들이 직접 목사를 선택하게 할 것 등의 장로교적 교회 정치체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트라이트는 그 학교의 부총장으로 부임한 영국국교회 신자이고 훗날 캔터베리의 주교가 되는 인물 존 위트기프트(John Whitgift, 1530-1604)와 갈등을 빚다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이 일로 카트라이트는 영국국교회의 성직제도 등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결국 목사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카트라이트는 제네바로 가서 칼빈의 제자 종교개혁자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만나 종교개혁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하였다.

1572년, 카트라이트는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캠브리지 대학의 히브리어 교수가 되었고, 계속해서 종교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또 다시 어려움을 당하여 체포되었으나 도주하여 목숨을 건졌고, 이후 프랑스에서 오래 망명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잉글랜드에서 여생을 마쳤다. 카트라이트의 장로교 사상은 월터 트래버스(Walter Travers, 1548-1635) 등에 의해 더 널리 확산되었고, 1580년대에 이르러 장로교 청교도 운동이 청교도 내부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라은성 교수의 영국 종교개혁사 강의 영상에서 토마스 카트라이트에 대한 부분을 들어보자.
 


“엘리자베스 시기의 기억해야 할 세 사람은 1)말즈 커버델, 2)존 폭스, 3)토마스 카트라이트입니다. 커버데일은 성경번약한 사람이고, 존 폭스는 순교 사화를 쓴 사람이고,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장로교주의’ 단어를 만든 사람입니다. 장로교라는 말을 만든 사람은 토마스 카트라이드입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장로교주의라는 것을 만들 때,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을까요? 그게 바로 칼빈이지요.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장로법원(consistory)을 만들잖아요? consistory를 통해서 이 분(카트라이트)이 장로교주의라는 단어를 만들었어요. 칼빈은 만들지 않았어요. 장로교라는 말과 개혁신학이라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장로교는 교회 정치적인 용어이고, 장로교 신학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 교회정치인데 거기에 무슨 신학이 있어요?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장로교회라는 말은 맞아요. 교회 정치가 장로교이고 신학은 개혁신학이다! 칼빈주의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지지요.” (라은성 교수)
 

   

 

3. 잉글랜드의 회중교-청교도 운동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교-청교도 운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라 할 수 있다. 회중교-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은 청교도를 지지하는 의회파와 영국국교회와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자 군사지도자였다. 존 오웬은 크롬웰의 군대의 군목이었고, 회중교-청교도를 대표하는 설교자이고 가장 탁월한 신학자였다. 한국 교회에 청교도 신학을 힘써 전파하는 백금산 목사가 오웬을 소개하는 말을 들어보자.

“(크롬웰이) 오웬에게 자신이 곧 아일랜드 정복하려 갈 것인데 군목으로 동참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오웬이 자신의 목회사역 때문에 당장에 답변하지는 않았다. 이후 크롬웰은 자기 동생을 오웬의 목회지로 보내어 오웬을 설득했고, 주변의 목회자들도 오웬에게 갈 것을 권유했다.” (백금산 목사)

“옥스퍼드의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웬은 회중파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회중파 교회의 목회자들을 직접대화와 서신을 통해서 도왔다. 비록 장로파 교회보다 수는 적었지만 회중파 교회가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오웬 같은 훌륭한 지도자의 영향이 컸었다고 볼 수 있다” (백금산 목사)

이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에 영국국교회와 대립하는 전체 청교도 진영의 신앙을 대변하는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가 작성되었다. 비록 수적인 면에서 회중교-청교도 세력이 장로교-청교도 세력보다 작았을지라도 웨민고백서와 다른 여러 분야에 회중교-청교도의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회중교-청교도 운동의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이다. 퍼킨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죄수들에게 복음전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퍼킨슨은 믿음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 대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化)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특히 퍼킨슨은 특별히 율법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설교를 자주했고, 인간의 불안한 양심에 대하여 다루는 설교를 자주하였다. 퍼킨슨은 44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으나, 퍼킨슨의 영향을 크게 받은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등이 영국에서 회중교-청교도 운동을 이끌었다.

필자는 이미 회중교-청교도 신학이 율법을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몇 차례 지적하였다. 지금도 회중교-청교도의 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율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저주와 공포에 가두어야 하고, 그래야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으로 회심하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비성경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이런 흐름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회중교-청교도의 신학의 특징이었음을 윌리암 퍼킨슨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회중교-청교도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대각성 때에도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의 비참한 참상을 강조하는 회중교-청교도들의 설교 특성이 많이 나타났다. 신자들은 그런 설교를 듣고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설립자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율법을 먼저 전하여 사람들을 저주와 공포 아래 가두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였였고,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였다.  만일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함께 전하고 강조했으면, 유대인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들을 당하였을까?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의 예수 믿음과 율법 준수를 병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저주받을 거짓 복음이라고 선언하였을까?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행 9:29)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0)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개혁신학의 기초를 만련한 칼빈, 한국을 대표하는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 등은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을 앞세우거나, 율법의 저주를 먼저 선포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성령의 은혜가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칼빈은 율법을 강조하지 말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점은 안디옥 설교도 분명히 확인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행 13:39 의역).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사도가 다음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기독교강요, 2.17.5)

서철원 박사도 율법을 강조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신앙을 일으키기 못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음이 일어난다고 한다.

   

“예수 믿게 하는 권고가 성공하려면 풍성한 복음의 내용을 선포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히시는 자리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다. 즉 예수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백성이 되라고 권고하거나 선포할 때, 복음의 온전한 내용이 선포되어야만 성령이 역사하신다. 전도가 효력을 내려면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 성령은 전도자로 오셨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원 사역을 선포할 때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50)

초기 회중교-청교도 지도자 윌리암 퍼킨슨이 성화를 진정한 회개와 동일시하고,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순종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종교개혁 완성자이며 개혁신학의 초석을 제공한 칼빈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칼빈은 칭의는 성화에 근거하지 않으며, 완전한 성화와 순종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 참조)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 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11)

이것 외에도 퍼킨슨이 회중교-청교도 신앙에 미친 중요한 공헌은 또 있다. 그는 회중교-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회중교-청교도의 회심준비론에는 다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면서 동시에 알미니안적인 요소들을 함께 가르치는 위험성이 있다. 사도 바울과 칼빈 등의 정통 개혁신학 계보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시도하지도 않았던 구원론이다. 회중교-청교도의 발전 과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룰 때 이 부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간단하게 살표보았으나, 회중교-청교도는 처음부터 칼빈의 정통 종교개혁 신학과 다른 성향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DNA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자료 --

1)조준영, “영국교회 개혁 동력 ‘청교도’를 낳다”(기독신문, 2009.8.10)

2)라은성 교수의 영국종교개혁사 강의영상

3)Thomas Cartwright–the father of Puritanism (by Alan Clifford, January 2004)

4)백금산, “존 오웬의 생애와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5)존 칼빈, 기독교강요

6)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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