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년 에드워즈는 성자의 신적 아름다움을 환상으로 보았다
상태바
1737년 에드워즈는 성자의 신적 아름다움을 환상으로 보았다
  • 정이철
  • 승인 2018.11.14 11:19
  • 댓글 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드워즈가 1737년 말 타고 숲으로 갔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 그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으로서 신비적인 환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도 이것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나 환상으로 예수님을 볼 수도 있었겠지 ... 하는 무지와 무책임한 자세가 우리 한국교회를 지배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한국교회에서 에드워즈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에드워즈의 그 체험이 정상적인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한 말씀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비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737년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그 일이 무엇이었는냐에 따라 에드워즈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에드워즈가 개인적 종교체험으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음을 직접 보는 환상을 체험했다면, 그는 심각한 이단성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환상은 특별계시 현상에 해당하는 것이고, 특별계시는 성경 66권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특별계시를 내포하는 그 어떤 환상이나, 꿈, 음성 등은 성경 66권 이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통신앙의 기초 상식이고 중요한 뼈대이다. 에드워즈라고 해도 이 진리를 돌파하여 자신만의 신앙 체계를 구축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에드워즈가 그와 같은 위험성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여지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부흥집회에서 이상한 울음과 웃음, 쓰러짐, 몸의 진동, 몸의 마비, 실신과 입신 등의 현상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고, 비록 훗날 <신앙감정론>을 저술하여 많은 교정을 시도했다고 할지라도 대각성 부흥의 현장을 이끌 때에는 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어난 괴상하고 신비적인 현상들을 단순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고 거짓 영들에 의해 벌어진 것들이었다. 만일 에드워즈가 1737년에 경험한 특별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움을 직접 보았던 신비 환상이었다면, 그 모든 일들이 같은 영적인 줄기에서 벌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과연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그 일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움을 직접 경험하는 신비적 환상이었을까? 먼저 올라간 기사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 중에서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지신 분은 에드워즈가 자서전에서 “I had a view”라고 표현한 것이 꼭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표현을 얼마든지 에드워즈가 신앙의 깊은 깨달음에 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그 표현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영어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드워즈 전문 학자일 것이라고 말하며, 영어권의 에드워즈 학자에게 문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추후 Adriaan Neele 교수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보내려고 한다. 지금 Neele 교수는 한국에서 합신과 박사과정 협력 프로그램을 위한 MOU 체결 등의 일정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므로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신앙을 기술한 가장 뛰어난 책들을 기술한 사람은 Ian Murray와 George Marsden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Murray의 책에서는 1737년 에드워즈의 특이한 종교적 체험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영어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고의 에드워즈 전문가인 Marsden이 에드워즈의 그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과연 Marsden은 1737년의 그 사건을 에드워즈가 종교적 체험으로서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기술하였을까? 아니면 성령의 조명으로서 말미암은 말씀을 더욱 더 심원하게 이해하는 은혜를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였을까?

Marsden의 책은 에드워즈의 전체 인생을 순차적으로 요약하고 설명하는 형식이다. 에드워즈의 인생에서 1737년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에 그 이야기가 등장했다. Marsden은 1734-35년의 에드워즈의 1차 부흥이 교인들의 우울증과 자살행렬로 이상하게 끝났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해 3월 주일예배 중 갑자기 예배당이 무너진 사건을 설명하면서, 에드워즈의 교회의 분위기가 부흥이 있기 전의 상태로 급속하게 선회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의 문장이 나온다.

“The return of the town's near blindness to spiritual realities contrasted sharply with the overwhelming clear vision of divine beauty that intensified Edwards' own religious experience.”

(부흥이 일어났던 에드워즈의) 도시가 다시 장님과 같은 영적 수준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은 에드워즈에게 종교적 체험을 더욱 더 강화시켜 준 하나님의 아름다움(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 압도적이고 선명한 환상과 매우 대조되었다.)

“In his "Personal Narrative," provably written about 1740, he described one particularly memorable encounter."

(1740년경에 쓰여진 그의 자서전에서, 에드워즈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 특별한 사건을 설명했다.)

Marsden은 에드워즈의 도시의 분위기가 영적인 장님의 수준으로 다시 떨어졌다고 했는데, 교회라고 하지 않고 마을(도시)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 뉴잉글랜드 상황에서 교회와 교회가 속한 마을은 문화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거의 일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737년에 에드워즈가 말 타고 숲으로 가서 뭔가 특이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기 직전에 Marsden이 한 말을 살펴보면,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그 일은 신비한 환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싶다.

이 문구 바로 다음부터 에드워즈가 말타고 숲으로 가서 뭔가를 체험했다는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다음의 내용은 Marsden의 기록이 아니고 에드워즈 자신이 남긴 내용을 Marsden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Once, as I rid out into the woods for my health, anno 1737”

(1737년 경 하루는 나의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갔었는데)

“and having lit from my horse in retired place, as my manner commonly has been to walk for divine contemplation and prayer; I had a view, that for me was extraordinary, of the glory of the Son of God”

(조용한 곳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평소에 하던 방식대로 묵상과 기도를 위해 걷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나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환상을 보았다.)

“The person of Christ appeared ineffably excellent, with an excellency great enough to swallow up all thought and concept.”

(삼위일체의 그리스도의 위격(또는 인성)이 나에게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고,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사고를 초라하게 만드는 참으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about an hour; which kept me, the bigger part of the time, in a flood tears, and weeping aloud.”

(그 환상은 약 한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눈물이 강을 이루는 가운데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에드워즈 자신이 남긴 그의 특이한 체험에 대한 내용을 도입하는 Marsden의 말 속에는 에드워즈가 특이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Marsden은 에드워즈가 특이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인식하고서 그 사실을 자신의 책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더 자연스럽다.

“the overwhelming clear vision of divine beauty that intensified Edwards' own religious experience”
(에드워즈의 종교적 체험을 더욱 심화시킨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놀랍고 분명한 환상)

Marsden의 이 문구는 에드워즈가 영적인 체험으로서의 환상을 보았음을 전제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또한 Marsden이 1차 부흥 이후 에드워즈의 교회(도시)가 싸우는 등의 모습으로 부흥 당시의 영적인 분위기를 잃고 신속하게 이전의 세속적인 분위기로 회귀하고 있을 때, 반대로 에드워즈에게 특이한 영적인 체험이 일어났다고 Marsden은 기술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에드워즈는 마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의 환상을 보았던 것과 유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장엄하심의 환상을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자의 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아름다움을 직통의 환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에서 수학했고, 현재 미시간의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와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계속 연구한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를 출판하였고,「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바르게 가자 2018-11-20 16:45:09
제 개인적 희망사항을 적어본다면
많은 기록들과 사상의 검증들과 치열한 논쟁들을 통해서 환상논란은 오역으로 결론이 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번역들에 의존한 "현대은사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타협 시도"는 철회함으로 신사도운동들과 함께 세트로 신학적 무력화되고
또한, 반대로 육체의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보다 이해력(지성)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한 에드워즈에게 문제제기된 "이 부분에서는 이단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지점까지 나아간" 것도 철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검증과 논쟁을 통한 오역 여부 확인과는 상관없이 연쇄자살 현상 같은 이상현상들의 출처를 정확하게 파헤쳐서
에드워즈 당시에 퀘이커교도들은 결국 발을 붙이지 못한 1~ 2차 부흥에서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가 동시에 나타난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여부 등을 정밀하게 밝혀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처럼 2018-11-20 12:23:24
저도 바르게 가자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환상’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번역에 있어서 오역이냐 아니냐의 차원을 넘어서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님께서 에드워즈의 환상을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여러가지 근거들을 이미 칼럼에서 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환상’이라는 한 단어의 사용만 가지고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에드워즈의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의 결과를 토대로 유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를 옹호하고자 하시는 분들께선 ‘환상’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먼저 에드워즈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작업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바르게 가자 2018-11-20 10:40:49
Mr. Fair님.
에드워즈의 숲 속 체험이 환상으로 잘못 번역되었다는 가정 아래서 기존의 번역자들이 형성시켜서 가고 있는 종착역이 정이철 목사님이 제기 중에 있는 "현대은사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타협점을 에드워즈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분위기"라면 기존 분들에 의해 시작된 결론이 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시점에서 정이철 목사님의 환상이냐에 대한 문제제기는 돌이키기 어렵게 되기 전에 논의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의 제기라 할 수가 있습니다.

Mr. Fair 2018-11-20 08:24:04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보면 번역의 정확성이나 에드워즈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의 측면에서 볼 때, 에드워즈가 한 말이 ‘환상을 보았다.’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여기에서 확정 짓지 말고 (왜냐하면 동의를 안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니까요) 가정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에드워즈의 1737년 숲 속 체험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환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1) 에드워즈의 숲 속 체험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환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청교도들도 이야기를 많이 했고 존 플라벨 같은 사람도 체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체험을 도를 닦는 사람들처럼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져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체험 이후에 에드워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환상으로 보는 일을 추구하라고 선동한 기록도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한국에 에드워즈를 소개한 분들도 에드워즈의 숲 속 체험을 ‘환상을 보았다’라고 해석을 했다면(이것에 관해서는 인용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위의 원 글을 쓰신 분도 에드워즈의 숲 속 체험을 ‘환상을 보았다”라고 해석을 했다면, 양측 모두 번역상 심각한 오역을 한 것이니 양측 모두 똑같이 잘못한 것입니다.

3) 그런데 잘못된 번역을 기초로 논리를 펼쳐서 양측이 결국 도달한 종착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에 에드워즈를 소개했다고 거론된 분들은 교인들에게 에드워즈의 영적체험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설마 거론된 분들이 교인들에게 환상을 보라고 독려하거나 하나님께서 지금도 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주시니까 그것을 받으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적으로 약한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착점만 생각해 본다면 이 쪽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4) 그런데 원 글을 쓰신 분께서는 에드워즈가 환상을 보았다는 잘못된 번역을 근거로 에드워즈가 특별계시를 인정했고 직접 체험했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연구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단성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잘못된 번역에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에드워즈가 (모든 면에서 잘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이단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지점까지 나아갔습니다. 만일 에드워즈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주장은 형제에 대한 거짓 증거에 해당하는 심각한 일입니다.

5) 에드워즈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게 맞다면, 양측 다 번역을 잘못했다는 데서는 동일한 책임이 있지만, 잘못된 번역을 기초로 해서 나아간 종착점은 어느 쪽이 더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일까요? 팩트를 체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과정과 결과를 놓고 이런 생각도 차분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올바르게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올바르고 세상 정신과는 다른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할 것이니 말입니다.

바울처럼 2018-11-20 03:16:54
나그네님의 댓글을 기대하고 있는데 답변이 없으시네요...ㅠ

구상화는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자하는 도구로써 뉴에이저들의 한 기법인데 반해, 에드워즈의 경우는 자신이 기록한대로라면 목적을 가지고 노력한 것이 아닌 '아주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되기에 구상화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정이철 목사님의 말씀에 100% 동감합니다.
한국에서 에드워즈 연구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서울 인근 경기도의 모 교회 김00 목사 역시 방언을 한다는 말을 지인을 통해 들었습니다.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습니다.
스스로 개혁주의라 일컫는 사람들의 자신을 냉엄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