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신대원 7인 교수들의 이름으로 작성된  ‘정이철 신학 보고서’(이후 ‘보고서’)는 현대의 방언기도를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는 현대 복음주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반대로 정이철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대화(기도)하기 위해 자기 백성의 실제 언어가 아닌 다른 신비한 언어를 이용하신다는 근거가 성경에서, 교회의 역사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방언기도를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로 인정하는 총신 신대원 교수들의 보고서는 같은 입장을 취하는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근거로 제시하였다.

“개혁주의 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 견해를 밝힌 것이다.”

“박영돈 교수는 개혁신학을 매우 깊게 연구하고 ... 변종길 교수는 신약한 분야에서 학문성을 상당히 인정받고 있는 분들인데, 이들은 방언의 본재를 인정한다.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20년 전 신학적 입장을 발표할 때에도 방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날 국내외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개핀의 밑에서 학위를 받은 고신의 박영돈 교수가 증언하는 것처럼, 개핀도 은사중지론을 절대화하지 않고 개혁신학 안에 있는 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다른 견해도 존중하고 있다. 이런 변천도 이해하지 못하고 방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마치 신사도 운동을 지지하거나 오순절 운동주의자들이거나 특별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개혁신학을 심각하게 호도하는 것이다.”

“존 파이퍼 박사는 개혁주의를 평생 설교하고 가르친 분이다. 이 분은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을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 날의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유다서 1장 20절 ‘성령으로 기도하며’를 해석하기를 이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안에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개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퍼거슨, 존 프레임, 바커 같이 은사중지론을 지지하지 않는 신학자들도 여럿 있다 고신의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방언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문론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누구도 방언을 특별계시의 연속성이나 방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총신 신대원 교수들의 정이철 목사의 신학을 비판하는 보고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현대의 방언 은사에는 계시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이철 목사가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며 비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고 총신 신대원 교수들은 주장했다. 그렇다면 먼저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다음의 영상을 보기 바란다.


위 영상에서 조용기가 하는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방언이다. 정이철 목사는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거짓 방언의 정체를 깨닫도록 쉬지 않고 외치고 있다. 혹시 총신 신대원 교수님들도 조용기처럼 하나님의 말을 사람에게 전하는 저런 형태의 방언이 비성경적인 사이비 행각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여, 한 사람이라도 오순절 운동가들의 방언 은사의 거짓됨을 느끼도록 해 주실 의향이 있으실까?

그 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보고서가 조용기 식의 저런 방언을 성령의 방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을 성령의 선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총신 신대원 교수들이 인정하는 현대의 방언기도의 은사의 실제 모습을 다음의 영상에서 볼 수 있다.


위 영상에서도 보게되는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의 근거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더 깊고 신령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기 백성의 일상 언어가 아닌 특별한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게 만드신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찾는다. 정이철 목사의 신학에 대한 보고서에 함께 서명한 이상원 교수도 현대의 방언기도의 근거를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상과 같은 근거들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로 보는 것 보다는 하나님과 신자간의 특별한 소통의 방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이상원 교수, 오순절 성령사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이상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과연 고린도전서 14장은 사람이 하나님께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방언을 가르치고 있을까? 사도행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방언을 고린도전서가 가르치고 있을까? 정말 고전 14장은 신자 개인이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수단으로서의 방언기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명백한 근거는 결코 없다. 이것이 개혁신학을 정립하는데 탁월한 공훈은 세운 학자들의 주된 가르침이다.


기독교 방언의 KEY는 고전 14: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 14:21,22)

방언에 관해 깊은 혼란에 빠진 고린도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사도 바울이 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신약의 방언의 기능 중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선언이었다. 완악한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영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방언 이적으로 선포되었다.

구약의 이사야 시대의 완악한 유대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 군대에 의해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과 저주를 당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다. 복음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은 버려지고, 대신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 백성되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하나님이 외국어 방언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그것은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심판이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생소한 언어를 구사하는 이방인 군대를 보내시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물리적으로 심판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이방인들의 외국어로 복음을 설명하시는 방언 이적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의 복을 받고, 반대로 교만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 영적인 저주와 심판이 임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방언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 구약에서는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생소한 언어를 구사하는 난폭한 외국 군대의 침략으로 집행되었으나,  신약에서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하나님이 친히 이방인들의 외국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시는 방언의 이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바울이 방언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방언의 핵심 기능을 이렇게 설명했으니, 방언에 대한 다른 신학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방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학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외국어 방언이 나타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개인들의 기도하는 신비한 언어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이단현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거짓이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2)

현대의 방언기도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곡해하여,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이 현대의 방언기도를 경험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선민이라 자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유대인들이다.

하나님이 친히 이방인들의 외국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방언은사를 대할 때, 교만에 빠진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고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하나님 백성 삼으셨음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기독교의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심판의 메시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방언은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이방인들의 실제 외국어였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기독교의 방언이 이방인들의 외국어 형식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외국말하는 외국 군대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팜하셨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외국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심으로 완악한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이 중요한 사실이 성립되지 못한다.

초대교회의 저명한 지도자들도 기독교의 방언을 이렇게 이해하고 가르쳤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5-202)는 이전 시대에 있었던 방언에 들은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은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면서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던 성경의 방언은 이미 사라졌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경의 방언에 대하여 가장 많은 가르침을 남긴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계승하여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발판이 된 스승이라고 평가되는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도 고린도전서를 강해할 때,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고 실제 외국어였던 성경의 방언이 사라졌고, 자신의 시대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성경의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교회사적인 증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기독교의 방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종류였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실제 외국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설교하는) 방언뿐이었다.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안에 있는 애매모호한 내용들, 즉 현대의 방언기도의 근거로 악용되고 있는 구절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대의 방언의 직접 조상이 되는 아주사 이단들이 과연 방언기도를 추구했는지, 실제 외국어 방언을 추구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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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