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였던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교부들은 속사도들과 변증가들 그리고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는지를 찾기 위해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문을 열고 자신들만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모든 교부가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진리의 빛을 다 찾은 것은 아니다. 때론 그 길에서 바른길이 아닌 샛길로 걸어간 교부들도 있었다. 하지만 교부들의 신앙은 위대하였고, 그 작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항상 칭송받고 있다.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즉시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다른 교부의 견해에 동의하며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칼빈은 신학의 문제가 제기되고 동역자들 간의 갈등이 일어날 때 항상 이런 자세를 견지했다.

“성경에 호소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에 호소할 것인가?”

칼빈을 모든 종교개혁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런 노력과 수고를 통해 수많은 책과 성경의 강해를 자신의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죽음 앞에서까지 연구하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 자가였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만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교부나 종교개혁자는 없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칼빈의 성경 해석을 빌려 쓰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 시대의 대적자들과 오늘날 현대신학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폄하 받고 있으며 오히려 그의 예정론은 마귀의 작품이라고까지 말하는 자들도 있다. 

최근 한국교회에 광풍처럼 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통한 의의 전가를 주장하였던 일부 신학교 교수들과 여전히 인간에게 선한 의지가 남아 있어 하나님의 율법에 반응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심해야 한다는 회심 준비론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교수들과 목사들의 신학의 자세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그들이 자신의 신학을 위해 사는 자들인지? 아니면 성경을 위해 사는 자들인지 되묻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필자도 과연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라고 믿고 있으며, 정확무오한 성경을 위해 보잘것없는 신학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모두 무엇을 위해 신학을 말하고 계속 공부해야 하는가? 어떤 유명하고 큰 교회를 이룬 목사는 ‘나는 이렇게 신학을 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책에서 마치 자신이 신학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였지만(겸손한 자는 ‘나는 지금도 신학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다) 결국 그는 성적인 중독에 의해 계속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자행하면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몇 년 동안 한국교회가 신학적인 문제로 서로 논쟁하는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하고 가장 어리석은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잘 알지 못하고 타인을 평가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일례로 필자는 프란시스 쉐퍼가 쓴 “이성에서의 도피”라는 책에서 그는 키르케고르가 신앙의 도약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한 것을 인용하여 키르케고르를 아주 비신앙적인 인물로 비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필자는 단 한 번도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 키르케고르의 글을 접하면서 필자의 비판이 몹시 나쁜 짓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도약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가장 뛰어난 신앙인의 모습은 바로 믿음을 가진 자, 그런 자가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독단자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쉐퍼는 그의 신앙을 비판한 것이며, 쉐퍼는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지 않는 방법에 대한 글까지 썼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식은 과연 바른 지식인가?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은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알고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가? 말이다. 

대부분 한국교회 목회자의 수준은 저자의 책을 직접 읽지 않을뿐더러, 읽는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부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을 찾아 읽는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 신학의 함정이 있다. 또한 신학교 교수들의 교수는 참으로 비참하고 참담할 정도로 정치적인 것이 분명하다. 필자가 속해 있는 합동 교단의 신학은 여전히 박형룡 박사의 신학에 머물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 신학을 위해 박형룡 박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신학을 비판하면 안 되는가? 성경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성경을 가장 빛나게 하는 몸종, 즉 시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신학자들이 자신의 신학을 빛나게 하려고 성경을 이용해 먹는 아주 더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시녀는 자신의 여주인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고 수종 들며, 앞길에 걸리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시녀가 자신의 몸만을 위해 여주인을 무시하고, 돌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신학이 성경의 빛을 더 빛나게 해야 하는데 신학이 오히려 성경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학은 당장이라도 버려야 하며 거부해야 한다. 

신학교수와 목사들이 신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선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성경 해석을 설교라고 하지 않고 강하라고 표현하였다. 그 이유는 목사가 준비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또한 자신의 글은“성경 앞에” 서게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강하라고 표현한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장 빛나게 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는가? 교단과 교파를 떠나 모든 목사는 이 질문에 항상 답을 준비해야 한다. 

제롬 잔키우스는 자신이 대학 교수로 취임하는 학교 강단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어떤 것이 어거스틴에게서 더 잘 드러났다면 히에로니무스는 침묵해야 한다. 루터보다 성경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 칼빈에게서 보였다면 루터는 침묵해야 하고 칼빈이 말해야 한다. 나아가 츠빙글리보다 루터가 말한 것이 성경에 더 조화로울 때는 츠빙글리는 루터 앞에서 물러나야 한다.”

잔키우스는 이 취임 연설을 하면서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상과 말이 성경의 권위보다 높아지면 안 되고 종교개혁자들도 자신들의 주장이 마치 완전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항상 이런 신학의 위험성을 견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인지? 묻고, 신중하게 성경에서 신학의 방법과 길을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에서 신학교의 선생들은 너무나 빈약하고 때론 목사들보다 더 못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빈약한 실력은 결국 자신의 인격도 성숙하지 못하여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여 정치 목사들만 쫓아다니는 이리로 전락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교린도 교인들에게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다. 신학교수들과 목사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리만을 위해 가르치고 배우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을 위한 시녀이다.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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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