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지금 방언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상적 신앙인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방언기도와 방언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방언기도의 성경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의 방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변>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이방인으로 간주된다는 새로운 진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표적이 사도행전 시대에 있었다
.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약시대의 초기에 있었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진 후 하나님이 교회에서 거두어 가신 방언의 은사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방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이것에 대해 아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많지 않다.

사도 바울이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미 거짓 사도들이 찾아와서 거짓 복음과 다른 예수와 다른 영을 전파하고 지나간 상태였다.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당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떠난 후 거짓 선생들과 이단들에게 접수되어 버렸다. 사도 바울은 이단들의 가르침에 속아 거짓된 사상을 추총하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사도 바울은 맹렬하게 책망하였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이비 이론들이 횡횡하고 있다.

1) 방언기도는 신비한 은사이다!

2) 방언기도는 그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이다!

3)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비록 우리의 인격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해도 영혼은 큰 유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 뜻을 몰르고 또 무식하고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랄랄랄~ 오오요세 셋노리세 히루빠빠 오롤랄라 엘렐렐레 우알라스데’ ... 하는 소리를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리도전서 1421-22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독교의 정상적 방언에 대해 설명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21).

율법에 기록된 바라는 말은 구약 성경 어디에 나온 말을 사도 바울이 인용한다는 뜻이다.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는 말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의 어디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에게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약 성경 어디에서 그런 말을 하셨는지를 찾아내면, 신약의 방언의 의미와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하나님은 구약 어디에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신약의 사도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 두 가지 방식을 이용하였다. 1) 구약의 말씀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이 있고, 2) 영어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라고 하는 방식, 즉 자기 표현 방식으로 조금 바꾸어서 인용하는 방식이 있다.

이사야 2811절을 보면,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상황이었을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명령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라고 또 말하셨다.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의 뜻을 보이신다는 의미이다. 좋게 말해도 듣지 않으니,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는 사나운 외국 군대를 보내어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그 교만한 백성들에게 집행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그 하나님의 경고, 즉 알지 못하는 외국 말하는 군대를 보내어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된다는 그 말씀은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과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감으로서 성취되었다. 그 무서운 경고를 은유적으로 내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에게서 거짓 방언 사상을 배우고 교회와 신앙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고린도교회의 이단에 물든 신자들에게 방언을 설명하면서, 바로 그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신약의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

2) 신약의 방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멸시하던 사람들의 실제 언어였다는 것.

이 둘을 하나씩 설명해 보자.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말로 회개하라고 전해도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너희에게 말하겠다라고 하신 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는 바벨론 군대를 통해 범죄한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심으로 성취되었다.

이단들에게서 거짓 방언 사상을 배우고서 문제를 일으키는 고린도교회 이단에 물든 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성경의 방언을 설명하면서 바로 그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은 신약의 방언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는 교만한 백성들을 심판하겠다는 경고의 표적이라는 의미이다.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새로운 진리의 기준에 의해 영적인 이방인으로 버려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이방인이라고 멸시받는 육체적인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진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음을 선포하는 표적이 바로 성경의 방언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방언은 육체적인 이방인이라도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새로운 영적 이스라엘)가 되고, 유대인이라도 예수님 믿지 않으면 새로운 기준에 의해 이방인으로 버려진다고 교만한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었다.

실제로 방언이 있는 곳에서는 유대인, 이방인의 전통적 기준이 허물어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지는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 관점으로 사도행전에서 세 번 등장하는 방언 이야기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방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해될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방언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구약의 그 말씀을 통해 신약의 방언도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멸시하던 사람들의 실제 언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좋은 말씀으로 회개를 명하였더도 듣고 순종하지 않는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겠다고 했다. 외국 군대를 통해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경고였고, 기원전 586년에 실제로 이루어졌다.

신약의 방언을 설명할 때 사도 바울의 구약의 그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은 신약의 방언도 역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지 못한 외국인들의 실제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멸시받는 이방인들의 언어로 자기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이방인들의 하나님이 되시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떨었다.

구약에서는 외국어를 말하는 외국 군대의 칼이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었는데, 신약의 이방인들의 언어 표적인 방언은 예수 믿지 않는 교만한 유대인들이 영원히 버려지는 영적인 심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사실 방언기도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있었던 적이 없다. 방언기도라는 말은 고린도전서에서 한번 나오는데, 가만히 보면 당시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이단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기독교에는 단 한 번도 방언기도라는 것이 없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대인 방언을 말하고, 고린도전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 방언을 말한다는 이론은 거짓이다. 고린도전서의 방언 이야기는 거짓 사도들과 다른 복음과 다른 영의 미혹을 받은 고린도교회의 이상한 사이비 방언 사상을 바로잡는 이야기이다.

정통교회의 2천 년 역사에서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칼빈에게 방언기도는 프랑스의 로마교회 신부가 프랑스 말로 기도하지 않고 라틴어로 기도하는 것을 비판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기독교에는 방언기도라는 것이 있었던 적이 없다. 1800년대 말에 미국에서 온갖 종류의 이단들이 급증했고, 그 중의 한 부류가 사도행전의 배운적 없는 이방인들의 언어 방언을 다시 재현하겠다고 난리를 부리다 지금의 방언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들도 그때에는 그것이 실제 외국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외국에 가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할 기회는 없었다. 그들은 죽고 수 십년이 지난 후 외국에 가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선교사들이 나타났으나, 그 결과는 허무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단순한 소리현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단지 그럴싸한 소리 현상일 뿐이었다.

그러면 그때라도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한번 시작된 운동은 멈추지를 못한다. 그들은 이론을 바꾸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신비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고 이론을 바꾸었다. 사실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사도들와 이단들이 와서 거짓 방언을 전파했을 뿐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신비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고 둘러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방언운동이 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주에도 어떤 분이 저에게 방언에 대한 질문을 하셔서 길게 답변했다. 정확한 성경 이해와 해석,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에 기초해서 우리는 신앙 이해와 하나님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신앙 이해와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치면 사이비 거짓 영들의 장난이 더욱 심해진다. 사이비 거짓 영들의 장난의 특징은 99%의 좋은 밥에 1%의 독을 섞는 원리이다. 99%가 독이면 아무도 속지 않는다.

구약의 육신적 유대인, 육신적 이방인 개념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와해되고 새로운 영적인 종족인 교회, 성도, 영적 이스라엘이 탄생되었습니다. 새로운 그 진리를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신약의 초기에 보내신 것이 바로 배운 적이 없는 외국말로 복음을 말하는 방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신약의 초기의 외국말 방언은 하나님께 불순조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교만한 유대인들은 버려지고 그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이방인들이 예수 믿음으로 그 버려지는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었다. 그 진리를 알고 나면, 오늘 날 방언기도에 붙잡혀서 사는 모든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지 한눈에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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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