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의 글 마지막 부분 캡쳐.
고경태 목사의 글 마지막 부분 캡쳐.

 

고경태 목사님께서 올리신 글을 읽고 고무적인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글을 씁니다.

고무적이라는 점은 많은 분들이 율법을 이해할 때 십계명의 문자에 집착하여 행함을 주장하는데, 고 목사님께서는 율법을 전체적으로 보시며 그 핵심은 새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 이웃 사랑으로 전개하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1세기 유대인들이 모세와 그가 받은 율법이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요한복음 5:39절 이하를 통해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율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혹은 율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로 정의 내리지 말자고 하신 것 그리고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만 강조하시면서, "믿음의 내용"에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1)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2) 그 분이 왜 오셨는가, 즉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고 목사님께서는 예수님만 믿으면 형제로 여기며 합력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한다고 다 같은 복음이 아닙니다. 1)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 즉 그리스도의 인격, 2) 그분이 행하신 일을 제대로 믿어야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랑"하신 일입니다. 이 사랑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의 동인은 죄 문제입니다. 대속이 가능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 사랑입니다.

2) 또한 죄인의 질고를 짊어지시고 광야로 멀리 보냄을 받는 아사셀의 염소처럼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행입니다. 한마디로 대속적 삶을 사신 것입니다. 대속적 삶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3) 그렇게 대속의 삶을 사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속을 완성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심은 예수님의 사명인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십자가에서 사랑을 완성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b)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고 하는 말이 성경적 주장이 되려면, 율법이 "사랑하라"는 요구임을 알아야 하고, "사랑하라"는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셨고 그것이 우리의 의다"라고 말한다면, 율법 지킴이 곧 십자가 대속이 됩니다.

그러면 능동순종, 수동순종의 분리는 부당한 것으로 판명납니다. 왜냐하면 능동순종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신 것 그리고 수동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나누고 있는데, 성경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신 것을 대속을 위한 성육신과 대속을 위한 삶과 대속을 위한 죽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조문을 하나씩 다 지키신 분이 아닙니다. 그건 바리새인들의 율법 이해입니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선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두 대상에게 서로 상반된 요구를 합니다.

(1) 죄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2) 죄 있는 자에게는 죄 값인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하셔서 죽음으로 죄값을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자리가 바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공의가 만족되었고, 이를 속죄라고 하며, 속죄가 적용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자를 향하여 법정에서 선언하는 것이 칭의입니다.

고 목사님께서 "율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는 자입니다. 그 사역을 달리 설명하게 되면 다른 복음(이단)이 되고 맙니다.

고 목사님께서 율법에 대한 전개를 잘 해주셨는데, 이 율법 전개를 그리스도와 그 사역인 대속까지 연결시켜서 연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 목사님의 연구와 목회가 늘 주 성령의 은혜 안에서 복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김00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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