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진입니다. 기사가 올라가려면 반드시 사진이 하나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진입니다. 기사가 올라가려면 반드시 사진이 하나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수고하신 합동 신학부 임원님들의 사진을 올립니다. 박의서 목사(총무, 맨 왼쪽), 한종호 목사(부장). 임종구 목사(서기, 왼쪽에서 세번째). 

 

정이철 목사님께서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밝혀내시다가 알미니안이 왜곡시킨 부분까지 밝혀내셨네요. 정 목사님 주장의 요지는, 도르트 회의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분별하고 능동적 순종의 원조 격인 알미니안의 주장들을 배격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분별하고 행동함이 마땅하다는 의견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발전시킨 행위-은혜언약 구도의 언약신학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 말씀과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잉글랜드 회중파는 사실상 행위언약을 모세의 율법과 동일시하였고, 이 자취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남겼는데, 4장 2항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법과 명령을 주셨음을 말했고 7장 2항에서 이를 갈라디아서 3장 12절 말씀을 근거로 행위언약으로 명시했으며, 19장 2항에 아담에게 주신 법과 십계명을 동일시했고 6항에서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을 명시하면서, 사실상 웨신서에서 행위언약을 모세의 율법과 동일시하는 근거를 남기는데 성공했습니다.

능동적 순종 지지자들이 설명하는 행위-은혜언약의 은혜언약 부분도 성경에서 원래 말씀하시고 있는 바와 차이점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확인해봐야 하며, 이점에 염두를 두고 성경 말씀을 비교해 가야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성경 해석의 차이가 아닌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즉 성경을 왜곡한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것과의 차이점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은혜언약의 언약신학이 말하는 구조를 성경은 원래 어떤 구조로 선포하고 있는지 몇 가지 포인트를 통해 그 차이점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우선되는 포인트는 은혜언약으로 대표되는 구절인 창 3:15절 말씀이 정말 언약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의지를 담아 뱀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을 향하여서 해석할 때에야 하나님께서 의지를 담아 반드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선포하시는 선언(declaration)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약속(promise)으로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원래 뱀에게 하신 말씀을 언약(covenant)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계약(contract) 개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담아 선포하신 선언(declaration)은 여자의 씨에서 아브라함의 씨로 계보를 좁히고, 아브라함의 씨에서 다윗의 씨로 계보를 좁혀 실행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지를 담아 선포하신 선언(declaration)은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는 모르시는 이가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시복음으로 알려진 “여자의 씨”를 선포하셨고 후에 아브라함에게 이를 구체화하신 복음을(창 12:2~3; 갈 3:8) 선포하셨고, 이 복음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갈 3:16; 갈 3:14)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창 12:3절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비밀에 가려져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성취하신 이후에야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내용(엡 3:6)이 공개(엡 3:5)된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구체적으로 다윗의 씨로 계보를 좁혀 선포되는데, NIV성경이나 ESV성경 그리고 새번역 성경의 경우에는 다윗의 씨에 대하여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삼하 7장 11절 말씀을 대놓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다(the LORD declare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담아 선포하신 “일방적인(one-sided)” 선포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기 이전부터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이고(one-sided) 지속적으로(창 12:2; 창 12:7; 창 13:15; 창 15:4) 선언하셨고, 이미 언약을 체결(창 15:18; 창 17:11)하시기 이전에 선언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창 15:6)습니다.

이렇게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은 모두 “일방적인(one-sided)” 선언입니다. 이 일방적인 선언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promise) 수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선언(declaration)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promise)입니다. 물론 이 선언과 구별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과 성경이 선포하는 옛 언약 또는 첫 언약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식 단계에서 언약으로 인식하긴 하지만, 복음이 선포됐을 때 실제로 받아들이기는, 이를 믿기 전에 쌍무적 계약(contract) 개념의 언약(covenant)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믿은 후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도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첫 언약 또는 새 언약 같은 계약(contract) 개념 수준의 언약(covenant)을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promise) 수준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일방적이냐(one-sided) 쌍무적이냐(reciprocal) 하는 것은 판단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covenant)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고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하심으로 완성된 복음의 "선언"을, 본질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고, 이어서 살아있는 믿음은(약 2:17) 반드시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약 2:22)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며 영접하여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들었을 때 믿은 자는 이렇게 행위가 따릅니다. 그리고 언약(covenant) 이전의 단계인 일방적으로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promise)을 듣고 믿을 때 이미 ‘의롭게’(롬 10:10) 여기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을 듣고 믿은 자는 이미 하나님께 죄를 간과하심을 받았고(롬 3:25)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롬 3:26)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듣고 믿은 자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의롭다 여겨주시고 믿음 때문에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주시므로 약속 단계에서 약속은 일방적 또는 편무적 약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는 선언하심을 듣고도 믿어지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거부하기 때문에 불신자에게는 믿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선언이 반드시 쌍무적(reciprocal)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declaration)”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됩니다. 칼빈은 생명나무를 성례전적인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예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지개를 상징으로 사용하셨듯이 생명나무도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됨의 상징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잃어버린 백성을 다시 찾으시겠다(눅 19:10)는 “선언(declaration)”을 하신 것일 수 있으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는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근본적인 이유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독생자를 주실만큼 사랑하십니다. 다른 표현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잃어버리신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 회복시키시겠다고 “선언(declaration)”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칼빈의 표현을 따라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 영생과 수많은 특별한 은사를 받았지만, 사단의 미혹으로 반역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생과 수많은 은사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중간지점이지만 여기까지 확인해 본 차이점을 한번 정리하며 넘어갑니다. 행위-은혜언약 언약신학이 말하는 구도를 성경은 원래 어떤 구도로 선포하고 있는지 몇 가지 포인트를 통해 그 차이점을 확인했는데 차이점에 대한 결론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 영생과 수많은 특별한 은사를 받았지만, 사단의 미혹으로 반역하고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생과 수많은 은사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백성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잃어버리신 자기 백성을 다시 찾아 회복시키시려고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일방적(one-sided) 선언(declaration)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듣고 믿은 자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신 것이다”입니다.

계속해서 나머지 절반 내용인 행위-은혜언약의 그 하부 골격(frame)을 성경은 원래 어떤 구조로 선포하고 있는지 몇 가지 포인트를 통해 그 차이점을 확인하는데, 우선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declaration)”과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covenant)”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와 이 선언, 언약과 다르게 모세의 율법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확인하고 넘어갑니다.

먼저, 이 “선언(declaration)”은 여자의 씨이시며 아브라함의 씨이시며 다윗의 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declaration)”이며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선언은 참으로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원시복음으로 불리는 여자의 씨 '선언'과 메시아 복음으로 불리는 다윗의 씨 '선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선언'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선언도 아브라함에게 먼저 전하신(갈 3:8) 복음이며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성취하신 이후에야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비로소 공개된(엡 3:5) 복음이지만, 이 “선언(declaration)”은 믿는 자가 의로 여기심을 “받게”(갈 3:6) 합니다.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covenant)”은 아브라함과 그 씨이신 그리스도께(갈 3:16) 약속하신 것으로 아브라함과 그 씨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는 유업을 상속하시겠다는(골 3:24, 새번역) 것입니다. (홍수 이전 시기까지 포함한 구약의 성도는 명백하게 십자가의 공로를 소급하여 적용 받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이 완성되기 전의 성도는 따로, 주 그리스도께 속한 유업을 논합니다) 신약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들이 유업을 상속받는 자라고 성경은 설명해주고(갈 3:29) 있습니다. 이 유업을 성경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고전 15:50; 고전 15:52)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고전 6:9, 전반부)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바로 완벽한 이방인일 때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았기 때문에(창 15:6; 창 15:9; 창 17:11) 이방인으로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선포(롬 4:11)합니다.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도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유대인으로 인정받으며(롬 2:29; 롬 9:27) 이들이 유대인으로서 믿는 자들(롬 4:12, 새번역)입니다.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받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유업을 상속받는 조건을 충족시켜 줍니다. 즉, 하나님의 선언(declaration)도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covenant)도 “믿음으로” 나에게 유효한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과 모세의 율법을 분명하게 구별하고(갈 3:17) 있습니다. 첫 언약은 성경이 분명하게 모세의 율법이라고 선언했고(히 8:7; 히 9:1) 성경은 이 모세의 율법을 옛 언약(고후 3:14~15)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율법을 다 지켜야만 의로운 자로 인정하기(신 27:26)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따라서 율법으로는 유업도 상속받지 못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할례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이 유업의 약속을 받은 야곱의 후손으로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피를 뿌려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출 24:8)이며, 초대교회 때부터 이방인으로서 믿는 자들은 이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고(행 15:10) 이 형식의 의무자는 더욱 아닙니다(행 15:28). 율법의 정체성은 아시다시피 그림자(히 10:1, 새번역)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것도 심지어 안식일에 대한 것도 그림자(골 2:17, 새번역)입니다.

율법은 죄 아래에 있는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롬 3:19) 목적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속죄의 방식을 드러내려는(롬 3:25) 중요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갈 3:24)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제 주 기능으로 이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으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바로 이방인으로서 야곱의 자손이 아닌 아브라함의 자손 된 자에게는 비록 이 모세의 율법 당사자가 아니며(행 15:10) 이 형식의 의무자는 더욱 아니지만(행 15:28), 칼빈이 설명한 율법의 제3 용도로서 기능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을 완성하신 지금은 몽학선생 또는 초등교사인 율법을 먼저 전해야 합니까 아니면 복음을(요 3:16) 먼저 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먼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눅 16:16) 성경의 방법입니다. 너무 잘 아시듯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확인해봐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순종하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포함하여 율법의 명령과 범주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시는 기준은 성경에 설명되어(요 5:19)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신(마 9:6) 일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요 11:43) 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신 일이지만 율법의 범주는 뛰어넘는 순종이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한 가지 추가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림자인 율법을 따르고(롬 13:9)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실체를 따르신(요 15:9)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마 22:40)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 13:34)의 차이는 그림자인 율법을 따르신 것이냐 실체를 따르신(요 15:9)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율법의 범주 안과 밖을 망라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성하여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신 일"(요 17:4)이고 나머지 하나는 "율법의 정죄 아래에 놓여 있는 죄인들의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하신 것"(고전 7:23) 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내용을 하나로 요약하는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 2:2) 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죄의 값이 지불된 새 언약이 서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죄를 간과하심을 받게(롬 3:25) 하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롬 3:26) 하는, 칼빈이 동일시한 '죄의 사면'과 '칭의'를 얻게 하는 새 언약이 서 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어떤 면에선 진작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이 타락했을 때, 복된 소식(good news)을 전하셨는데 굳이 모세의 율법을 주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어서 십자가 대속을 이루시고 완성하신 복음(요 3:16)을 통해 구원하시면 더 쉽고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굳이 모세의 율법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만, 하나님께서 필요 없는 것을 주셨을 리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의 율법은 헬라인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역할을(롬 3:19, 새번역) 맡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는 역할을(롬 3:19, 개정역) 맡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는데, 심판 기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이루시고 죄인과 의인을 부활시키셔서 심판하시고 마무리를 하시는데, 정죄하는 옛 언약 그리고 죗값을 치르라는 그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고 유업까지 얻게 한 새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법이 있습니다. 그중 최고의 법은 자연도 초월하고 물질과 비물질을 초월하여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3차원과 4차원 이상의 차원도 초월하여 셋째 하늘을 포함한 영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초자연 초차원 초세계에 미치고 있는 법입니다. 그 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입니다. 이 법을 스콜라 학자들의 자연법 수준으로 격하해도 안 되고 모세의 율법을 자연법과 동일시해도 안 됩니다. 물론 영적 존재인 셋째 하늘의 그룹들과 스랍들에게도 미치는 최고의 한 법을 이 땅의 죄 아래에 추락해있는 죄인들에게 적용하는 모세의 율법과 동일시하는 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됩니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표현하면 헌법과 도로교통법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자연법 부분을 바로잡으면서 이 부분도 정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성경이 실제 말씀하시고 있는 것과 행위-은혜언약 구도가 설명하는 것은 지금까지 확인해본 바와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포인트들 하나하나마다 박사 논문들이 수십 개씩 쏟아지길 바랍니다. 그 논문들 수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말과 행동으로 성경대로 믿고자 노력하는 신학도 여러분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 웨신서에도 성경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정말 다른지 성경을 확인해보고 정말로 다르면 성경말씀대로 바로잡는 시도를 하면 됩니다. 장로교파든지 개혁주의 침례교파든지 개혁주의라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를 따른다면 "성경대로"는 바른 개혁의 동기가 됩니다.

사실 성경대로 확인해보고 확인되면 성경대로 바로잡는 것은 감리교파나 성결교파나 순복음교파나 마땅한 일입니다. 우선 정말 성경말씀과 다른 부분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보고 정말로 다른지 확증하는 과정은 피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피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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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