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5 12:48 (금)
이승구 교수, 쯔빙글리의 제일 아쉬운 부분은 성찬관
상태바
이승구 교수, 쯔빙글리의 제일 아쉬운 부분은 성찬관
  • 이승구
  • 승인 2020.02.06 0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째로, 쯔빙글리에게서 제일 안타까운 것이 그의 성찬관이다. 물론 오랫동안 널리 오해된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의 이해에도 칼빈 등이 후에 논의하는 영적 임재설에 해당하는 내용이 암묵리에 들어 있다는 것이 이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고, 쯔빙글리의 표현 방식은 그의 후계자요 동료인 불링거의 표현 보다는 좀 오해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그들의 생애 중에 유일하게 한 번 만났던” 말부르크 회담(the Marburg Colloquy, 1529년 10월 1일-4일)이 별로 좋은 결론 없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불링거와 칼빈이나 베자가 동의한 (그리하여 취리히 합의에 이른) 그런 성찬관이 좀 더 일찍 잘 표현되고 그것이 잘 논의될 수 있었으면 종교 개혁 교회 전체가 하나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잘 발견하고 논의한 바와 같이 쯔빙글리의 의도도 결국 일종의 영적 임재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그가 이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사실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불분명하고 오해하게 하는 표현들과 루터의 너무 강한 공재설적 표현들이 결국 종교개혁의 교회들을 나누고 만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멜랑흐톤이나 불링거와 같은 이들이 이탈리아에서 온 베르미글리와 같이 중요한 위치에서 협의를 할 수 있었다면 좀 더 공고한 종교 개혁 교회의 형성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둘째로, 쯔빙글리가 예배에서 회중 찬송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음악을 잘 알았고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었던 그래서 뛰어난 음악가로도 언급되는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이렇게 음악을 잘 알기에 그 역기능도 생각하면서 예배 가운데서는 이런 것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그는 악기를 예배 중에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근거에서 금했다. 또한 그는 주로 사제들이 노래하는(priestly chanting) 것과 수사들의 성가대(monastic choirs)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성도들의 관심을 참된 영적인 예배로부터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기에서 그것을 대신할 회중 찬송을 잘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초기 종교 개혁기의 취리히의 예배는 우리에게 익숙한 회중 찬송이 있는 예배와 다른, 그러므로 아직 절충기에 있던 예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그 당시 거의 모든 개혁자들과 같이 그도 그 시대에 너무 충실하게 생각하여 교회와 국가를 거의 동일시하는 태도로 논의를 하는 것은 그가 속해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이 선포되면, 통치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하고 좋은 시민이고, 기독교 도시는 바로 기독교회이기 때문이다.”

후에 언급할 안디 존스톤의 표현 같이, “이런 생각은 매우 16세기적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취리히 시 위원회(city council)와 협력적으로 일하였고, 그것이 아주 효과적인 결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국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교회의 회원이기에 그런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쯔빙글리를 비롯한 이들 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곧바로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아주 왜곡된 결과를 낼 수 있다. 그 때와 우리 시대는 처한 정황도 다르고, 목회적 상황이 아주 다르다. 그들은 거의 모든 이들이 외적으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참여하는 기독교권(Christendom)에서 생각하고 표현한 것이고, 우리는 세속 국가 속에서 생각하고 표현해야 한다.

넷째로, 적어도 1522년에는 마리아의 구원 중보직을 강력히 비판하고 그녀를 개인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마리아가 영원히 그 동정녀성을 손상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1525년에도 그대로 나타나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석”에서도 쯔빙글리는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라고 말한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아직도 충분히 종교개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베른에서 한 설교에서 사도신경을 설명하면서 “음부에 내려가시고”의 뜻을 상당히 천주교적 의미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직 참된 믿음을 지킨 사람들과 약속된 구원자를 신뢰하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특정한 장소에 고통 없이 보호하시는데(계 21:4) 그들은 그 동안[즉, 자신들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까지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구원받을 만한 모든 사람들을 그와 함께 하늘로 인도하십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쯔빙글리는 “우리는 이 사실은 누가복음 1:19-26에서 그리고 베드로전서 3:18-22절에서, 그리고 4: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이 구절들에 대한 쯔빙글리의 이해와 설명이 상당히 천주교적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성찬 예배 중에 기도 중에 회중에 무릎을 꿇는 순서가 유지된 것도 같은 점에서 생각해 볼만한 점이다.

다섯째로, 쯔빙글리의 주해에는 상당 부분 상당히 건전한데, 때때로 본문의 정당한 의미를 넘어서 알레고리적 해석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후대에 극복되었고, 또 극복 되어야 하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야곱의 두 부인을 언급하면서, “더 나이든 부인은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어린 여인은 오래도록 불임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유대인들의 회당은 오래도록 ...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기까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매 회당은 불임이 되었고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젊은 교회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이 두 부인을 그리스도의 양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지나친 이상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어떤 것은 말하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인데도 끌어와 사용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하는 구약의 구절로 이사야 7:14과 함께 에스겔 44:2 말씀을 인용하는 데, “이 문을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라;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니라. 그러므로 닫아둘지니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다. 쯔빙글리는 아마도 이 말씀에 근거해서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녀 됨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일종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지나치지는 않지만 그런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아기 그리스도께서 구유에 놓여지심을 설명하면서, “아담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벌겨 벗겨져서 비참하게 되었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온전하게 하려고 궁핍, 추위 그리고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내려진 악을 겪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에서 더 나아가 “그 분은, 하나님을 깨닫지 않으면 짐승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위해서 영적으로 만드는 양식이 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때 우리는 좀 더 많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반영된 인간관은 그것이 너무 강조될 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만일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 인식을 제거한다면 짐승의 삶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데, 그가 하나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는 좀 지나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을 반영하지만 왜곡하여 반영한다는 이해가 좀 더 건전한 것이다.

여섯째로, 이것은 그야말로 아쉬운 것을 언급하는 것인데, 사제라는 용어를 더욱 강력하게 비판하여 그 용어 자체가 없어지게 하지 않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쯔빙글리 자신은 1517년에 교황에게서 받는 (용병의 채플린으로서의) 성직록을 포기하였고, 1521년 11월 21일에는 취리히의 사제직을 사임하고, 이 때부터 시의회가 부여한 새로운 권한으로서 설교자 역할을 계속하였다. 이에 대해서 끄르브와지에는 오히려 콘스탄츠의 주교가 그를 인정하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결별은 파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주교가 더 이상 츠빙글리를 대성당의 주임 사제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바로 그 때 이 지적이고 애국적이며 뛰어난 설교가였던 주임 사제에 애착심을 갖고 있던 취리히 의회는 그 자체의 결의로 그가 원래 선출되었던 그 교구를 관리하도록 그를 고용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최초의 복음적 교역을 창출하는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코 아무도 앞으로 일어날 일의 규모를 짐작하고 있지 못했다."

이렇게 쯔빙글리는 천주교회의 공식적 직임에서 자유롭게 되자, 시 의회와 정부에 의해 교회의 설교자로 계속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소위 “복음주의적(즉, 개신교적) 교구”(evangelical parish)에서 선정되는 “시의 설교자”(city preacher)라고 언급될 수 있는 지는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제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지 않은 듯하다. 1523년에 “목자”라는 소책자를 내면서 사제가 실질적으로 목자, 즉 목회자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1525년에 이미 희생제를 미사에서 드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래서 천주교적 미사를 폐지하고 자국어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매우 강조한 그이다. 그러므로 그가 더 나아가서 ‘사제’라는 용어도 옳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언급해야 하는데 그는 이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는 않은 듯하다. 한 곳에서 사제를 “더 이상 수단도 도구도 아닌 그”라고 하고, 오히려 “설교자”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말씀의 직분”을 부여 받은 자들, “말씀의 종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말씀에 대한 사역”을 하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5:1-3과 관련하여 “기독교 목자의 참 명예”를 말하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제들은 아니다”라고 하기는 한다.

물론 쯔빙글리는 그 당시 “현재 아직 살아 있는 사제들은 평안히 수를 누리게 해야 하지만 그들의 자리는 다시 채우지 말고 그렇게 해서 남는 수입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이것이 쯔빙글리의 모든 것을 급격하게 폭력적으로가 아니라, 질서 있게 하고 평안 가운데서 종교 개혁적으로 이행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그는 무익한 사제직임의 폐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는 교회 안에 또 다른 사제들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 외의 다른 사제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사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영예로운 선포자와 영혼들의 구원의 보호자(guardian)가 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고 하며, “결혼한 사제들,” 또는 “사제 결혼의 정당화”라는 말을 통해서 “사제”라는 이 용어가 계속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도 주고 있다. 이처럼 그에게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제”라는 용어를 폐기하는 논의가 나오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나가는 말

취리히 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개혁하길 원하던 그는 천주교를 지지하는 칸톤들(the Catholic Swiss Cantons)의 군대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한 전쟁에 채플린으로 참여했는데, “베른은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부터 멀리 부대들을 신중하게 묶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취리히 부대들만 불충분한 전투에 임하여 패하고,” 이 카펠(Kappell) 전쟁터에서 쯔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오후에 4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는 자기 편 군사들 중 몇몇이 다수의 적군들에 몰리는 것을 보고 혼전 속에 몸을 던져 그들을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한다. 여러 공격을 당한 그는 빈사 상태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하늘로 향했는데, 운터발트의 한 지휘관에 의해 완전히 목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의 사후,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그의 시체는 불에 태워졌고 그 재를 뿌렸다고 한다.

위에서 우리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된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개혁파 교회의 시발자(progenitor)라고 할 수 있는 쯔빙글리가 한 기여들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 혹시 그에게서 아쉬운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았다. 한 사람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어서 우리들에게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고, 이 여러 개혁자들이 각기 기여를 하여 우리에게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잘 제시해 준 것이다.

우리들은 쯔빙글리에게서도 배우고 또 다른 개혁자들에게서도 배우고, 그리하여 가장 성경적인 교회를 이 땅 가운데서 구현하려고 노력할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이 그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듯이, 진정한 교회사는 그 어떤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는 각각의 개혁자들에게서 각기 독특한 점들을 배울 수 있고, 그들을 잘 조화시키며 결국은 성경에 비추어서 그들의 문제점도 말할 수 있고, 이제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 말씀을 잘 배워서 이 땅 가운데 가장 성경에 충실한 교회를 눈에 보이는 형태도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스위스에서 이런 일을 제일 처음 시작한 쯔빙글리에게서 우리는 다음 같은 점을 잘 배우면서, 우리도 그런 일을 더 성경적으로 하여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자국어 예배의 시도와 관련하여,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신자들이 잘 이해하고,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온전히 성취된 구속 사건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구속에 참으로 감사하여 예배 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미 16세기에 자국어 예배가 시작되어 계속해서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예배하지만,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그 의미에 충실하지 않은 예배라면 그것이 심각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2) 성경에 대한 연속적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 방식의 부활과 관련하여, 우리들도 다시 고대 교회의 그 전통과 종교 개혁의 이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 전통을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런 방식을 예배하는 일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앤디 존스톤도 이 방법이 설교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방법 가운데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일을 강하게 요청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성경 본문 외의 신구약 성경을 매우 상당 부분 연속해서 읽는 순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주일 아침 설교에서도 연속적 강해의 방식으로 설교하는 일이 좀더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수용되어져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연속적 강해는 주일 저녁이나 수요 기도회나, 새벽 기도회에서 설교하는 방식이 되어서 주일 아침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이상한 의식이 형상되었다. 부디 그런 잘못된 고정 관념이 깨어지고 우리 모두가 성경을 중심에 두고 둘러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해석 공동체가 되어, 말씀을 배우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모든 것이 형성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3)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쯔빙글리의 구별과 관련하여, 우리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무엇을 더하면서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온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나 다른 인간적 규례들을 따르는 것은 결국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진리의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성경의 사람들은 (a) 성경을 늘 배우려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b)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가장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늘 배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거짓 종교를 가진 사람들인 것임을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된 종교로 돌이켜야만 한다.

(4) 취리히 예배당들에서의 상(像) 파괴와 관련하여, 우리들도 우리의 마음에 있는 거짓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파괴하고 진멸하며,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 오직 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나기지 않는 모든 것을 괴멸시켜 나가는 일에 최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할 때 우리는 개혁파 운동을 최초로 취리히 시에서 일어나도록 한 쯔빙글리를 잘 따라 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쯔빙글리가 말한 참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말하고, 십자가와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거짓 종교를 드러내고 있는가? 이것이 이전 시대의 개혁파 선배들이 늘 묻던 질문이기도 한다. “개혁파인가 아닌가?(To be or Not to be Reformed).

그러나 진정으로 개혁을 하는 사람들은 인내를 가지고 조절을 해 나가야 한다. 사순절에 소시지 먹는 문제에 대한 쯔빙글리의 대답도 그것은 자유이지만 또한 질서를 지키는 방식으로 그 자유를 드러낼 것을 요구하였듯이, 바르트부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 온 루터도 1522년 3월에 미사는 “반드시 없애야할 악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 누구도 강제로 억압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방식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츠빙글리가 잘 제시한 방향을 따라가되, 그보다 더 온전한 성경적 기독교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모든 정황 가운데서 우리들은 “주께서 그의 교회를 보호하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