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칼럼 > 고경태
고경태 목사, 황준호 블러그(19.5.2)의 ‘준비론 ...’에 대한 단상
고경태  |  ktyhbg@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5.03  01:05:1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황준호의 블러그 2019년 0502에서 소개한 “준비론? 죄의 각성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율법이 신자에게 필요한가? 회개가 믿음에 앞서 필요한가?”에 대한 단상이다.  나는 왜 황준호의 블러그의 글에 대한 단상(斷想)을 소개하는가? 황준호 씨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준호 씨의 이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목사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몇 신학 저술을 번역한 번역자로 알고 있다.

첫째, 황준호의 “준비론? 죄의 각성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율법이 신자에게 필요한가? 회개가 믿음에 앞서 필요한가?”는 제목에서 제시한 의문에 대한 답변이 없는 글이다. 제목에서 이것에 대해서 명료하게 답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제시한 의문에 대해서 잘 파악하기 어렵다. 주요한 답은 피셔의 자신이 번역한 <개혁 신학의 정수>에 잘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 신학의 정수>는 한 의견의 글이 아니고 두 의견의 글일 것인데, 그렇다면 <개혁신학의 정수>가 복음과 율법 관계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좋겠다.

둘째, 황준호는 “건강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마 9:12)을 근거로 자신이 죄인인줄을 알아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이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안다”에 많은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떻게 아는가?”, “내가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해서 제시하는 것이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선포된 복음에 근거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안다. 즉 복음의 부요한 은혜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셋째, 황준호는 ‘참됨’의 분별 점을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스도께 나가 구한다면 죄의 각성이 얼마나 있든 참 신자라고 했다. “그리스도께 나가 자비, 능력, 의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지식을 어디에서 얻느냐? 고 질문하겠다. 그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 하신다(마 6:33). 그런데 그 구함은 최고 수준이지 기초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최고 수준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겠는가? 주의 자비와 능력, 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어떤 죄가 있을까? 황준호는 죄의 비참함이 크면 클수록 자비가 크다는 바울의 말을(롬 5:20) 왜곡하고 있을 수 있다. 로마서 6장에 죄에 대해서 죽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한다. 주의 자비와 능력과 의를 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얻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빌 4:13).

불신자는 구주께 구할 지식이 없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한다. 즉 불신자나 신자는 자력으로 죄의 비참함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죄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죄의 비참함에서 구원된 뒤인데, 죄의 비참함에서 구원받은 뒤에는 죄에 대해서 죽어 구원한 구주를 믿고 고백하는 일을 한다.
 

   
 황준호의 브러그 글 캡쳐 사진


넷째, 황준호가 ‘복음을 강조하고 율법을 쓸모없는 것’으로 상대를 이해한 것은 착각이다. 복음을 강조하면서 율법을 쓸모없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율법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참)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복음과 율법 관계는 16세기부터 끊임없이 연구되는 분야이다. 그런데 황준호는 율법의 '제3용법'만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며, 위선자를 양산한다고 우려를 표현했는데, 종교개혁파의 후예들이 위선자라고 완곡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준호는 성화를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는 것, 자신의 의로움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상당히 우려스러운 것은 그의 주된 목표가 ‘죄의 실체를 더 깊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황준호의 구도는 “죄의 실체를 깊이 알아야 그리스도께 더 의존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죄인식이 선행하고,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것이 후행한다.

우리는 앞에서 지적했다. “어떻게 내가 비참한 죄인인 것을 알 수 있는가?” 황준호의 구도라면 목사가 강단에서 비참한 죄인임을 선포해서 인지시켜는 구도가 될 것이다. 황준호에게 성화의 동력이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 된다. 필자도 성화, 거룩의 증진을 위해서 힘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도식인 ‘나의 주와 구주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복음선포에 의해서 수납된 복음문장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 보일 때 은혜가 있고, 나의 삶의 무거운 짐이 보이면, 주의 권고를 따라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주님을 부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황준호 씨가 ‘회개’를 구원의 서정에 가장 앞에 두는 것도 문제가 있다. “죄를 아는 것에 자라야 한다”는 표현도 문제가 있다. 마지막 황준호는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나가고 구하는 것까지 말하는데, 믿어야 한다는 표현이 없다. 예수는 믿음의 주이시다. 그래서 신자는 죄가 아닌 예수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고경태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Minn 2019-05-03 09:45:46

    칼빈의 기독교강요 3-4-2에 의하면 이분의 주장은 가톨릭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스콜라 교리는 ...특별히 죄 용서의 일보가 통회라고 하면서, 충분한 통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과연 어느 누가 자신이 통회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힘닿는 데까지 하면 된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안심하기 위하여 억지로 슬퍼하며 눈물을 짜낼 수밖에 없다."
    또 성령의 사역으로만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발적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가 됩니다.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를 빌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힘이고 (다윗의 밧세바와 인구조사 사건), 진정한 신앙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마 16:16-17).
    구원에 서정에 관해서는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시간적으로 중생을 회심 전에 일어나거나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회심준비론이 개혁주의와는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독교강요 3-3-4에서 칼빈은 두가지 회개를 말하는데 하나는 율법의 회개와 복음의 회개입니다. 성도는 복음의 회개를 합니다.신고 | 수정 | 삭제

    • 김리훈 2019-05-03 03:20:04

      Strongly agreed !!!신고 | 수정 | 삭제

      바른믿음
      최근 3개월 동안의 중요 기사 10
      후원방법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USA)
      대표(발행,편집):정이철(734 678 7133, cantoncrc@gmail.com)  |  편집자문: 정태윤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이철
      Copyright © 2019 바른믿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