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를 강조하는 분들에게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조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능동순종 교리를 고집하는 분들은 다시 율법을 신앙의 중심으로 끌고 들어온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는데, 능동순종 가르치는 사람들의 복음은 다르다. 대표적인 능동순종 기독교 전도자 코르넬리스 프롱크 교수의 책을 보자. 
 


“오직 율법에 완벽히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행위언약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9)

“죄인은 자신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 죄인에게 전가됩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3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68)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떻게 회개가 일어납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고, 우리는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입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64)

능동순종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이다. 율법 못 지켜 죽은 인간을 메시야가 대신 율법지켜서 살렸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인간은 율법 잘 지키는 착한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에게 저주받은 갈라디아의 이단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능동순종이다. 유대교와 로마교회의 율법주의 종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합동신학교대학원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김병훈 교수가 <기독교개혁신보>에 기고한 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8장 5항)”을 계속 살펴보자. 김병훈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도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얻은 의와 영생의 권리를 전가함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자격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순종으로 얻으신 율법의 의와 영생의 권리가(를) 죄인들에게 전가하여 주시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 두는 일입니다. 죄인들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죄인들을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을 하시어 율법의 의를 이루심으로써 영생의 권리를 획득하시고, 그 권리를 행사하십니다.” (김병훈 교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제기해 보자! 메시야는 왜 율법준수해야 했을까? 김병훈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속성에 따라서 율법을 범한 죄인들의 죗값을 요구하시는 작정을 행하시며” (김병훈 교수)

김병훈 교수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떨어진 아담과 그 후손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그리스도가 수동순종, 즉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리고 죽으셨다면서 김 교수는 능동순종의 이유를 말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 인간의 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김병훈 교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 교리의 핵심은 이렇다. 

1)능동적 순종 : 죄인이 하나님 백성 되기 위한 자격, 권리 획득
2)
수동적 순종 : 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형벌 감당


또 다른 기초적인 질문을 제기하여 보자! 아담은 언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서 저주받았는가?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고 주장되는 성경의 근거는 이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1-6)

여기의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가 율법이었다고 한다. 불완전 상태로 창조된 아담이 완전한 생명을 가지기 위해 지키라고 요구된 율법이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영생을 취하기 위해 지켰어야 할 율법이라고 하기에는 허술하고 부실하다. 그래서 능동순종 파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더 정교하고 방대한 율법체계가 더 있었닫고 한다. 선악과는 전체 율법체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창조시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다른 방대하고 정교한 율법체계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에 율법들을 심어주셨다고 그들은 추론한다. 코르넬리스 프롱크의 말을 보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율법이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프롱크, 257)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율법은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아담은 율법을 바라볼 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사랑했습니다.” (프롱크, 262)


한 가지 심각한 의문이 떠오른다. 인간을 불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시어 향후 인간의 율법준수의 여부에 의해 완전한 생명을 스스로 취하거나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상황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과연 다음과 같이 기뻐하실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27-31)

아담이 완전한 생명을 스스로 획득하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을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에 심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내 눈에는 안 보인다. 선악과 명령을 아담의 마음에 심어준 율법체계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황당한 사색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역사 속에서 율법이 등장한 시기에 대해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요 1:17)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 7:19)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갈 3:17)

사도 바울은 아담이 죄를 범할 때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3)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 3:19)

정통 개혁신학의 기초를 제시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율법이 창조시에 주어지지 않았고, 죄가 들어온 후 타락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개되면 들어왔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 (기독교강요, 1.7.1.)

완전하지 못한 생명으로 지어진 아담이 자신의 마음에 심겨진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완전한 생명을 얻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 즉 행위언약 사상은 성경 자체의 증거와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도 맞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 노력하여 영생을 얻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가 영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김병훈 교수를 비롯한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기독교를 아직 모른다.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영혼의 구원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믿음에서 나온다. 예수를 믿으나 믿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고 믿어도 구원을 얻을까? 아담이 받은 적이 없는 율법들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를 받았다는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하실까? 메시야가 아담 대신 율법준수하여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권리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믿음을 하나님이 받으실까? 김병훈 교수와 능동순종 주장자들의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한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으므로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염려는 비성경적인 기우일까?
 

어떻게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성경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첫째, 율법은 이미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떨어진 인간의 상태를 깨우치기 위하여 왔다. 율법이 와서 죄에 떨어진 인간의 알게 하였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3)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5)

둘째, 율법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셋째, 율법을 인간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를 그리스도가 대신 받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얻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9)
 

김병훈 교수는 먼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돌아와야 한다. 불완전한 아담이 영생을 위한 율법준수에 실패하여 오히려 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우스꽝스러운 해석으로는 구원얻는 '예수 믿음'이 될 수 없다. 피조물로서 과분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라까지 넘본 교만과 반역으로 아담의 원죄를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구원을 주는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창조주는 자기를 섬기는 백성을 가지시기를 원하셨다. 흙으로 아담을 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아담을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으로 삼으셨다. 창조주는 아담에게 모든 자유와 행복을 주시며 오직 ‘하나님 섬김’에서 벗어나지 않기만을 명하셨고,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 섬김에서 벗어나려고 마음을 결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에 만족하지 않았다. 뱀이 자기의 욕망을 자극하므로 뱀의 말을 즐거이 수용하여 하나님 섬김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처럼 되는 길을 구하였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뜻을 명확하게 실행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실천되었으므로 창조주는 배반자를 저주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죽이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려서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두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죄인들 속에서는 구원의 방법이 나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친히 죗값을 치르시는 방식, 성육신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육신을 준비하는 제사, 율법을 보내시어 죄인들이 정죄 아래 가두어 메시야를 고대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율법 아래 나시어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시었다.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흠 없고 완전한 자기의 생명과 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심으로 구약의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시었다. 그리스도가 피가 죄인의 죗값을 완전하게 배상하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김병훈 교수는 사변을 철회하고 이러한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신앙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고, 성경의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이나, 정통 개혁신학 서철원 박사 같은 분들은 원죄와 율법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1.4)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기독교강요, 2.1.4)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기독교강요, 2.7.2.)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 (기독교강요, 1.7.1.)

 


"첫 인류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므로 곧 하나님의 섬을 거부하므로 죄인이 되어 생존권을 박탈당하여 죽게되었다 (창 2:17).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지킴 곧 순종히므로 생존권이 허락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이후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로는 결코 생존권인 의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수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율법의 속박에서 백성들을 해방하셨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므로 율법을 다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속박에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마 5:17,18, 11:28-30).

이렇게 하여 율법준수의 요구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율법준수의 속박에서 백성들을 해방하신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율법준수의 의무를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벗기셨다. 전통신학에서 예수의 율법준수를 능동적 순종(oboedientia activa),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이라고 한 구분과 가르침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한 것이 아니고 피 흘려 죗값을 다 치르시므로 죄 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이다. 이 의를 우리가 받아 영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 까지 순종하여(빌2:8) 속죄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법이 정한대로 죗값을 갚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롬6:23; 창2:17).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죗값을 다 지불하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주 예수는 율법성취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하여 저주 아래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서철원,「교의신학전집 4: 그리스도론」, 1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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