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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 에드워즈의 아버지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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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3  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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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Adriaan Neele 교수의 수업 중 셀카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 1669-1758) 목사이다. 디모데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자신의 아들 때문에 명성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그 시대의 뉴 잉글랜드의 교회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뛰어난 목회자였다. 훗날 에드워즈는 1734년 경에 했던 설교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탁월한 목회자였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

“노스햄프턴을 제외하고 뉴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은혜를 경험했던 곳은 나의 아버지가 목회했던 곳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목회하는 곳에 4-5 차례의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다.”

디모데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디모데 목사의 어린 시절은 그리 밝고 행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던 1667년 그 해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669년에 태어났고, 이후 어머니는 또 다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는 좋을 수 없었고, 가정의 분위기도 안정되지 못했다. 디모데의 아버지, 즉 조나단 에드워즈의 할아버지는 신앙과 인격과 삶에서 매우 모범적인 분이었고, 장남인 디모데와 다른 7명의 자녀들의 신앙에 좋은 스승이 되었다. 또한 사업에도 성공하였으므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힘을 다해 후원하였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디모데는 1687년에 하바드 대학에 입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688년에 그의 아버지는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소송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이혼 소송이 법정에서 받아드려지지 않자 디모데는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부정한 행동과 그릇된 가정생활에 대해 증언해야만 했다. 그의 나이 22세 되던 해인 1691년에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다른 신실한 여성과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는 더 낳았다.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첫 아들의 이름이 조나단이었는데 그는 일찍 사망하였다. 그래서 디모데는 훗날 자신의 유일한 아들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었다.2)

재미있는 사실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 다니엘 에드워즈(Daniel Edwards)가 나중에 예일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디모데의 아들 에드워즈도 노스햄프턴교회의 부목사 청빙을 받기 전, 1723-1726년 동안 예일 대학의 교수였다. 당시 예일 대학은 이단사상 문제로 사임한 전임 총장의 뒤를 잇는 새로운 총장을 찾지 못한 상태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조난단 에드워즈와 다니엘 에드워즈 둘 뿐이었다. 잠시 동안 외삼촌과 조카 두 사람이 예일대학을 이끌었던 것이다.3)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가 하버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정확하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학교에 머물면서 공부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손자 스리노 드와이트 에드워즈(Sereno Edwards Dwight, 1773-1870)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디모데는 1691년에 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졸업했다.4) 그러나 다른 에드워즈 연구자들과 전기 작가들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이것은 디모데가 1688년에 학교로부터 정학 처분을 당한 적이 있고, 이후 언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하바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장차 아내가 되어 에드워즈를 낳을 여성 에스더 스토다드(Esther Stoddard, 1673-1770)를 만났다. 에스더의 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는 1669년부터 하바드 대학에서 약 160 Km 정도 떨어진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디모데 목사는 스토다드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스토다드의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은 대단했다.

스토다드는 그쪽 지역에서 대단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때로 그를 비꼬는 사람들로부터 '코넥티컷 계곡의 교황'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당시에 스토다드가 출판한 23 종류의 책들이 사람들에게 활발하게 읽혀지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1년이 지난 1740년에 영국에서 활동하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미국을 방문하여 조나단 에드워즈 집에서 잠시 머물며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설교할 때, 스토다드의 탁월한 설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5)


아버지 디모데가 에드워즈에게 물려준 유산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가 아들에게 물려준 탁월한 영적 유산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디모데 목사는 에드워즈가 탁월한 학문적 지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충실하게 훈련시켰다. 디모데는 에드워즈가 탁월한 지성을 연마할 수 있도록 그릇을 준비시켜 주었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학자인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Adriaan Neele교수는 에드워즈가 생전에 남긴 모든 저술들이 다음과 같다고 소개하였다.

“1,200 개의 설교, 235개의 편지, 20개의 논문들과 에세이, 25개의 작은 기록물들(notebooks), 1,400개의 각종의 메모지들, 5.5M 높이의 원고더미.”6)

에드워즈가 생전에 이렇게 많은 저술과 기록들을 남긴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구약 히브리어, 신약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에 능통했는데, 그것은 모두 아버지의 자녀 교육에 대한 지극한 열정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각종의 언어들과 글을 쓰는 훈련에 열중하도록 힘을 다해 강조하고 교육했다. 그 당시 미국에 관한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분쟁이 일어났을 때, 에드워즈의 아버지는 군목으로 징집되어 아내와 자녀들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집을 떠나 군목으로 활동할 때(1711년)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계속 글을 쓰게하고, 내가 집이 있었을 때보다 더 열심히 글을 쓰도록 이끌어 주시오!”7)

둘째, 디모데는 아들에게 올바른 신학과 설교를 심어주었다. 디모데는 비록 자신의 장인이지만, 스토다드가 주장하는 성찬과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파괴하는 ‘중도언약’ 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디모데는 성찬 문제에 관해서는 장인과 매우 사이가 나쁜 사람들의 입장을 지지했다.8) 또한 디모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하였다. 그는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을 얻기에 합당하기 않다고 강조했다.9) 훗날 에드워즈의 설교와 목회에서 디모데에게서 배운 칼빈주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셋째, 디모데 목사는 아들에게 거룩한 성령의 부흥이 무엇인지 미리 맛보고 경험하게 만들어 주었다.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는 에드워즈가 태어난 코넥티컷 주의 East Windsor의 한 교회에서 자그마치 63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신실하게 목회하였던 사람이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가 자녀들에게 매우 안정적인 신앙 교육을 제공했다는 것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고, 또한 그가 매우 안정되게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귀한 목회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훗날 조나단 에드워즈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가 일생동안 목회하는 곳에서 적어도 4-5 차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1715-1716년, 에드워즈가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몇 해 전에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의 신자들 가운데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아버지의 목회 활동을 통해 일어난 이 당시의 부흥을 직접 목격하였고, 훗날 자신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Personal Narrative>라고 부르게 되는 글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몇 해 전,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놀라운 영적각성이 일어났다. 이 일은 이후 수개월 동안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신앙과 나의 영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한적한 곳에 기도의 움막을 만들었다.”10)

그 당시 하나님의 부흥의 수단이 되고 있는 디모데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East Windsor를 찾아왔던 스티븐 윌리엄스(Steven Williams) 목사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부흥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남겼다.

“놀라운 영적 각성이 East Windsor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리고 자신이 66년 동안 섬기고 있는 목회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11)

디모데는 25세 되던 해인 1694년에 에드워즈가 태어난 코넥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East Windsor)의 회중교회 ‘윈저 제2교회’(the Second Church of Windsor)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62년 동안 그 교회를 섬겼다.12) 그는 은퇴하고 2년이 지난 175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바로 그해 3월에 에드워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디모데의 나이는 88세였고 에드워즈의 나이는 54세였다. 디모데가 아들 에드워즈의 죽음을 보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에드워즈가 1726년부터 24년 동안 목회하면서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던 바로 그 교회의 신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쫓겨나는 과정을 다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부흥을 이끌고 있을 때 아버지 디모데 목사도 여전히 코넥티컷 주의 Windsor의 그 교회에서 충실하게 목회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회하였던 두 교회의 사이는 약 50Km 정도의 거리이고, 요즘 자동차로 달리면 약 40분 정도의 거리이다. 디모데와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곳이 멀지 않았고, 디모데가 은퇴 직전까지 목회사역을 건강하게 잘 감당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이끌었던 대각성 운동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성찬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750년에 결국 아들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교회 교인들의 신임투표에서 230:23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해임되었을 때, 디모데는 아직 건강하게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중이었다.12)

 

--- 각주 ---

1)Jeorge M. Marsda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 25.
2)앞의 책, p. 24.
3)앞의 책, p. 171.
4)Iain H. Murrey, Jonathan Edward: A New Biography (Carlisle, PN: The Benner of Truth Trust, 1996), p. 5.
5)앞의 글.
6)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Adriaan Neele 교수가 자신의 수업 “Historical Figures and Thought: Jonathan Edwards”(2018년 5월 22일)엑서 학생들에게 프리잰테이션 한 내용.
7)Iain H. Murrey, p. 14.
8)Jeorge M. Marsdan, p. 32.
9)앞의 책, pp.26-27.
10)Iain H. Murrey, p. 14.
11)앞의 책, p. 21.
12)A Chronology of Edwards' Life and Writing, compiled by Kenneth P. Minkema.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onary의 Adriaan Neele 교수의 수업 자료.
13)정부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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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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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세계 2018-05-24 12:43:57

    조나단 에드워즈가 남긴 유산 중 으뜸은 단연 "칭의론"입니다. 칭의론을 정확히 정립하여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구원론이 보존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설교의 황태자가 찰스 스펄전이라면 설교의 황제는 단연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또한 역사가 낳은 최고의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위대한 설교자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이젠 교회에서 그 누구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정통적 칭의론, 즉 오직 예수님의 유화사역에 근거한 믿음을 강조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목사들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이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지요. 세례식할 때나 한번씩 얘기 꺼내든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나 한번씩 증거할 뿐 절대 칭의론을 교회의 존립의 근거로, 믿음의 본질로서 귀중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에드워즈식 칭의론을 핵으로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면 목사의 경우 쫓겨나는 것을 각오해야 하며, 신자들과 갈등을 감수해야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귀중하고 좋은, 교리 중의 교리인 칭의론을 생명처럼 여기면 왜 목사생활 더 하지 못할까요...

    이 칭의론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인 중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고 싶어하지 않지요. 값을 치루고 우리를 의의 종으로 삼았다는 진리를 가르치면, 다들 거부합니다. 모든 교인들은 죄의 종으로 계속 살길 원하거든요.

    교회 상황이 되게 웃기죠? 실제로 그렇습니다. 심지어 개혁주의 칭의론을 추구한다는 개혁주의 교회에 가도 상황은 크게 안 다릅니다. 설교만 성경적일 뿐 교인들의 생활은 마귀처럼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가 쉽게 타락하도록 방임하시는지 난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교회들이 작은 계명을 우습게 보다보니 완전 다 타락하도록 그냥 버려둔 것 같기도 하고요...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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