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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의 주장은 은사주의를 부르는 위험한 사상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3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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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3  14: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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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열굴> 저자,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학과장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계속 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읽을 수록 마음의 근심과 분노가 짙어진다. 박영돈 교수의 정체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이단들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사나운 적군에 편에 서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안심하고 서로 믿고 함께 힘을 합하여 성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우군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내부에서 슬그머니 성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사람주는 사람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박영돈 교수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3장은 현대의 치유사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3장에서의 그의 이야기의 주된 소제가 되는 사람은 신사도 운동권에 권에 속한 치유사역자이며 온누리교회의 장로인 손기철 장로이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의 선구자이고 손기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미국의 이단 존 윔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런데 박영돈의 글에서 존 윔버나 손기철이 전혀 이단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탁월한 신유의 은사가 있었다고 알려진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윔버(John Wimber)도 자신의 치유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해 준 이들 중에서 25 퍼센트만이 완치되었다고 했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28 페이지)

빈야드 운동이 이단 운동이라는 것은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박영돈 교수 자신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 윔버가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이니 당연히 존 윔버는 이단이다. 이것과 다르게 말하면 말장난이다. 그런데 박영돈 교수의 존 윔버를 통하여 나타난 치유이적에 대한 언급 속에서 존 윔버를 이단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마치 존 윔버가 치유사역을 할 때에는 성령이 함께 하셨던 것 같이 말한다. 이단을 이단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을 개혁주의 신학교의 교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 박영돈 교수가 왜 이런 분위기로 나가는 것일까? 빈야드 운동의 거짓된 영성과 자신의 신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박영돈 교수의 손기철 장로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손기철 장로의 책을 보면 그는 존 윔버, 헌터 부부 등의 신사도 운동가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신사도 운동의 사도이고 예언자인 릭 조이너에게서 두 번이나 기도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독자들이 이것을 거론하자 손기철 장로는 나중에 이 부분을 지웠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글 어디에서도 손기철 장로를 이단으로 보는 시각을 느낄 수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손기철의 집회에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가 손기철 장로의 성령운동과 치유사역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조금 과하고 지나치다”, “이해가 안되는 모습들이 있었다”라는 정도이다. 오히려 박영돈 교수의 아내는 손기철 장로의 집회 분위기에서 감동을 받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손기철 장로가 휴대폰으로도 치유기도를 해 준다고 하니 얼른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여 전화로 손기철 장로의 기도를 받으라 권했다고도 했다.

“마지막에는 손 장로가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아는 사람 중에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전화를 걸게하여 휴대폰으로 치유를 위한 기도를 받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엔가 황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필자는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통해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아내는 필자보다 눈치가 빨라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 재빨리 허리와 잇몸이 아파 고생하시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치유기도를 받으시라고 권했다 ... 난생처음 참으로 희안한 일을 목격하였다.”(92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휴대폰 치유기도를 있을 수 없는 이단적인 일로 판단했다는 것인지 ... 뭐가 뭔지 모르다가 나중에 손기철이 휴대폰으로도 치유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인지 ... 분명하지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적어도 두 번 참석했으나 손기철 장로를 이단이라는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문제점(?)들이 좀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문제점은 우리 모두에게 다 있다.

손기철 장로의 문제의 핵심은 이단성인데, 박영돈 교수가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답게 한국교회가 다 경계하고 있는 손기철 장로의 성령운동과 치유운동에 대해 날카롭고 분명한 신학적인 견해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은 이 책의 독자들과 한국교회에 심각한 혼란을 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에 기대를 가졌던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유형의 치유 사역자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치유사역자들이 대체로 몰상식하고 무례하며 위압적인데 반해 그는 매우 신사적이고 부드럽고 겸허해 보인다.”(93 페이지)

과거의 이단들이 저학력자들이고 깡패 출신이거나 욕쟁이들이들이었던 것에 반해 요즘 이단들은 해외 유학, 의사, 교수 등의 전문직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추세를 박영돈 교수는 몰랐던 모양이다. 박영돈 교수는 아마 서울대 출신이고 하바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세련되고 다정다감한 이용규 선교사를 보면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릴 것 같다.

“그의(손기철) 책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치유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과 사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전달된다. 그는 모 교회(온누리교회를 의미)의 장로로서 건전한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93 페이지)

이단을 미화해도 이렇게 미화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이렇게 말했다면 박영돈 교수는 이단옹호자이다. 손기철 장로의 집회를 두 번이나 직접 경험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보고서도 이렇게 말했으니 박영돈 교수는 정말 분별력이 없는 분이다. 대부분의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손기철 장로의 책 몇 권을 읽으면 곧 바로 그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님이신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아마 고신의 다른 교수님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박영돈은 손기철 장로를 배출한 온누리교회를 건전한 교회라고 했다. 어떻게 온누리교회가 건전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일까? 온누리교회를 설립한 하용조 목사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것을 가장 빨리 도입하면서 한국교회를 병들게하는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었다. 하용조 목사는 김기동의 베뢰아 아카데미 초창기 수료생이고, 목회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당시 하와이 열방대학의 프로그램이 참석하여 자기 몸에서 귀신이 나가는 체험을 했다고도 설교했고, 인생의 마지막 때에는 적어도 몇 번 금이빨과 각종의 신비이적들이 나오는 신사도 집회에도 연관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타나났다.

하용조 목사의 심각한 비성경적인 거짓 영성의 영향 하에 신사도 운동하는 이단 손기철 장로, 점쟁이 부채도사 박수무당 김하중 장로, 손기철 장로와 거의 동일한 신사도 영성 집회를 인도하는 김성진 장로,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벌이는 송만석 장로 등이 배출되어 한국교회를 크게 어지럽히고 있는 중이다. 온누리교회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배운 부교육자들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영돈 교수가 온누리교회에 대해 이렇게 존게 말한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분별력을 마비시키는 악한 행동이다. 아마도 박영돈 교수 자신의 신앙노선이 온누리교회와 같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이고 학과장이신 분이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나니, 그 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고신 목자의 분위기가 이제서야 이해되는 것 같다. 요즘 고신이 옛날의 고신이 아니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돌고 있었다.  

“그의 집회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의 치유는 항상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더!’라는 명령조의 기도로 하늘에서 성령을 불러내어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왜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지 심히 의문스럽다.”(94 페이지)

얼른 보면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성령사역(?)의 문제를 바로 파악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이런 반응과 느낌은 손기철 장로의 거짓 영을 부리는 사악한 행동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매우 부적절하고 비성경적이다. 손기철 장로가 ‘더! 더! 더!’하면서 성령을 부리는 작태는 가증한 것이고, 그와 장단을 맞추어 일하는 그 성령도 진짜 성령이 아니고 마귀의 영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런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박영돈 교수가 그 정로만 반응했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이미 방안에 사악한 뱀이 들어와서 또아리를 틀고 있으나, 끝까지 뱀이라 하지 않고 모습이 다른 생선이라고 우기면서 가족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던지는 어리석고 미련한 가장의 모습이다. 

왜 박영돈 교수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박영돈 교수의 이런 모습은 그 자신도 역시 거짓 영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일찍부터 미혹되었던 박영돈이 신학을 했고, 신학교 상황에 가장 맞게 최적화된 이단 또는 이단옹호자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분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을까? 박영돈 교수가 진정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신령한 분이라면 손기철 장로의 그런 가증한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의 사악한 행동에 대한 박영돈 교수의 반응은 기껏해야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는 정도였다. 손기철 장로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그가 사악한 적(이단)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그릇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했으므로 참으로 심각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단상에 올라온 한 여성을 바닥에 쓰러뜨린 후에 그녀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진동할지어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가 격렬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95 페이지)

손기철 장로가 부리는 거짓 영의 역사에 대해 똑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손기철 장로가 여인을 향하여 진동하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그 여자의 몸이 진동했다는 것은 손기철 장로가 사악한 영의 부림을 받는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는 그런 장면을 목격했으면서도 귀신의 사악한 일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단지 손기철의 지나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정도의 말도 안하면 자신도 이상한 사람이 되게 되므로 이 정도의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박영돈 교수는 항상 문제의 사람을 약간 비판하며 균형을 맞추는 듯 행동하면서 자신의 조금 다른 말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주장도 자신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으므로 많은 신자들과 독자들에게 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서 박영돈 교수는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대체 박영돈 교수가 왜 이럴까? 틀림없이 박영돈 교수 자신 또는 자신의 부인이 손기철 집회에서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손기철 장로을 통해 미혹의 영이 일한다고 볼 수 없었고, 그렇게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두번이나 찾아갔다는 것도 이상하다. 글을 쓰기 위해 직접 경험하려고 갔다는데,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목적이라면 한 번이면 족하고, 신문 기사 등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박영돈 교수는 솔직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아내가 찬양하면서 감동 받아 울기도 했다는 말은 절대로 예사로운 내용이 아니다. 이단이라고 여기고 경계하는 자세를 가졌다면 손기철 장로의 치유집회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눈시울이 젖는 감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옆에 있던 아내는 찬양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8시가 다 되자 손 장로가 나와 설교를 시작했다.”( 88 페이지)

   

박영돈의 은사중지론 부정, 치유집회 권장 

3장에서 박영돈의 신학사상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두가지를 보았다. 첫째로, 그가 개혁신학의 은사중지론(기적중지론)을 무시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가 인간의 기획으로 건전한 치유집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수교회는 초자연적 은사와 기적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되어다는 신학적인 전통에 갇혀 오랫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정된 신학의 틀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해 왔다. 카이퍼와 워필드 같은 대신학자들의 권위가 실린 이런 견해는 마치 전통의 상징인 양 보수 교회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의적이고 성경 어디에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초자연적인 은사가 계시나 사도적 권위와 연관된 것이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성경이 참으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기보다 오히려 워필드 같은 학자의 견개를 무분별하게 답습한 것이다.”(102 페이지)

“그동안 보수 교회는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능력의 나타남을 심대하게 방해해 온 것이 아닌지 깊이 자성해야 한다.”(102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이런 사상을 가졌다면 사실 일찍 고신을 떠났어야 했다. 개혁신학의 은사중지론(기적중지론)은 박영돈 교수가 이렇게 함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성경의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 소경을 보게하는 이적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계시 임을 증거하는 특별계시 사건이었다.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과연 당신이 오시기로 예정된 메시야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특별계시 사건이었다. 성경으로 계시가 확립되었고 교회가 설립되고 난 후 이러한 초대교회의 이적이 종결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고, 지금 어디에서도 이러한 이적이 나타난다는 증거가 없다. 기적중지론(은사중지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혁신학을 부정한다는 것이므로 박영돈 교수는 개혁신학을 주구하는 고신의 교수직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가야만 했었다. 

박영돈 교수는 교만에 빠져 자신의 새로운 신학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은 곧 개혁신학교인 고신의 정체성을 해치는 일이다.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고신의 교수로 자리를 잡고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잘못된 은사 운동에 대응하는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건전하게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성장을 위해 건전하게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치유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판과 정죄로 일관하기보다 성경적인 치유 신학을 정립하고 바람직한 치유 사역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방안이다.”(103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이 말은 참 난감한 말이다. 어디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안 쓰려고 해서 안되고 사람이 적극적으로 쓰려고 하면 더 나오는 것인가? 나타나는 은사를 부정하려는 교회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령의 은사의 열매를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여 나타나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되는 것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일이다. 거짓된 방언이므로 위축시킨 것이고 거짓된 예언이므로 배격한 것이지, 세상 어디에서 정상적이고 올바른 은사가 추방된 적이 있는가? 어째서 박영돈 교수가 하는 말들이 전부 은사주의 이단들의 말과 같을까?

치유집회가 가능하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을 더욱 해괴하다. 치유를 목적으로 집회를 준비하면 성령이 치유를 일으킨다던가? 성령이 피리 소리를 듣고 일어서는 인도의 코브라인가? 대체 어떻게 하면 치유집회가 건전해지고 어떻게 하면 불건전해지는 걸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치유집회 개념이 없다.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치유를 의도하거나 기획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뿐이고 오직 성령이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전혀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치유를 일으켰을 뿐이다. 치유가 목적인 치유는 한 번도 없었고 모든 치유는 복음증거를 위해 일어났다. 박영돈 교수는 적군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면서 사실은 개혁주의 내부에서 빗장을 풀어버리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분이다. 매우 비성경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단들을 돕고 있다. 박영돈 교수의 다음의 말은 치유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을 부정하는 말이다. 

“오늘날 치유의 기사가 희귀해진 것은 교회가 처음 열심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가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114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이 말은 은사주의자들의 말과 꼭 같다. 그들은 교회가 조직화되고 설교자들이 그리이스 웅변술의 영향을 받아 설교 원고를 준비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기는 문화가 교회에 정착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사라졌다고 한다. 성령이 교회의 조직화 때문에 치유와 이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도 그들의 말과 꼭 같다. 그러면 치유를 사모하고 권장하는 박영돈 교수 자신을 통해서는 치유나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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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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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처럼 2018-02-03 21:30:13

    박영돈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저렇게 서술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분별력없는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손기철 장로의 치유집회를 보고 난 후 자신의 조직신학적 체계와의 충돌에 대해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게도 성화, 성화, 성화를 타령하더니만...ㅡ,.ㅡ
    그 열심주의 배경에는 개혁주의와 다른 그 무엇이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문제는 고신측에서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닌것 같습니다.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5 14:36:40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조나단 에드워즈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영향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신체에 나타난 그러한 영향들을 보고서 이렇다 혹은 저렇다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규칙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신체에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와 같은 어떤 외적인 모습들을 보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지을 아무런 근거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명시적으로든 혹은 간접적으로든 신체에 나타나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reason)도 그런 것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신적이고 영원한 것들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사람의 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영과 몸 사이의 연합의 법칙들을 고려해 볼 때, 올바른 영향력, 즉 사실에 대한 참되고 타당한 깨달음이 신체에 그러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쉽게 설명됩니다.





    진리에 대한 체험이 특이한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죽으심으로 보여 주신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참된 깨달음, 그리고 참된 영적인 사랑과 기쁨의 역사가 육체적 힘을 그렇게 많이 빼앗는다는 것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리 모두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를 향한 사랑과 그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현재의 체질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주 작은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영광과 사랑과 기쁨이 그들이 누릴 주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들의 신체적인 힘을 약화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에 성령께서 비범하게 부어질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이유로 그러한 특이

    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다음과 같은 것이 인정된다면, 즉 만일 이성이나 성경의 어떤 규칙

    이 그러한 종류의 특이한 현상들, 특히 앞선 예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그 반대의 주장이 아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공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으로 울거나, 신음하거나, 탄식한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신약 성경 안에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각성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영원한 것들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런 신체적 효과들이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이고 부수적인 효과들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언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부상흥과 개혁사)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5 18:20:35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2)

    -조나단 에드워즈


    따라서 이러한 외적이고 부수적인 효과들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언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내적인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외적이고, 부수적인 나타남을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러한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거룩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기록들을 보면 그러한 일들이 그 시대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즉, 초대교회 때에 성령의 커다란 부으심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신체에 비상한 영향들이 나타나는 일이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는 그러한 양상을 나타내 보인 한 사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극도의 고민과 경악으로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 때 그가 엎드린 것은 바울과 실라에게 간청하거나 겸손하게 말을 걸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취한 자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당시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대신 그는 먼저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29~30). 그의 엎드러짐은 그의 전율과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32편 3절에서 4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아래서 크게 부르짖고 그의 몸이 크게 쇠약해진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최소한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어떤 경우에 죄의 각성이 그러한 외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위의 표현 속에서 그 어떤 과장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기자는 과장법으로 불합리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장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말한 마음의 활동은 어떠한 정서적인 성향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신체의 힘이 다 빠져버리는 경우

    아가서를 보면,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그녀의 몸이 약해졌으며, 힘이 다 빠지게 되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되풀이하며 말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현상은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이유로 당연히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주의자들이 가지는 인상들(impressions)은 보통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반대합니다. 이것은 설득력이 약한 반박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이 언제나 떨기를 잘한다고 해서, 후에 바울이 사울이나 간수가 떤 것이 참된 양심의 각성으로 인해 떤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 크든 작든 신체에 미치는 효과들을 반대하는 그러한 모든 반박들은 너무나 경박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어떤 토대 위에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 어떤 규칙에 의해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물의 뿌리와 원인,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들과 정서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조사되고 시험되어야지 혈육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부흥과 개혁사)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6 07:52:18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4)

    -조나단 에드워즈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주셨고, 또한 이러한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지 않고는 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참으로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종 상상력이 너무 강하고 다른 기능들은 약해져서, 상상력이 다른 기능들을 제압하고 다른 기능들이 활동하는 것을 크게 방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상력의 기능을 참으로 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셨다는 분명한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특별히 비교적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경우를 봅니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에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그들을 어린 아이들같이 다루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에 그의 교회가 무지와 미성년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형들(types)과 외적인 나타남으로 그들을 지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추정이 불합리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영혼들을 많이 다룬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것이 사실인지 판단하도록 해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속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특이한 체질로 인해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황홀경 중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그들의 마음이 일련의 강렬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천국에까지 말려 올라가서 거기서 영광스러운 광경들을 보는 것처럼 되어도 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몇몇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악마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경험들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성 바울이 천국으로 이끌려 간 경험(고후12:1~4)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추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어떤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이러한 열렬하고 강렬한 작용 아래에서의 인간의 본성뿐입니다. 신적인 것들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위대함과 탁월함에 대한 참된 깨달음 및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황홀케 하는 안목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의 본성의 힘이 압도되는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와 같이 감동을 받고 압도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상상력이 그처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 효과 즉, 황홀경에 빠지는 일은 그들의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다른 효과들에 비례하는 것이며, 그것들과 유사한 사건일 뿐입니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전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들이 영향을 받아서 그 힘을 다 빼앗겨 버리고, 모든 체질이 녹아 내리기 쉽게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경우에 특별히 어떤 체질에 있어서 마음의 격렬한 묵상이나 활동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어서 가장 특별한 영향을 받는 신체의 한 부분인 뇌가 특별히 압도되고 감동을 받아, 그 힘과 정신이 잠시 동안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외부 감각 기관들의 인상에 분리되고, 일련의 즐겁고 기쁨을 주는 상상 속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그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잘못 해석하여 그것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환상인 것처럼 지나치게 그것들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거나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적인 계시로 간주하며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하늘로부터 온 통지라고 간주합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경우에, 그 결과는 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신고 | 삭제

  • 질문드립니다 2018-02-06 16:04:23

    그리스도 안에서 님.

    조나단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노쓰햄프턴 교회에서 퀘이커교도들은 낄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한번 자세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6 16:37:47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5)

    -조나단 에드워즈

    부흥과 개혁의 때일수록 모조품을 경계하라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몇몇 가짜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조품들이 생기는 것은 개혁의 시기에 항상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종교의 부흥 치고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시대를 보면 이러한 종류, 즉 지독한 이단과 비열한 행동에 빠진 사람들의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뛰쳐 나갈 때까지, 참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형제들로, 성도들의 한 부분으로 잠시 동안 받아들여졌으며, 그들과 다르다고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일 2:19).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직분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신 몇몇 사람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장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유다가 이러한 예입니다.

    유다는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욕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발각되거나 의심받는 일이 없이 참된 경험을 한 제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랫동안 계속 연합하였으며, 친밀하게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도 모든 외적인 일들에 있어서 참된 제자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사도의 지위를 수여해 주셨으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알고 계셨지만, 그 당시에는 전지(全知)하신 심판자와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신분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의 수종자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수종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그를 배척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마음의 감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말고, 보이는 것과 공개된 것을 통하여 하도록 말입니다.

    한동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특출하게 충만하다고 여겨졌던 몇몇 사람들 중에 그러한 배교자들이 있었던 예들이 더러 있었습니다.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던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무리 중에서 집사의 직분에 선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5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배반하여 야비한 행동을 하는 일단의 비열한 이단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니골라당이라는 파당의 이름이 나왔습니다(계 2:6, 15).

    종교개혁 시대에도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교황 정치 때부터 종교개혁의 때까지, 잠시 동안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다가 배반하여 가장 야비하고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부흥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6 16:46:56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6)

    -조나단 에드워즈

    마귀가 하려고도, 할 수도 없는 성령 역사의 안전한 표지들

    마귀가 설사 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고, 죄로 말미암은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구주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갖거나, 예수님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더욱 존경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성경의 필요성과 유용성, 그리고 진실성에 대한 생각을 가지거나, 성경에 귀를 기울이거나, 성경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영혼의 문제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진상(眞相)을 보여 주는 일을 착수하고자 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며, 그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도록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다른 일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사랑의 영이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영,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설사 그가 주려고 한다 하더라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그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본성과 가장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비상한 영향력과 역사가 일어날 때, 그 곳에서 이러한 것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안전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부수된 어떠한 다른 사정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촉진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방편이나 수단들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의 '판단이 큰 바다와 같으신'(시 36:6)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행하셨든지, 그리고 동물적인 마음 속에 어떠한 동요가 일어났든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떠한 효과가 나타났든지 간에 말입니다. 사도가 우리들에게 준 표지들은 홀로 서며, 스스로를 지지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한 표지들이 어디서 나타나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 표지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변칙적인 일이 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몇몇 고백자들의 행동에 실수가 있고 미혹된 일들과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수천의 사소한 반대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지난 몇 달 동안에 나는 최근 이 지방에서 일어난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큰 시험거리가 된 특이한 현상들을 충분히 보고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는다든지, 비명을 지르고, 커다란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든지, 몸의 힘이 빠진다든지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마을들에서 매우 많은 수의 그러한 사람들과 아주 개별적으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특이한 영향을 받고 있을 때나, 아니면 후에 때때로 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동안 그러한 역사의 방식과 결과를 보았고, 그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전과 그 후에 영적인 관심을 가지고 내가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있어서 내가 다음과 같이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대해 준 목격자의 관찰을 통해 그 역사의 본질과 성향을 판단해 본다면, 또한 부지런히 특별한 조사를 한 것으로 판단하면, 이 역사는 앞에서 말한 모든 표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례들에 있어서 그렇고, 모든 항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비범한 역사의 직접적 영향 속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모든 표지들이 매우 크게 나타났습니다.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6 16:55:27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7)

    -조나단 에드워즈


    함부로 비난하기 전에 먼저 신중하게 조사해보라

    지금의 부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역사를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가졌던 위장된 신중함은, 결국에는 이 점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신중치 못했던 것으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은 그토록 위대한 축복에 조금이라도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뉴잉글랜드에 그토록 풍성히 주셨던 신적인 빛과 은혜와 위로, 그리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은택들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샘이 그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열려서, 많은 이들이 그 곳으로 몰려가서 영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는 동안에, 그들은 멀리 서서 의심하고 의아해하며,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귀한 때가 다 지나갈 때까지 그와 같이 계속 있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비범한 외적인 나타남이 수반된 그 역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이 나타난 곳으로 가서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등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심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두세 사례를 관찰한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관찰하여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는 안심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만일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분명히 큰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확실한 보고들을 듣고, 이러한 일들에 대해 무시하는 말을 무모하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실수를 했겠습니까? 한 믿지 않는 유대인 가말리엘의 경고가 그들에게 보다 나은 신중함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8절, 39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지금까지 내가 이 설교를 통해 말한 것이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이 후로는 그들이 적어도 방금 언급한 가말리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나는 희망합니다. 이후로는 그 역사에 반대하지 않기를, 그 역사를 대적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기를, 간접적으로라도 그 역사를 불신하게 만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기를 나는 희망합니다. 그들이 성령을 방해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는 성령에 대해 짓는 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롭게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대적해서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를 대적해서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은택을 받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경우

    만일 아직도 이러한 일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계속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을 훼방 놓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성령훼방죄가 나타나기 가장 쉬운 때입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면, 이 역사에 적의를 가지고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마 몇몇 사람이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아직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신고 | 삭제

  • 그리스도 안에서 2018-02-06 17:02:16

    천국 체험이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현상, 타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8)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선의 방어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인 자만을 가장 엄히 경계해야 하며, 특이한 체험과 안위의 경험,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받았을 수 있는 하늘의 높은 은혜들로 인해 자고해지는 것을 가장 엄격히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그리고 우리가 가장 탁월한 성도들 중에 포함되며 하늘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주님의 비밀이 특별히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모든 사람들 위에 위대한 교사요 감찰자로 쓰임 받기에 합당하다는 생각 등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러한 은혜들을 대할 때에 특별한 태도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엄격하고 방심하지 않는 눈으로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분별력에 대해 크게 자만하여 우리 자신들이 선지자이거나 하늘의 특별한 대사들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위대하게 드러내 주실 때, 자기 눈 안에서만 눈부시면 안 됩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아론과 백성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지만, 그 스스로는 눈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출 34:29).

    아무도 스스로 이러한 영적인 자만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최고의 마음 상태에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성도들 중 가장 탁월한 성도라고 할 수 있지만)도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셋째 하늘에서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바로 그 때에도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십시오.

    자만은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악한 독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들어온 첫 번째 죄입니다. 죄악이라는 전체 건물의 기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일하는 방식이 가장 비밀스럽고, 속이기 쉬우며, 탐지하기 힘든 것입니다.어떠한 욕망보다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쉽게 모든 것과 뒤섞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하나님께 더 미움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복음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만큼 마귀가 성도의 마음에 들어가도록 허용하고,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노출되도록 만드는 죄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탁월한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일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탁월한 체험이나 하나님과의 특이한 교통을 한 이후에 즉시 마귀는 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을 미혹하였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의 눈을 여시고 그들을 구출해 내시기까지 그들은 그 길에서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야 자만심이 그들을 잘못되게 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부흥과 개혁사)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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