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3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열굴> 저자,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학과장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계속 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읽을 수록 마음의 근심과 분노가 짙어진다. 박영돈 교수의 정체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이단들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사나운 적군에 편에 서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안심하고 서로 믿고 함께 힘을 합하여 성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우군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내부에서 슬그머니 성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사람주는 사람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박영돈 교수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3장은 현대의 치유사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3장에서의 그의 이야기의 주된 소제가 되는 사람은 신사도 운동권에 권에 속한 치유사역자이며 온누리교회의 장로인 손기철 장로이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의 선구자이고 손기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미국의 이단 존 윔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런데 박영돈의 글에서 존 윔버나 손기철이 전혀 이단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탁월한 신유의 은사가 있었다고 알려진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윔버(John Wimber)도 자신의 치유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해 준 이들 중에서 25 퍼센트만이 완치되었다고 했다.”(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128 페이지)

빈야드 운동이 이단 운동이라는 것은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박영돈 교수 자신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 윔버가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이니 당연히 존 윔버는 이단이다. 이것과 다르게 말하면 말장난이다. 그런데 박영돈 교수의 존 윔버를 통하여 나타난 치유이적에 대한 언급 속에서 존 윔버를 이단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마치 존 윔버가 치유사역을 할 때에는 성령이 함께 하셨던 것 같이 말한다. 이단을 이단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을 개혁주의 신학교의 교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 박영돈 교수가 왜 이런 분위기로 나가는 것일까? 빈야드 운동의 거짓된 영성과 자신의 신앙이 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박영돈 교수의 손기철 장로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손기철 장로의 책을 보면 그는 존 윔버, 헌터 부부 등의 신사도 운동가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신사도 운동의 사도이고 예언자인 릭 조이너에게서 두 번이나 기도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독자들이 이것을 거론하자 손기철 장로는 나중에 이 부분을 지웠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글 어디에서도 손기철 장로를 이단으로 보는 시각을 느낄 수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손기철의 집회에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가 손기철 장로의 성령운동과 치유사역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조금 과하고 지나치다”, “이해가 안되는 모습들이 있었다”라는 정도이다. 오히려 박영돈 교수의 아내는 손기철 장로의 집회 분위기에서 감동을 받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손기철 장로가 휴대폰으로도 치유기도를 해 준다고 하니 얼른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여 전화로 손기철 장로의 기도를 받으라 권했다고도 했다.

“마지막에는 손 장로가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아는 사람 중에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전화를 걸게하여 휴대폰으로 치유를 위한 기도를 받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엔가 황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필자는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통해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아내는 필자보다 눈치가 빨라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 재빨리 허리와 잇몸이 아파 고생하시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치유기도를 받으시라고 권했다 ... 난생처음 참으로 희안한 일을 목격하였다.”(92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휴대폰 치유기도를 있을 수 없는 이단적인 일로 판단했다는 것인지 ... 뭐가 뭔지 모르다가 나중에 손기철이 휴대폰으로도 치유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인지 ... 분명하지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적어도 두 번 참석했으나 손기철 장로를 이단이라는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문제점(?)들이 좀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문제점은 우리 모두에게 다 있다.

손기철 장로의 문제의 핵심은 이단성인데, 박영돈 교수가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답게 한국교회가 다 경계하고 있는 손기철 장로의 성령운동과 치유운동에 대해 날카롭고 분명한 신학적인 견해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은 이 책의 독자들과 한국교회에 심각한 혼란을 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에 기대를 가졌던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유형의 치유 사역자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치유사역자들이 대체로 몰상식하고 무례하며 위압적인데 반해 그는 매우 신사적이고 부드럽고 겸허해 보인다.”(93 페이지)

과거의 이단들이 저학력자들이고 깡패 출신이거나 욕쟁이들이들이었던 것에 반해 요즘 이단들은 해외 유학, 의사, 교수 등의 전문직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추세를 박영돈 교수는 몰랐던 모양이다. 박영돈 교수는 아마 서울대 출신이고 하바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세련되고 다정다감한 이용규 선교사를 보면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릴 것 같다.

“그의(손기철) 책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치유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과 사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전달된다. 그는 모 교회(온누리교회를 의미)의 장로로서 건전한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93 페이지)

이단을 미화해도 이렇게 미화할 수 있을까? 알면서도 이렇게 말했다면 박영돈 교수는 이단옹호자이다. 손기철 장로의 집회를 두 번이나 직접 경험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보고서도 이렇게 말했으니 박영돈 교수는 정말 분별력이 없는 분이다. 대부분의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손기철 장로의 책 몇 권을 읽으면 곧 바로 그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님이신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아마 고신의 다른 교수님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박영돈은 손기철 장로를 배출한 온누리교회를 건전한 교회라고 했다. 어떻게 온누리교회가 건전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일까? 온누리교회를 설립한 하용조 목사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것을 가장 빨리 도입하면서 한국교회를 병들게하는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었다. 하용조 목사는 김기동의 베뢰아 아카데미 초창기 수료생이고, 목회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당시 하와이 열방대학의 프로그램이 참석하여 자기 몸에서 귀신이 나가는 체험을 했다고도 설교했고, 인생의 마지막 때에는 적어도 몇 번 금이빨과 각종의 신비이적들이 나오는 신사도 집회에도 연관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타나났다.

하용조 목사의 심각한 비성경적인 거짓 영성의 영향 하에 신사도 운동하는 이단 손기철 장로, 점쟁이 부채도사 박수무당 김하중 장로, 손기철 장로와 거의 동일한 신사도 영성 집회를 인도하는 김성진 장로,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벌이는 송만석 장로 등이 배출되어 한국교회를 크게 어지럽히고 있는 중이다. 온누리교회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배운 부교육자들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영돈 교수가 온누리교회에 대해 이렇게 존게 말한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분별력을 마비시키는 악한 행동이다. 아마도 박영돈 교수 자신의 신앙노선이 온누리교회와 같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신의 조직신학 교수이고 학과장이신 분이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나니, 그 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고신 목자의 분위기가 이제서야 이해되는 것 같다. 요즘 고신이 옛날의 고신이 아니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돌고 있었다.  

“그의 집회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의 치유는 항상 ‘성령님, 임하소서! 더! 더! 더!’라는 명령조의 기도로 하늘에서 성령을 불러내어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왜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지 심히 의문스럽다.”(94 페이지)

얼른 보면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성령사역(?)의 문제를 바로 파악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이런 반응과 느낌은 손기철 장로의 거짓 영을 부리는 사악한 행동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매우 부적절하고 비성경적이다. 손기철 장로가 ‘더! 더! 더!’하면서 성령을 부리는 작태는 가증한 것이고, 그와 장단을 맞추어 일하는 그 성령도 진짜 성령이 아니고 마귀의 영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그런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박영돈 교수가 그 정로만 반응했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이미 방안에 사악한 뱀이 들어와서 또아리를 틀고 있으나, 끝까지 뱀이라 하지 않고 모습이 다른 생선이라고 우기면서 가족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던지는 어리석고 미련한 가장의 모습이다. 

왜 박영돈 교수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박영돈 교수의 이런 모습은 그 자신도 역시 거짓 영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일찍부터 미혹되었던 박영돈이 신학을 했고, 신학교 상황에 가장 맞게 최적화된 이단 또는 이단옹호자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분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을까? 박영돈 교수가 진정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신령한 분이라면 손기철 장로의 그런 가증한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의 사악한 행동에 대한 박영돈 교수의 반응은 기껏해야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는 정도였다. 손기철 장로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그가 사악한 적(이단)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그릇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했으므로 참으로 심각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단상에 올라온 한 여성을 바닥에 쓰러뜨린 후에 그녀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진동할지어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가 격렬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95 페이지)

손기철 장로가 부리는 거짓 영의 역사에 대해 똑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손기철 장로가 여인을 향하여 진동하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그 여자의 몸이 진동했다는 것은 손기철 장로가 사악한 영의 부림을 받는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는 그런 장면을 목격했으면서도 귀신의 사악한 일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단지 손기철의 지나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정도의 말도 안하면 자신도 이상한 사람이 되게 되므로 이 정도의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박영돈 교수는 항상 문제의 사람을 약간 비판하며 균형을 맞추는 듯 행동하면서 자신의 조금 다른 말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주장도 자신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으므로 많은 신자들과 독자들에게 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서 박영돈 교수는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대체 박영돈 교수가 왜 이럴까? 틀림없이 박영돈 교수 자신 또는 자신의 부인이 손기철 집회에서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손기철 장로을 통해 미혹의 영이 일한다고 볼 수 없었고, 그렇게 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박영돈 교수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두번이나 찾아갔다는 것도 이상하다. 글을 쓰기 위해 직접 경험하려고 갔다는데,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목적이라면 한 번이면 족하고, 신문 기사 등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손기철 장로의 집회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박영돈 교수는 솔직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아내가 찬양하면서 감동 받아 울기도 했다는 말은 절대로 예사로운 내용이 아니다. 이단이라고 여기고 경계하는 자세를 가졌다면 손기철 장로의 치유집회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눈시울이 젖는 감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옆에 있던 아내는 찬양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8시가 다 되자 손 장로가 나와 설교를 시작했다.”( 88 페이지)

박영돈의 은사중지론 부정, 치유집회 권장 

3장에서 박영돈의 신학사상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두가지를 보았다. 첫째로, 그가 개혁신학의 은사중지론(기적중지론)을 무시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가 인간의 기획으로 건전한 치유집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수교회는 초자연적 은사와 기적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되어다는 신학적인 전통에 갇혀 오랫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고정된 신학의 틀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해 왔다. 카이퍼와 워필드 같은 대신학자들의 권위가 실린 이런 견해는 마치 전통의 상징인 양 보수 교회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의적이고 성경 어디에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초자연적인 은사가 계시나 사도적 권위와 연관된 것이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성경이 참으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기보다 오히려 워필드 같은 학자의 견개를 무분별하게 답습한 것이다.”(102 페이지)

“그동안 보수 교회는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능력의 나타남을 심대하게 방해해 온 것이 아닌지 깊이 자성해야 한다.”(102 페이지)

박영돈 교수가 이런 사상을 가졌다면 사실 일찍 고신을 떠났어야 했다. 개혁신학의 은사중지론(기적중지론)은 박영돈 교수가 이렇게 함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성경의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 소경을 보게하는 이적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계시 임을 증거하는 특별계시 사건이었다.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과연 당신이 오시기로 예정된 메시야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특별계시 사건이었다. 성경으로 계시가 확립되었고 교회가 설립되고 난 후 이러한 초대교회의 이적이 종결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고, 지금 어디에서도 이러한 이적이 나타난다는 증거가 없다. 기적중지론(은사중지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혁신학을 부정한다는 것이므로 박영돈 교수는 개혁신학을 주구하는 고신의 교수직을 떠나 자기의 길을 가야만 했었다. 

박영돈 교수는 교만에 빠져 자신의 새로운 신학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은 곧 개혁신학교인 고신의 정체성을 해치는 일이다.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고신의 교수로 자리를 잡고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잘못된 은사 운동에 대응하는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건전하게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성장을 위해 건전하게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치유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판과 정죄로 일관하기보다 성경적인 치유 신학을 정립하고 바람직한 치유 사역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방안이다.”(103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이 말은 참 난감한 말이다. 어디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안 쓰려고 해서 안되고 사람이 적극적으로 쓰려고 하면 더 나오는 것인가? 나타나는 은사를 부정하려는 교회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령의 은사의 열매를 너무도 아름답고 귀하여 나타나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되는 것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일이다. 거짓된 방언이므로 위축시킨 것이고 거짓된 예언이므로 배격한 것이지, 세상 어디에서 정상적이고 올바른 은사가 추방된 적이 있는가? 어째서 박영돈 교수가 하는 말들이 전부 은사주의 이단들의 말과 같을까?

치유집회가 가능하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을 더욱 해괴하다. 치유를 목적으로 집회를 준비하면 성령이 치유를 일으킨다던가? 성령이 피리 소리를 듣고 일어서는 인도의 코브라인가? 대체 어떻게 하면 치유집회가 건전해지고 어떻게 하면 불건전해지는 걸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치유집회 개념이 없다.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치유를 의도하거나 기획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뿐이고 오직 성령이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전혀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치유를 일으켰을 뿐이다. 치유가 목적인 치유는 한 번도 없었고 모든 치유는 복음증거를 위해 일어났다. 박영돈 교수는 적군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면서 사실은 개혁주의 내부에서 빗장을 풀어버리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분이다. 매우 비성경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단들을 돕고 있다. 박영돈 교수의 다음의 말은 치유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을 부정하는 말이다. 

“오늘날 치유의 기사가 희귀해진 것은 교회가 처음 열심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가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114 페이지)

박영돈 교수의 이 말은 은사주의자들의 말과 꼭 같다. 그들은 교회가 조직화되고 설교자들이 그리이스 웅변술의 영향을 받아 설교 원고를 준비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기는 문화가 교회에 정착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사라졌다고 한다. 성령이 교회의 조직화 때문에 치유와 이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박영돈 교수의 말도 그들의 말과 꼭 같다. 그러면 치유를 사모하고 권장하는 박영돈 교수 자신을 통해서는 치유나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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