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9 23:37 (월)
독자마당
바른믿음에 부탁드리는 말씀
icon 분별 다비드
icon 2016-07-11 03: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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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도들은 터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각기 쌓은 공적이 어떠한지 불로써 드러날 터인데(고전3:12) 인정되지 않는 공적은 불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믿음의 창시자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고 이 믿음은 아시다시피 은혜에 속하며 하나님의 선물이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 믿음에 의해 자신의 자율의지를 사용하여 행함으로 쌓은 공적은 냉수 한 사발 같더라도 짚과 풀처럼 불에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 의해 하루 이십사시간 내내 자신의 자율의지를 사용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의 현실이고 그럼에도 이미 성도들이기에 있는 믿음을 의지하여 온전히 하나님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하면 돌아온 탕자도 외면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이 이십사시간 전체에까지 미치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함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성경말씀이 선포하시는 기본적인 기준과 분별을 제시하는 것이 인터넷 신문사 ‘바른믿음’이 세워진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200여개의 도시에서 찾아보고 있는 바른믿음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 입장은 수많은 교파와 교단을 달리하는 독자들 앞에서 명확합니다.

개신교가 공통분모로 가지는 기초교리를 중심으로 사용하며 그 외의 부분은 오직 성경말씀이 기준이 된 바른믿음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수많은 교파와 교단을 달리하는 독자들 앞에서 중심이 잡힌 바른믿음의 입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바른믿음이 성도들 앞에 실제적으로 적용함에 있어 최근에 바른믿음이 다루고 있는 이슈를 이용해 의견을 제시해 보려 합니다.

 

 

첫째. 한마음교회에 대하여

 

부활복음 논란이 일고 있는 한마음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한 것으로 인하여 여러 논란이 양산되었습니다.

우선 하늘성소 제사와 관련된 논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제사에 관한 성경적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십자가가 곧 하늘성소의 제사이며 우리의 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으며 성소 휘장이신(히10:20) 예수님의 육체로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다 아실 내용이니 짧게 넘어가고,

두 번째는 구약시대 대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성소에 뿌림으로 완성된 제사를 비교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 즉, 대속이 완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때에 지성소 휘장이 찢어져 열리며 대속으로 인한 인류와 하나님과의 화목의 물꼬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으로 이때 모든 인류가 아닌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의 공식적인 되찾음(redemption)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지금 이십일세기에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배피를 의지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중보자 되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안에서 되찾음(redemption)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은(요20:17;요20:27;히9:12) 성경해석 범주 안에 있는 해석입니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한 제사는 십자가에서부터 자기 피를 힘입어(히9:12)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까지입니다. 거기까지가 한 번의 제사입니다. 이 한 제사에 대해 성경이 정의한 선포는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2:2)입니다.

 

그런데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님은 십자가로는 부족하고 하늘성소에서 다시 제사를 드려야한다고 여러 번 표현하므로 두 번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확인해보았지만 분명히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표현상의 실수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입니다.

기독교이단대책협회에서 김성로 목사에게 드리는 제언에서 기독교이단대책협회는 대속과 구속의 개념과 대속과 구속이 단 한 번의 십자가제사로 이루어짐을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답변서에서 단 한 번의 제사를 인정하면서도 더해서 여전히 십자가제사에서 부활과 구속이 없음을 강조해  십자가제사 범위를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 전체가 복음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부분에 속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을 성육신하게 하셔서 참인간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부활시키심으로 우리 믿는 산자들을 구속하시는 주가 되게 하신 사실을 성경말씀이 축약하여 무어라고 선포하시는지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구절 말씀도 반드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전2:2;엡 2:16;골 2:15)

성경말씀이 그렇게 개념을 정의하시고 그렇게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며 이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서 ‘십자가’로 선포되는 사건과 개념 속에 부속되는 사건이며 부속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믿고 영접할 때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내용을 다 믿고 영접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을 성육신으로 참인간이 되게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믿는 산자들을 구속하시는 주가 되게 하신 사실을 모두 믿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구주로 영접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참인간으로 죽으시고 참인간으로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주가 되신 사실을 믿지 않고 부인한 상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성도라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 중에는 복음의 핵심부분의 사실을 하나라도 믿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부활이 확실한 증거이며 믿을만한 증거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부활만이 확실한 증거이며 부활만이 믿을만한 증거일까요.

확실히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동정녀 탄생하심도 확실한 증거에 속합니다. 그 외에 다른 증거들도요.

예수님의 하나님이시며 구주가 되심의 증거는 오직 믿음 안에서만 효력이 가능한 증거입니다. 분명히 밝혀놓지만 지적동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여 전하면 믿을 것이라며 간청했던 부자에게 나사로를 품고 있던 아브라함은 단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 바로 성경말씀을 전해도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부활하여도 믿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부활 자체가 지적동의 할 수밖에 없어도 성경말씀을 전했을 때 끝까지 믿음을 거부한 자는 부활이란 증거가 있어도 역시 믿지 않는다는 성경말씀의 선포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 부활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부분 전체를 모두 다 전할 때보다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믿을 수 있는 기회의 폭을 인위적으로 제한하여 제한된 복음전도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며 보통의 복음전도보다 사실상 뛰어난 복음전도 방법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행여라도 부활전도로 얼마든지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거나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잘못되게 믿기라도 한다면 ‘유사행위구원’으로 빗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이렇게 가르쳤거나 적어도 구원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분위기로 팽배하게 만들었다면 사과와 함께 반드시 고쳐야 됩니다.

 

성도에게 부활이 갖는 성경적 의미는 김성로 목사님의 주장과는 조금 다릅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참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셔서 참인간으로서 죽으신 성자하나님을 참인간으로서 살리신 이유를 성경에서는 근본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시고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무명의 논객 Titus Kim님이 예전에 언급하셨던 것처럼 칼빈은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의로우심의 증거로, 헤르만 바빙크는 예수님에게 주어진 산헤드린공회와 빌라도의 정죄 선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파기로 표현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와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의의 선포임과 더불어 장차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돼야 함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에 그에게 붙은 모든 성도들 역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죽음에 대한 정복, 모든 신자의 부활의 보증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돼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복음의 핵심 부분이 되는 사실을 모두 믿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구원받습니다. 부활을 빼고 믿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렸듯이 부활은 십자가 사건과 개념에 부속되는 사건과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며 깊어지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성도들에게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하심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께서 친아버지이심을 선포하신 것도(요5:18)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임을 친히 선포하심도(요2:22) 그밖에 여러 증거들도 모두 사실임을 ‘재확인’ 시켜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구주로 더욱 믿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쓰실 수 있으신 도구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분께 피조물인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충성함이 합당함을 믿게 되어도 이는 아직도 깊고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될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에까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망언인 것입니다.  그럼 봅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을 성육신으로 참인간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부활시키심으로 우리 산자들을 구원하신 주가 되게 하신 사실을 모두 믿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의 핵심부분이며 시작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믿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과 삶을 통해서 성경말씀 그대로이시며 성경말씀을 절대로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아가게 될 때에, 우리의 믿음이 전인격적으로 깊어가며 자라가게 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함께 깊어가고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아버지께 옳다 인정받는 믿음인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갈5:6) 전인격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어야 하듯 이 믿음은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2:2)을 깊이 알수록 깊이 있고 균형 있게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참인간이 되시기까지 낮아지신 이유도, 피조물 그것도 타락해버린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도(요3:16) 십자가를 앎이 없이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즉,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증명해주신 사랑이(롬5:8)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에서 선포한 정의대로 구원이며 우리를 구원케 하신 사랑을 아는 열쇠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사람을 찾아봅시다. 

 

마가는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직접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떠날 정도로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중의 마가는, 세상 입장에서는 세상이 마가를 감당치 못하기에는 마가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마가 입장에서는 1차 전도여행 중에 마가가 만난 세상은 마가가 이기기에는 그의 믿음은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여행 중간에 사실상 도망쳐 버렸고, 이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서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가를 포기하시지 않으셨고, 바나바를 통해서 양육시키시고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말년에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며 마가를 찾았으며 베드로에게 아들이라 칭함 받는 동역자가 되었고 마가복음의 기록자로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마가도 성화의 과정을 거쳐 갔고,  복음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뿌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갈6:14)를 전인격적으로 깊이 알게 됨으로써 십자가 사랑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요일 3:1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갈5:6) 세상을 이기도록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 갔음을 성경에 기록된 마가의 삶으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연관된 이 성경말씀을 보십시오.(요14:21;요일4:20;요일3:16;롬5:8;요13:34;갈5:6)

이는 십자가를 알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요원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에까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온전한 성화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망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한마음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른믿음이 해야 될 일은 한마음교회와 김성로 목사님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정통침례교단의 신앙고백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따르고 수용하는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정통침례교단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따르면,

.‘다시’ 제사 드린다고 표현하여 두 번 제사로 오해할 수 있게 가르치고 주장한 것과

.하늘에 오르셔서 드린 제사만이 영원한 한제사로 오해할 수 있게 가르치고 주장한 것과

.부활은 십자가에 부속된 사건이며 개념으로 성경이 정의하며 선포하시는데 이를 무리하게 분리한 것과

.부활이 믿을만한 확실한 증거라며 믿음의 속성을 간과하고 오히려 복음 전도를 제한한 것과

.믿음의 속성을 간과하고 자칫 유사행위구원으로 빗나갈 수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죽음에 대한 정복, 모든 신자의 부활의 보증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돼야 하는 부활의 본래의 의미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구원의 주축되는 증거로만 강조한 것과

.세상을 이긴 믿음과 온전한 성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결국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죽은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에까지 나와야 한다”는 망언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요청해야 되며

.부활은 성경에서 정의하고 선포한대로 십자가에 부속되는 사건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해해야만 되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공표해야 하며 문제들을 모두 수정할 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단정죄는 그 이후의 수정결과에 따라서 결정해야 합니다.  

 

 

둘째. 김세윤 신학에 대하여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조금 자세하게 말하면 “십자가에서 칭의가 포괄적으로 시작했고 완성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정확에 가까운 요약인 것으로 보였지만 고경태 목사님의 비평에 의하면 세부적으로 사용된 개념과 설명을 보면 문제가 많은 것을 봅니다.

 

김세윤 신학에 대해서 고경태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김세윤 신학에서 구원은,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무한, 충만에 참여하게 됨’이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7p )

그래서 ‘구원의 결국’을 ‘하나님과 같이 됨’을 목표로 제시했다(두란노, 칭의와 성화 58p)

또한 임진남 목사님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아포데오시스(apotheosis) 즉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 같이 됨을 뜻하는데 그런 구원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 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도란노. 주기도문 강해. 118p.)

 

사실 김세윤 신학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주장은 임진남 목사님이 제시한 또 다른 자료에서입니다.

“인간의 피조물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 세계에 참여하는 것, 신성을 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예수께서는 그러한 온전한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이다”.(두란노, 요한복음강해 54p.)

 

우리는 먼저 우리가 아는 기초적 교리를 확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성자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자하나님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인성이 생겨나시고 취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는 성육신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참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한 인격 두 본성. 성자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셔서 참인간이 되심으로 이제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자하나님께서는 창조 전 영원 전부터 근본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하셔서 지금은 동시에 참인간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계시록의 짐승은(적그리스도) 인간 속에 들어가 인간을 입지만 성자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자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이제 영원하신 두 본성 중 하나이며 본성입니다.

그리고 루터파의 일부주장을 제외하고는 개신교 기초교리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은 영원히 신성과 혼합되지 않으시며 영원히 인성으로 존재하십니다. 당연히 신성은 영원히 신성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인간이 되신 이유를 지식으로라도 알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침례비유를 통한 설명으로 우리는 참인간이신 예수님과 합하여 죽었고 참인간이신 예수님과 합하여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우리의 인성은 영원히 인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영지주의 사상가들이나 신사도 운동가들의 우리는 신이 된다는 주장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성은 영원히 신성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신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임하는 충만으로 충만할지라도 우리는 신이 되지 않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얘기해볼까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더라도, 바로 하나님으로 충만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함께하시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인 피조물입니다.

다시 말해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함께하시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며 이제 양자됨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신성을 입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안에 거하시는 피조물이며, ‘애초부터 영원히 피조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이제 기초교리 만으로도 우리는 김세윤 신학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김세윤 신학이 개념만이 아닌 주장에서 영지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고경태 목사님이 비평 중에 언급하신 것처럼 김세윤 신학이 중간기 유대인의 묵시문학을 사용해서 돌파구를 찾는데 따르는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목사님들의 신앙고백에 가까운, 분별에 근거한 비평이 와 닿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실 바른믿음을 주목하게 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나머지는 침례교와의 연대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이십세기 초에 자유주의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프린스턴 장로교와 세대주의적 침례교가 “우린 이것을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선포한 것이 근본주의의 시작인데, 이것은 신복음주의와 다른 순수 신앙고백인데 장로교와 침례교의 공통분모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십일세기에 들어서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곳 바른믿음에서 장로교와 침례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일이라 생각되지만 사단은 무척 싫어할 것입니다. 아마도 바른믿음을 공격하는데 이부분이 최우선순위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마음교회 논란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단이 또 그만큼 싫어할만한 것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많은 신사도운동가들과 신사도운동 단체들의 필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핵심적인 선교이슈로 자리 잡은 상태이며 정목사님께서는 이러한 단체들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과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바른믿음의 이스라엘 란에 단 한 개의 아티클도 올리시지 않으신 것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정밀한 접근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이랑 제2의선민 주장에 대해서 조덕영 교수님의 글에 십분 공감하지만 그 과정에 언급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이해함에는 온전하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들이 보이는 것도 사실로 여겨집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해서 온전함에 가까운 이해함이 생긴다면 적어도 반유대주의나 반유대주의적인 분위기조차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정이철 목사님께서  극단적 세대주의 때문에 세대주의자에 대해서 가지셨던 오해는 지금은 풀리신 상태이며, 저도 과거에 세대주의에 대하여 알아볼 때에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보이는 성경적이고 새로운 시각은 세대주의에 관한 일반적인 비판과는 여러 부분에서 많이 달랐습니다. 성경말씀을 올바로 보는데 균형 있는 시각을 제공해주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세대주의 중에서도 극단적 세대주의는 아무리 봐도 도저히 세대주의로 인정할 수 없는 사상이던데 정작 세대주의자들은 잠잠했던 것이 이상했습니다. 아마도 극단적 칼빈주의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이 나타내는 반응들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세대주의 중에서 90년대 들어 힘을 얻고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를 주목해서 보고 있는데, 이분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관점은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넘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엡2:14) 다시 하나로 만들 필요성이 없는 것과

또 하나는 로마서9장의 이스라엘의 남은자 중 마지막이라고 추측되는, 아마겟돈 전쟁 시간대인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때에 2/3는 멸절하고 나머지 1/3은 하나님께 은같이 연단 받으며 “주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주께 돌아오는 많은 수의 무리가, 민족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의 주께 돌아오게 될 많은 수의 무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 등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믿음으로 구원 받기에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민족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차적 해석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입니다(슥 2:8).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복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온 세계로 퍼져가기 시작할(행 1:8;행 8:14;행 10:45)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택함 받은 도구이며 민족인데 아직까지 넘어져 있으니, 이방인 성도라면 마땅히 복음에 빚진 자 된 심정으로 개개의 유대인들이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구원받도록 기도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민족적인 회복은 이미 하나님의 예언(슥 13:9)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넷째.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과거에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알아보게 된 이유에 개역성경이나 NIV같은 데서 삭제된 문장이나 구절이 킹제임스 성경에는 남아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남아있는 문장이나 구절이 보존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첨가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경우...

히브리어 특성상의 표현이지만 점 하나만 첨가해도 기록된 모든 저주를 더하시겠다는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고 만든 성경이 되고

이 경우는 사탄이 집어넣은 말이 되며, 원 말씀도 굽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왜곡하는 구절이 될 수 있어 성경전체도 왜곡할 수 있는 성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잘려나간 구절이 있는 성경은 남아 있는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으시고 남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실 수 있으신데, 첨가된 성경은 그 위험성 때문에 성경이라 부를 수도 없는 사탄의 성경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종교개혁기 초기의 위클리프 성경이나 그 이후의 제네바 성경을 전 세계로 말씀이 퍼져나가는데 주된 성경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킹제임스 성경을 주된 성경으로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점이 확인을 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결론은 킹제임스 성경은 매우 훌륭한 번역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 객관적 입장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매우 좋은 번역성경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큰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에 쓰고 있는 대부분의 성경들은 진위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삭제된 구절이 있는 성경입니다. 이는 다수사본과 소수사본 중 어떤 사본을 지지하느냐에 따른 문제입니다. 현재에 학계에서 다수사본과 소수사본에 대한 학문적 입장은 '다수사본'이 '소수사본'보다 원본이 나중에 쓰였다는 확정적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소수사본'보다 오차가 적은 '다수사본'이 교정되었다는 확정을 받지 않고 현재 살아남고 있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는 평행선 같은 입장차를 만들어 내고 있지요.

한 가지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며 헬라어를 비롯한 9개국어에 능통한 원문연구성경학자를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증거에 의하면 현대의 번역성경은 단어나 문장을 바꿀 때에 사본의 단어나 문장의 진위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표에 의해서 단어나 문장의 변경이 결정이 된다고 합니다. 이때 각 사람의 사상이나 신학이 성경말씀 수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번역성경은 실제로 짜깁기 번역이 된 면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사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NIV성경은 1978년에 첫 출판돼 많은 분들이 쓰고 있는 성경인데 이 NIV성경이 2011년 중성표기 사용 이후 맛이 가버렸다는 속된 표현을 쓰며 자조적인 고백을 하시는 분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번역성경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실 때에 여러 종류의 한글성경과 영어성경과 기타 성경들을 비교해서 읽습니다. 저 역시 개역성경을 주된 성경으로 보지만 여러 종류의 다른 성경들을 비교해서 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꼭 빠뜨리지 않고 비교하는 성경입니다.

집안의 책장이나 가까운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소수사본계열 텍스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번역된 다수사본계열의 성경은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 한권 밖에는 없습니다. 또한 사실은 다수사본이 기본교리를 더 온전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본을 비교하기는 어려우니 성경을 비교하는데 킹제임스 성경이 가지는 위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시는 분들의 주장에 의하면 5400여개의 다수사본이 발견되어 있는 현재까지도, 편집된 텍스트 문제로 new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성경을 포함해서 킹제임스 성경 계열의 다른 성경들을 인정하지 않고 400년 된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을 인정하시는데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는 동안 사본에 대한 복잡함과 생경함이 조금은 사라졌을 것이기에 사본에 대하여 기본적인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나열해봅니다.

쉽게 구약은 히브리어가 원문이고 신약은 헬라어가 원문사본입니다. 성경 전체를 번역할 수 있는 정도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원문사본은 구약은 알렙포사본을 비롯한 마소레틱 사본으로 10세기와 11세기의 사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신약은 소수사본계열이 4세기 다수사본 계열은 5세기입니다.

신약성경 원문사본은 현재 5400개가 아니라 5800개가 발견되었고, 이 많은 수의 사본에도 27권 신약 전체를 간직한 사본은 대문자사본 3개와 소문자사본 57개 도합 60개 밖에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약성경은 주후 100~120년에 이미 초기 교부들에 의해 27권 중 20권 내외가 이미 구약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고 성경으로 선포되었으며, 반대로 변개자들에 의해 주후 2세기 약 100년 동안 변개된 말씀들이 왕성하게 기록되었지만 3세기 초에도 초대교회와 사도들이 읽었던 원본을 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원본과 비교를 통한 가짜들의 구별과 원본성경의 확산을 통해 대부분의 가짜 사본은 사멸되었습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의 바탕이 된 다수사본과 현재 더 오래된 원문이 남아 있는 소수사본의 논란이 지금도 확정되지도 못하며 수그러들지도 않는 이유가 무었인가요.

소수사본보다 앞선 2세기와 3세기의 교부들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선포했으며 인용한 수많은 성경구절들 가운데 소수사본에서 잘려 있는 다수사본의 구절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4세기의 감독들의 인용에서도 역시 많은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현재 원문비평은 가장 오래된 원문사본이 가장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초대교회와 교부시대에 사도들과 교회 성도가 읽은 성경은 다수사본인가 소수사본인가에 대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평행선을 긋고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초대교회 이후의 번역사본에 관한 문제입니다. 잠시 빗나간 얘기를 하면 킹제임스성경은 번역의 베이스가 원문사본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라틴불가타역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도 됩니다. 카톨릭 불가타역은 이후에 라틴성경 안에 외경을 끼워 넣은 성경이며 이후의 제네바성경과 킹제임스성경 등 개신교 성경까지도 이 영향으로 외경이 첨가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현존 번역사본은 현존 원문사본보다도 역본연대가 훨씬 빠릅니다. 현존하는 2세기의 올드라틴역은 원문성경보다도 연대가 압도적으로 앞서고 현존하는 70인역 성경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그런데 이 올드라틴역이 약 15세기 후의 킹제임스성경과 일치합니다. 신약성경 올드라틴역도 있는데 당연히 카톨릭의 불가타역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구시리아역과 페쉬타 역시 연대가 앞선 역본인데 특히 페쉬타는 내부의 이문 증거로 2세기의 역본으로 보지만 소수사본지지자들과 연대가 주후 170년이냐 411년이냐를 가지고 지금도 논쟁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역본들이 다수본문을 지지합니다.

현재에 학계에서는 소수사본이 우세하지만 다수사본과 소수사본에 대한 입장은 '다수사본'이 '소수사본'보다 원본이 나중에 쓰였다는 확정적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지금도 평행선 같은 입장차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어느 사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성경에 대한 입장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각자의 견해로 인정하고 각자가 확인한 연후에 스스로의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킹제임스 진영 측의 일부인 말보회의 주요교단에서 이단판정은 받을 만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외에는 사단의 성경이라고까지 주장했으니 받을 만한 걸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무시하고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듯한 주장이 쉽게 주장되고 잘 모르는 일반의 성도분들께서 킹제임스 성경이 문제가 있는 잘못된 이상한 성경으로 오해하게 해서 성경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박탈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 성도 수 중에 가장 많은 수의 교인은 침례교 성도들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킹제임스 성경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이 읽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주의 신실한 성도들이며 주의 성도들이 읽는 킹제임스 성경 자체는 건드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며

 

개신교가 공통분모로 가지는 기초교리를 중심으로 사용하며 그 외의 부분은 오직 성경말씀이 기준이 된 바른믿음의 입장을 제시하여 수많은 교파와 교단을 달리하는 독자들 앞에서 중심이 잡힌 바른믿음의 입장이 되도록 하는 예시로서 최근에 바른믿음이 다루고 있는 이슈를 이용해 적지만 의견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저같은 평생에 무명의 그리스도인을 소망하는 자는 시험이 기회가 아마도 적겠지만, 정목사님 같은 세계를 뛰시는 분께서는 평생에 조심하시는 부분이 명예욕인 것을 꼭 잊지 마시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른믿음이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6-07-11 03: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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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다비드 2016-07-13 01:50:39
내용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