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성로 부활사상 총정리 1

글을 시작하며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를 쓸데없이 강조한다’, ‘죽은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는 등의 주장으로 기성교회가 선포하고 믿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폄훼함으로써, 자신이 고안한 ‘부활복음’을 히트 상품으로 부상시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이하 ‘기진협’으로 표기)의 림헌원 목사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이단성을 간파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권고를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부터 ‘기진협’과 <바른믿음>(대표 정이철 목사)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문제점을 신학적으로 집요하게 비판함으로, 전국 교회들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위험한 ‘거짓복음’임을 인지하도록 노력했다.

이에 대해 김성로 목사는 ‘기이협’의 이인규 씨를 등에 업고 그럭저럭 버텨왔으나 ‘기진협’과 <바른믿음>의 성경적인 비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한 가지 꾀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김성로 목사와 이인규 씨는 ‘기이협’이 ‘부활복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김성로 목사가 그 문제에 답하는 형식으로, 즉 ‘기이협’이 지적한 문제에 대하여 김 목사는 ‘표현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늘성소 제사의 시점을 착각했다’는 등의 변명으로, ‘기진협’과 <바른믿음>의 칼날 같은 비판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김성로 목사는 무엇인가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취했지만, 그러나 그의 태도는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기진협’과 <바른믿음>은 김성로 목사가 부활복음의 이단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했다. 다시 말하면, 이리의 해로운 발톱을 뽑아버리고 순한 양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이협의 비호를 받으며 이단성 짙은 ‘부활복음’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진리처럼 위장하는데 급급했다. 마치 이리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발톱을 숨기고, 얼굴에 하얀 밀가루를 칠해 순한 양처럼 위장하듯이 말이다.

김성로 목사가 그동안 폄훼해 왔던 십자가에 대해 달라진 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의 말대로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이다. 이 말은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주장해 왔던 십자가 폄훼를 숨기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가 수정한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의 메시지 속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속의 완성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라는 외침이 숨어있다(이 부분은 뒤에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는 왜, 끝까지 자신의 부활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는 메시지로 십자가 폄훼를 숨겨가면서까지 부활을 강조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헛되게 하려는 무서운 사탄적인 흉계가 숨어 있다.

김성로 목사가 주장하는 ‘부활복음’은 결국 교회사에 나타난 전통적인 이단들과 그 목적에서 사실상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방법은 다르지만,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과 동일하게 ‘부활복음’도 십자가를 무력화시켜 십자가 없는 ‘부활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아리우스와 바실리데스(도케티즘)의 이단 사상

아리우스(Arius, AD 250년 또는 256년 – 336년)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신학자로서 다정한 성격과 엄격한 금욕주의, 지적인 탁월함,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정신, 확고한 신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참 하나님은 성부뿐이고,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종속된 존재로서 참 하나님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렇다면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문제 삼은 그의 주장을 왜 이단으로 정죄했을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성자)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인 성경을, 특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예를 들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등-을 거짓말로 만들어 버린다.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십자가 사건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될 수 없으며, 성자 하나님이 죽으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닌 인간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이 없게 된다.

초기 영지주의 교부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 AD 117-138년)가 가장 먼저 주장한 ‘도케티즘’(기독가현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리우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대에 교회들은 이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예수의 인성을 문제 삼은 ‘도케티즘’은 왜 이단으로 정죄했을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인 성경을, 특히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예를 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요1:14)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죄인들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해서,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대속 제물이 될 수 없게 된다.

위의 두 주장이 이단으로 정죄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의 믿음을 구원이 없는 헛된 믿음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와 영지주의를 통해 노렸던 사탄의 흉계였다.

문제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도 이런 이단들과 그 목적에서 맥을 같이 한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의 ‘부활복음’은,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과 방법은 다르지만 십자가를 무력화시켜 십자가 없는 ‘부활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목적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가 주장하는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라는 메시지는 단지 표현만 슬쩍 바꾸어 십자가도 복음인 양 위장했을 뿐이지, 그 속에는 여전히 십자가는 ‘부족한 것, 죽은 것, 그러므로 쓸데없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생각해 보라! 그가 외치는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는, 결국 시간적으로 십자가보다 뒤에 일어난 부활에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리라면, 십자가는 구원의 시작이나 과정 정도로 전락해 버린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대로 십자가는 저절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며, 그 십자가를 믿는 자들의 믿음은 구원이 없는 헛된 믿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이제부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왜 거짓 복음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무력화시키려는 이단적인 주장인가를 성경 말씀을 근거로 살펴보자.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적 기능

하나님의 구속사를 요약하면 “성육신->십자가->부활->승천(하나님보좌 우편)->재림(최후의 심판)->영원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에 대항하여 ‘기진협’과 <바른믿음>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적 기능에 관한 것이다.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의 완성인줄 믿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 구속에 관여한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반면에 ‘기진협’과 <바른믿음>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었으므로,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고백을 고수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적 기능은 무엇인가? 성경은 과연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지원하는가?
 

십자가의 구속사적 기능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일하심이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대신 죽으심으로 죄인의 구속은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자신의 구원의 방식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구약 성경에서 십자가의 예표로, 출애굽 때 어린 양의 피 바름의 퍼포먼스와 성전(성막)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러나 여기 어디에도 피 흘리며 죽은 어린양이나 피 뿌리고 죽은 제사 제물의 부활은 암시조차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이 구속의 복음임을 제자들에게 천명하셨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2-13).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베푸신 최후의 만찬에서, 마실 포도주에 대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김성로는 바울이 부활을 강조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몸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와 관련해서 부활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부활을 구원의 능력으로 말한 적은 없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부활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였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한 복음은 십자가였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롬3:25)와 함께 롬5:6, 8, 10 등을 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와 함께 고전1:23; 2:2; 11:26 등을 보라.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와 갈6:14를 보라.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와 엡2:13, 16; 5:2 등을 보라.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히브리서 기자가 전한 복음도 십자가였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와 히9:14-15; 9:20-22; 히10:10을 보라.
 

부활의 구속사적 기능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와 관련시키며(롬1:4; 8:34; 엡1:20 등), 또 부활의 최종 목적인 최후심판 때 성도의 몸의 부활과 관련시켜 언급한다(고전6:14; 15:12, 16, 20; 고후4:14; 빌3:10-12; 살전4:14; 골2:12; 3:1 등). 왜냐하면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구속을 완성시키는 마침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이전의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구속의 궁극적 완성인 최후의 심판자로 다시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맞는다면, 출애굽의 어린 양의 피나 레위기의 속죄 제사에는 부활이 없으므로, 구약의 구원의 예표들은 불완전한 계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또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이 전한,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의 십자가의 복음은 성경에서 지워야 하며, 바울이 언급한 부활도 김성로 목사의 주장대로 수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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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