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파는 교회를 ‘거룩의 정도(精度)’로 구분한다. ‘보다 부패하지 않는 교회’, ‘더 부패한 교회’로 구분하여 ‘한 교회’의 명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칼빈파는 부패를 이유로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더 부패한 교회가 정죄하고 박리(剝離)시킬 때는 주의 말씀대로 가차없이 그 집단에서 퇴출되는 기쁨과 영예를 선택한다.

필자는 트렌트 회의에서 이신칭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아나떼마’(annathema, 저주)를 기쁘고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정죄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일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허용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도침례까지 시행한 한국교회 모습을 비극적으로 생각한다. 다시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반드시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반복해서 고백해야 한다. 마치 유월절에 홍해를 건너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듯이, 지난 과오를 규칙적으로 고백하며 과거의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거짓 교회(부패가 진행하는 교회)’는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쉽게 볼 수 있다. 거짓 선지자(공급자)가 교회에서 활보할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 ‘거짓 성도(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성도는 마치 ‘스파이 게임’처럼 서로 잘 알고 협력해서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유린한다.

성경에서 거짓 성도에 대해서는 심각한 지적이 없다. 그것은 사도가 권징(disciple)을 통해서 바로 세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목사보다 성도가 심각하게 피해를 받는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목사와 성도의 판단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말자. 그 이상의 판단기준으로 더욱 엄격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것을 교묘하게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더 악랄한 거짓 교사도 있다. 어쩔 수 없다.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짓 교사에게 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위안을 삼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의 안위를 스스로 취하는 고독한 결단의 시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구주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전진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거짓 목자)는 배고픈 이리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허물어진 ‘울타리 구멍’으로 들어온다. 참 선지자(참 목자)는 주께 순종한 양으로 사명을 받아 반드시 ‘양문(정문)’으로 들어온다. 양무리 안에는 양과 염소가 함께 있다. 참 목자는 양과 염소에게 동일한 인도와 동일한 꼴을 준다.

염소도 목자가 제공하는 인도와 꼴로 충분히 살 수 있지만 만족이 없다. 거짓 목자는 양과 염소에게 동일하게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자기가 먹이고 싶은 꼴을 준다. 반드시 양은 쇄약해지고, 염소는 강해진다. 그럼에도 염소는 거짓 목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은 포기하지 않는다. 염소의 갈등은 참 목자일 때 마음은 평안하지만, 육체가 약해진다. 거짓 목자일 때는 마음은 불편한데, 육체가 포동포동 쌀이 찐다.

염소(거짓 신자)가 많은 교회는 ‘거짓 목자’를 선택할 것을 결정한다. 거짓 목자나 거짓 신자는 동일하게 마음의 평안이 아닌, 배의 만족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합의를 한다. 이 합의는 악마적이기 때문에, 양들의 육체적 협력으로 깰 수 없다. 거짓 교회는 결국 거짓 목자와 거짓 신자가 결탁한 결과이다.

이 거짓 교회를 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양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거룩하게 서서 때를 따라서 잘 박힌 못(금쟁반의 옥구슬)처럼 적실한 말을 해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는 많은 거짓이 결코 자기주장을 할 수 없다. 진리의 사람이 합당한 진리를 선포했는데, 거부를 당해도 또 다시 다음 기회가 있다. 결국 이러한 영적전투는 그 집단에서 퇴출을 당하는 시기까지 진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택자를 이 땅에서 결코 홀로 놓아두지 않으신다. 영적전투의 치열함은 가장 큰 침묵이다. 가장 밝은 빛이 지성소의 어둠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진리는 우리의 무거운 침묵에 있다. 그 침묵의 무게가 없다면 경건을 연마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침묵)이 빛을 발하면 세상은 아침이 되고 낮이 된다. 우리 교회와 세상이 어둠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면, 바로 그리스도인인 나, 그리고 당신이 세상의 어둠에 우리의 빛이 흡수되기 때문이다. 블랙홀처럼 우리를 빨아드리는 흡인력을 주께서 보호하신다. 그리고 빛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 60:1-3)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