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그리스도인이 형제와 이웃,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행위가 ‘중보기도’는 아니다. 기독교에서 ‘중보(仲保, mediation)’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중보자(仲保者, the Mediator)’,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천상 통치에 적용하는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웃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 intercession)’라고 했다. ‘도고’라는 단어는 중국어를 차용한 단어이다. ‘중보’라는 단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 신사도 운동가 피터 와그너의 ‘intercession’을 한국 교회가 ‘중보기도’로 정착해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형제를 위한 기도라는 생각 이전에, 신사도 운동의 영향에 있는 기도 운동이라는 것을 유념하면 된다.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에 의해서 1970년대부터 시작했다. 신사도 운동은 오순절주의 운동에 기초했다. 1905년 감리교 목사 찰스 파함(1873-1929)은 휴스턴에서 ‘사도적 신앙(The Apostolic Faith)’ 운동을 전개한 것이 오순절주의의 시초이다. ‘방언’을 성령세례의 가시적 표적으로 삼았다. 피터 와그너는 더욱 더 과격하게 ‘신사도 운동’으로, ‘사도 회복’과 함께 ‘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에 도고(intercession) 운동’을 주장했다.

예언 운동, 축귀, 예수와 사람 사이에서 중보사상을 주장했다. 오순절주의는 가시적으로 성령임재확인 운동이었다면, 신사도운동은 계시전달사상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가능까지 개조했다. 오순절주의는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적극적 사역을 목표했다면, 신사도운동은 높은 단계의 수련자가 하위단계의 순련자에게 어떤 혜택(기름부음)을 제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개조(transformation)시켰다. 두 운동의 공통은 ‘방언’이다.

피터 와그너는 ‘중보(mediation)’은 사용하지 않고, ‘도고(intercession)’을 사용했다. 그런데 개념은 예수와 인간 사이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국에서 도입할 때 아예 ‘중보기도’로 번역해서 정착시켰다. 이제 넓게 정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잘못되었지만 정착되었기 때문에 잘못을 유지한다는 발상은 매우 정치적이다. 진리는 결코 잘못이 드러나면 최소한 인정하고, 개혁을 약속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유 사역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은 십계명 중 3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예장 합동 2000년 총회에서 ‘중보기도’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인데, ‘타인을 위한 기도에 중보기도를 사용하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하고 사용을 금지시켰다. 대안으로 ‘합심기도’, ‘도고기도’, ‘청원기도’를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일상화된 용어라고 일축하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전유된 단어를 임의로 자기화시키는 것은 신사도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천주교보다 더 세속화된 원리를 도입하여 활용하면서 개신교, 장로교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혹스럽다. 마리아 중보(Mediatrix)와 성자 숭배(Saint Worship)를 주장하는 천주교보다, 공인받지도 않는 임의 개인이 독단적으로 중보기도, 예언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사도운동이다.

미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JAMA 중보기도 컨퍼런스' 포스터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중세 교황주의가 고해성사 방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죄권을 남발한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한 것이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은 성경에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귀신추방이나 중보기도’를 도입시켰다. 성경에 근거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개혁된 교회는 성경의 바른 이해를 근거로 개혁을 유지하고 진행한다. 계시운동을 주장하는 신사도운동에서 성경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천주교의 가르침을 인정하면서 더 광란적인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도 방언을 인정하며 개신교 방언자들과 동일 영성을 확인하고 있는 상태이다. 방언이든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할 수 없다. 중보자는 오직 유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개인을 위한 기도를 방언으로 했고, 신사도주의자들은 타인을 위한 기도도 방언으로 길게 기도해서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언으로 하는 중보기도’는 ‘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인지 저주하는 것인지 분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중보기도를 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신다. ‘신자가 하는 중보와 그리스도께서 하는 중보’가 발생하는데, 한 기도는 짝퉁기도가 된다. 어느 기도가 짝퉁인가? 짝퉁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열심히 드리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스도 중보 사역을 훼방하면서 행하는 신자의 중보기도에 어떤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거기에 악을 더해서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그것도 타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또 성령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스도인에게 사도들은 ‘사랑하는 자’라고 불렀다. ‘사랑하는 자여’ 그대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대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전하라. 하나님께 도고할 때도 구체적으로 아뢰어야 한다. 중언부언하는 천만마디의 말보다 깨닫는 말 한마디가 유익을 준다(마 6:7-8, 고전 14:7-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