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성령의 충만해야 한다(엡 5:18, 개역/※개역개정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번역했다. 영역으로는 “be filled with the Spirit”이다. 개역개정은 성도를 충만하게 하는 주체가 성령으로 이해되도록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형태 번역은 행 2:38이다. the gift of the Holy Ghost(KJV), ‘성령을 선물로’(개역)를 ‘성령의 선물’(개역개정)으로 개정 번역했다) 성령 충만 받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성도 당사자의 선택이나 열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성령 충만을 소유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 구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성령은 구하여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누구에게 구할 것인가?”에 대한 제시이다. 애매한 문장은 ‘성령의 인도함’이다. 성령께서 백성을 인도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백성을 인도하는가? 교회와 백성을 주관하고 인도하는 분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왜 ‘성령의 인도’라는 말을 사용할까? 성령의 인도라고 했을 때에 그 인도를 성령에게 구하는 구도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께 기도하는 실례가 성경에는 없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성령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위격에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경과 교회는 주께 기도하는 모범을 주었다. 그 모범을 벗어나려면 그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요한계시록 5:7-8에서 어린양이 보좌에 앉자 두루마리를 취하자, 어린양 앞에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기도)가 올라왔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은 기도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참 기도, 완전한 기도가 주 예수의 구속 사역에 있다. 예수의 구속 사역 이후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요 14:1-15). 성경은 명백하게 주께 기도하는 용례와 명령이 있다.

그런데 왜 성경의 용례가 없고 사도의 가르침도 없는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모습이 교회에 있는가? 삼위일체를 사색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동일하심(homoouison)이다. 성령은 공회의 논쟁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몬타누스 운동(Montanism, 156-172)은 공회의를 거치지 않고서도 배격할 수 있는 쉬운 이단(계시계속주의, 여선지자, 열성주의) 사상이었다. 터툴리안이 그리스도인의 의무 강조와 임박한 종말에 동조하면서 합류하기도 했지만 보편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다.

신자의 열성을 강조하면 결국 성령주의로 가게 되는 것을 기독교 역사에서 2,000년 동안 반복하고 있다. 그 실패 전형을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21세기 현재 몬타누스주의가 교회 일상이 되었다. 성령을 구하고 여선지자가 난무하다. 열정 그 강렬함의 유혹,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인간 구원을 도저히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 본성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부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급하게 성령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기를 부른 주님의 이름을 고백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 복음을 증거한다. 그 복음의 영광에 매료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자기 열심으로 자기 기독교를 이루려 한다. 기독교는 주 하나님이 세우셨고 이루신다. 신자가 방관자는 아니지만 주체도 아니다.

교회를 성령으로 이루려는 사람들은 몬타누스주의 패턴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열성을 성령에게 구하고, 성령이 함께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기독교 교리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로부터 온다고 확정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구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성령을 구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믿음의 주를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예수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힘써 부르는 것이 성령을 구하는 것이며 성령 충만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수동태 명령형은 주의 이름을 구하는데 성령이 충만하는 구도를 밝혀준다.

성령을 받으려는데 성령께 구하는 방식은 매우 황당하다. 성령은 단독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령을 구하는 방식을 거부했다. 교회는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주의 몸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구하지 말자, 그럼에도 혹시라도 성령을 구하고 싶다면 아버지와 아들께 구하자. 성령께서는 예수를 구하도록 촉구하신다. 성령께서 원하지 않는 것, 성령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