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WCC의 한국 지역 협회인 NCCK의 website에서 이 단체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내용이다(5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이 땅에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 곧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선교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대립과 차별을 해소하며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힘쓰고 인권을 증진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되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소외당하는 자와 차별받는 자의 입장에 서는 예언자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세계를 보전하고, 모든 생명이 위협받지 않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서 알아 가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사랑으로 하나 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소외당하는 자와 차별받는 자들 입장에서 위해 주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는 이야기한다.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그 외에 다른 종교들도, 마음을 합하고,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서로 이해하고 안아 주며 하나되는 사랑을 하자는 메세지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러한 메세지는 가장 큰 가치를 제시하는 것으로 인정이 된다. 왜냐하면, 에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a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b)”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b)”라고 대답을 하셨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라는 바울의 말씀처럼, 주님이 주신 새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인 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구제하고 희생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는 메세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메세지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3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참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를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 수 있는가? 마음이 없이 내게 있는 일부는 나누어 주더라도 모든것을 나누어 주는 구제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한, 마음 없이 내 몸을 남을 위해서 불사르게 나누어 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 행동 자체가 사랑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사랑”이 뭔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참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진정한 주님의 계명에 순종을 하는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이나,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는 희생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요한일서 4장 16b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결국 사랑의 정의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고,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제야 사랑에 대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눈으로 선하다고 느껴지는 모습들로, 우리 안에 나름대로의 세상적인 사랑의 정의가 자리를 잡아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하는 인간적인 희생이나 헌신이, 아무리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일 일찌라도,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든지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러한 사랑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모든 종교가 결국 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모양으로 보여진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결국,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런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참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히브리서 11절 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듯이 알 수 있는 증거가 되고, 그분을 알고자 소원하고 바라는 것에 실상이 되는 것이 곧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참 사랑을 알 수 있게 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을 알고,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지키는 삶, 그것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희생이나 헌신을 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며, 하나님이 바라보실 눈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참 이웃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부모의 사랑을 볼 때도 부모 사랑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입고 잘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 반면, 현재 고달프고 힘들어도 훈련하고 준비하여서 더 나은 미래를 누리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랑으로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 우리가 볼 때에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높은 수준의 사랑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에 비해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이어서 가끔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라도, 하나님의 왕국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얻기를 소원하시는 수준의 사랑이시다.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시기를 소원하시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것이 곧 참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마음으로의 사랑을 알고 나면, 다른 이웃을 위해서 최선을 바라는 우리의 사랑의 마음도 그 수준이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나, “자연세계를 보존하고, 모든 생명이 위협을 받지 않고 번성 하도록” 하는 삶을 누리게 돕는 선행을 넘어서, 그 한 영혼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축복을 나누고자 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을 두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영혼 영혼에게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귀한 축복을 주시고자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그러한 마음으로 나에게 매 순간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사하고 감격하여서, 하나님을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서 사랑하고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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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현, Stanton University 부총장
Kadesh Inc. (Puriton) 부사장
Talbot School of Theology (Master of Divinity)
Johns Hopkins University (Master’s in Applied Economics)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Master’s in Political Management
University of Phoenix (Doctor of Management in Organizational Leade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