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의 죽산 박형룡 박사의 온전한 순종 소감 1

고)박형룡 박사가 합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특별하다. 통합과 합동이 WCC 문제로 갈라질 때, 지금의 합동에는 신학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합동은 박형룡 박사를 구심점으로 삼았고 박형룡 박사를 신학의 기둥으로 높였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으로 인해 합동이 WCC와 종교다원주의에 물들지 않았다고 특별하게 강조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1897년에 태어났고 1978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박형룡 박사는 1930년대 초반에 박사논문을 완성하셨다. 그때는 외국의 신학 서적들이 전혀 번역되지 않았을 때이다. 박형룡 박사가 아무리 영어를 잘했어도 외국의 신학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보름 또는 한 달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필자는 외국의 신학자들의 서적들을 한 달에 20권 이상을 읽고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다. 필자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외국 신학책들이 번역되어 있으므로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구입하여 빨리 소화하기 때문이다. 번역된 책을 쉽게 따라가다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을 만나면 더 자세하게 읽는다. 그리고 논문 등을 위해 더 정확한 내용이 필요하면 그 책의 원서를 사서 그 부분만 다시 읽는다.

그러므로 필자의 신학적 사고가 1930년대 초반에 박사 논문을 완성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사고를 능가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영리해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박형룡 박사는 힘들게 영어로 벌코프 등의 외국 신학책들을 간신히 읽고 배우기에 급급했던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다 번역된 저명한 신학자들의 책들을 한국어로 쉽게 읽고 내용을 파악한다. 서로의 독서의 양과 신학 지식 습득의 속도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

이미 무덤 속의 마른 뼈가 되어있는 박형룡에게 자신들을 합체하여 동귀어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승구-김재성 교수의 농동순종 교리를 합동 이대위가 이단사상으로 결정하면, 능동순종을 가르쳤던 박형룡을 합동이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어이없는 태도이다.

후손들이 선조들의 잘못된 신학을 발견하면 겸손하게 바르게 고치는 것이 함께 하나님 백성된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하나님이 중요한가? 우리 선배가 중요한가? 잘못된 것이라도 박형룡이 가르쳤으니 틀렸다고 말하지 말고 넘어가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 믿으라고 덫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나에게 매질하려고? 나를 때리는 것은 합동의 교주 박형룡을 때리는 것인데, 할 수 있겠어? 어디 한번 해 볼테여?”

어떤 사람들이 이단성이 짙은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다 이제 그 진실이 드러나려고 하자 이런 물귀신 작전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이해하시지만, 알고서도 지은 죄에 대해서는 혹독하시다. 이제는 능동순종 교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을 왜곡하는 이단사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잘 생각해야 자신의 남은 인생과 자식들의 인생이 좋을 것이다. 

능동순종 교리의 근거를 계시되어 기록된 성경 속에서 한 구절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나는 그 동안 <바른믿음>에다 작성한 능동순종 교리를 비판하는 모든 기사들을 내릴 것이다. 신앙의 절대적 근거는 오직 성경이다. 신학은 신앙의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신학자들의 신학은 신앙의 절대적 근거인 성경을 설명하는 학문일 뿐이다.

신학자들의 학문이 우리를 구원하고, 신학자들의 학문이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직 성경이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 66권만이 우리가 하나님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절대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 신학자들의 신학은 교회에게 그것을 요약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학문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내용을 신학이 가르치고 있으면, 그 신학은 거짓 신학이다. 특히 구원에 대해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신학은 이단신학이다.

이것이 능동순종 교리의 심각성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능동순종 교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구원의 방식(원리)임을 증거하는 성경의 말씀을 한 줄이라도 제시하면, 나를 <바른믿음>을 폐쇄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약속한다.

죽은 박형룡의 신학을 계속 빨면 우리 속으로 구원의 단물이 더 풍성하게 흘러 넘치는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왜 과거의 신학자들의 교훈과 어록에다 모든 소망을 거는가? 그렇게 신학하라고 누가 가르쳤는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신학은 그렇게 하는 학문이라고 배웠는가?
 

총신 신대원장 정승원 교수(이후 정승원)의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holistic) 순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보았다. 올바르지 못한 신학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논문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이대위 등에 보내면서 박형룡도 능동순종을 가르쳤으니 합동은 더 이상 능동순종을 문제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은근히 협박하는 일이 있다는 소문이 돈다. 정승원의 “죽산 박형룡의 온전한(holistic) 순종”이라는 논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성부와 성자 관계를 경세적(economical) 관계로 본다면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지만 구속 언약에 참여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ontological) 관계로 본다면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따른 능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다.” (정승원)

정승원은 영원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 속에서 성자 하나님의 역할을 능동적 순종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중보자 삼으시고 자기의 백성을 창조하시기로 의논하시고 계획했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구속언약이라고 한다 (마이클 호튼 2017, 109). 그러나 이 언약의 실체적 증거를 성경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렇게 유추되어지는 진리라고 이해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을 우리가 문제시하는 이유는 율법주의 이단사상을 교회에 도입시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에게 영생의 자격을 인정하시는 분이라는 이단적 전제가 능동순종 교리에 깔려있다. 단지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 강조사항이라면 우리는 능동순종 교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켜서 얻으신 의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고 하므로 우리는 죽을지라도 거부하는 것이다.

정승원은 박형룡의 말을 인용하여,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공덕을 통해 한 백성을 만들어 내자고 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다는 주장한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내부에서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얻으시는 공로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겠다고 의논하셨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말인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백성을 만드시자고 의논하셨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한 자기 백성을 가지시고자 의논하고 작정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집행하여 자기 백성과 그 백성이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무대로서 만물을 무에서 만들어 내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실행에 대해 서철원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작정하신 창조 작정을 구현하여 만물을 존재로 불러내는 일은 아들 하나님이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성이 동일하므로 아버지의 작정을 아들이 수행함은 당연하다. 성경적인 말로 바꾸면 아버지는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 (서철원 2018, 277)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경륜 안에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게 실행하였다. 그런데 정승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의미하는 영원전의 구속언약 속에 이미 성자 하나님이 능동순종 사역, 즉 그리스도가 율법준수의 공덕으로 성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가지시려는 작정을 이루시려고 결정했다고 한다. 박형룡 신학을 빨더라도 좀 그럴싸하게 빨아야 하지 않을까? 이건 아니다.

“특히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면서 한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의 예정과 그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율법에 복종’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유대인의 율법행위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승원)

사탄의 거짓 율법주의에 포로되어 있던 유대인들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자격(공로)를 만들고자 율법을 억지로 지켰으나, 그리스도는 성부의 예정을 따라 자의로 율법을 지켰다는 주장이다. 도이건 모이건 간에, 구원이 율법으로부터 나오므로 이미 구원을 가지셨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을 위해 율법을 대신 지켰다는 의미이다.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생을 위한 공덕을 대신 만들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신경쓰신 흔적이 나오는가? 모세의 율법조항들을 지키는 그 사람에게 영생의 자격이 인정된다는 가르침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의 복종은 또한 대리적 복종이었다. 그는 우리의 대신이었고 우리의 이익을 위하시었다. 그가 율법 아래 있은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갈 4:4,5). 그는 구속주의 성격을 가지고 율법 아래 복종하신 것이었다.” (정승원이 인용한 박형룡의 말)

정승원은 이와 같은 박형룡의 말을 인용하며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대신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려고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박형룡 박사가 가르쳤다는 것이다. 정승원은 박형룡이 갈라디아 4:4-5절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그러나 이 구절은 능동순종 옹호자들에 의해 오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모조리 완벽하게 지켜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처럼 이 구절을 오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합당한 반역죄를 범한 인간을 대신하여 그 죗값을 자기 몸으로 완전하게 지불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었다는 의미이다.

정승원이 갈 4:4-5절의 뜻을 몰라서 비판하지 못했다면, ‘속량’(redeem)의 의미를 생각하기 바란다. 속량은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지키시어 죄인을 속량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구상에 몇이나 되는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고, 자기를 믿는 신자들에게 그 공로를 적용하여 하나님의 저주(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것이 '속량'(redeem)이다.

우리 교회 초등부 애들도 아는 상식이다. 정승원은 언제쯤 갈 4:4-5절이 능동순종과 무관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총신 신대원하는 교수가 이런것 정도를 쉽게 방어 못해주면, 대체 어디에다 쓸까? 억울한 사람 이단으로 모는 문서에 이름이나 올리는 정치 신대원장이나 할 것인가?

그런데 합동 신학의 아브라함 박형룡은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에게 복종하심으로 우리를 속량시키려고 성육신하신 것처럼 기술하여 오늘의 이 혼란이 일으키셨다. 갈 4:4-5절이 반역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저주(율법의 저주) 하에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기의 의로운 인격과 목숨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었다는 뜻임을 정승원이 알기 바란다. 

“언약에 따른 의무감과 칭의를 위해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은 죄인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은 구속주 성격을 지녔다. 구속주이시지만 언약의 파트너로서 언약의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우리처럼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신 것으로 볼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는 구속주도 아니시고 언약의 주도 아니시게 된다.” (정승원)

정승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기는 했으나 우리처럼 자기의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언약의 주로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율법을 지켜 언약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디의, 무슨 언약을 완성하시고자 그리하셨는가? 능동순종 옹호자들은 창조언약-자연언약-율법언약-행위언약 등으로 불리우는 아담과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언약개념들이 모두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죄도 없고, 의도 없고, 자기 백성도 아닌 변종의 아담, 또는 보호관찰 대상 아담, 또는 에덴동산 단기 세입자 아담을 만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담에게 영생을 위한 공덕을 만들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메리데스 클라인 2016, 149, 153-154, 156-159).

하나님의 아담 창조에 대한 이런 주장들은 다 이단사상들이다. 앞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니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라서 떠들었다. 개혁신학은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성경의 판단을 받는 신학이다. 성경 어디를 근거로 이딴 소리들을 떠들었는가?

개혁신학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와 공의회가 만든 교리들을 중요한 자산으로 여기는 신학이다. 초대교회의 어느 교부가 이런 망언들을 지껄였는가? 어떤 공의회가 이런 신학을 인정했는가? 개혁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일반적 유산들과 칼빈의 고유한 종교개혁 신학을 진리로 따르는 신학이다. 어떤 종교개혁자들이 아담에 대해 이런 개소리를 발하였는가? 칼빈이 언제 아담에 대해 이런 말들을 했었던가? 정승원이 대답해 주면 좋겠다. 

아담에 대한 이런 소리들은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신학 활동이 중단된 후, 우르시누스를 필두로 서서히 대두되었다. 그리고 윌리암 퍼킨스의 청교도 운동의 신학적 동력원, 즉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조 안에서 개인의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기 특이한 청교도주의를 만드는 신학으로 출현했다. 그리고 1747년의 웨신서를 통해 공식화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신학들이 이것을 따르게 되었다.

한번 만들어진 신학들이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영원한 것으로 반드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인가? 절대로 교회는 그 이론들에 토를 달아서는 안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개혁신학은 계속 성경으로 돌아가는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또한 박형룡은 행위 언약 차원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신 율법은 ... 아담에게 행위언약으로 주어진 율법이니 완전한 순종을 생명의 조건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첫째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둘째 아담이 지켜서 인류의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기로 하신 것이었다’라고 한다. 박형룡은 행위 언약을 ‘완전한 순종을 생명의 조건으로 규정한 율법’으로 해석한다.” (정승원)

박형룡 박사가 퍼킨스-웨신서의 그릇된 언약개념을 그대로 따랐다는 정승원의  간접적 주장이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저주받은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건네 주었다고 박형룡 박사가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승원에게 물어보자. 
1)대체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2)우리 대신 우리의 영생을 얻으시려고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지키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의로우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저주 하에 있는 죄인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아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었다고 설명하면 나는 언제나 OK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행위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율법 조항들을 모두 지키시어 우리의 영생을 획득했다고 하니, 미치지 않고서야 참을 수 있을까?

“박형룡은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신 율법은 3가지 국면을 가지고 있다면서 먼저 행위언약이고, 둘째, 모세의 율법이고, 셋째, 도덕적 율법으로 사람의 본성과 하나님의 말씀에도 계시되었다고 말한다.” (정승원)

박형룡 박사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세 국면을 다 완성하시어(지키시어) 우리를 구원했다고 가르쳤다는 의미이다. 이런 내용을 비판하지 않는 정승원에게 묻고 싶다. 성경 어디를 근거로 하는 말인지 설명해 주기 바란다. 율법의 기능에 대해 성경은
1)하나님이 먼저 율법을 보내어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의 상태임을 알게 하시고,
2)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절망에 빠지도록 율법으로 계속 지근지근하게 밟아주셨고
3)대신 죽으시는 그리스도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니, 그리스도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성경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다 (갈 3:24-25). 

“박형룡은 벌코프를 인용하면서 ‘최종으로 그리스도가 만일 사람에게 부과된 형벌을 받으셨을 뿐이면 그의 사역의 열매를 나누어 가진 자들은 아담이 타락되기 전에 있던 바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즉 아담의 타락을 치유한 수동적 순종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과 모세 율법과 도덕적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정승원)

박형룡이 아담 창조에 대한 이단사상을 주장했다는 의미이다. 아담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하나님 백성도 아닌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이다. 아담이 스스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백성이 되기에 합당한 공덕을 준비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의미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죽었다고 하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를 회복하여 자기 백성 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선배들이 만든 엉터리 신학을 박형룡이 그대로 따르고 복창했음을 설명하는 말일 뿐이다.

“흥미롭게도 박형룡은 행위언약을 율법이라 명명한다. 이 행위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이것을 지킬 의무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변치않는 공의의 원리들 위해 설립된 것’이라는 말이요 따라서 원리상 그 의미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행위언약으로 영생 얻는 실제적 방법은 인간의 불의로 인해 사라졌으나 그 방법의 기본원리로는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을 통하여 그 원리를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정승원)

정승원의 이 말은 매우 엄청난 내용이다. 처음 아담에게는 율법을 지켜(행위언약) 영생을 얻을 능력이 있었으나, 아담의 타락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 행위언약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능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본 원리상으로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 길이 계속 남아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획득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왜곡하는 이단사상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 길이 기독교 속에 있으나, 사람이 못하니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영생이 획득되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정승원은 이단 시비에 휘말리게 될 수 있다. 

1)성경 어디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지,

2)율법으로 영생얻는 길,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길, 두 가지를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죄인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을 택하여 구원에 이르면 된다는 가르침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3)성경 어디에 그리스도가 영생을 주는 율법에 자기를 복종시켰다고 나오는가?

성경은 오직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자기를 우리의 죗값으로 드리심으로 죄용서를 만드시고, 성령을 부으심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연합시켜 자기의 의를 전가하여 우리에게 칭의를 주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3,14)

칼빈과 박윤선과 서철원 박사는 율법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 기능은 기독교 속에 처음부터 없었다고 가르친다.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기독교강요, 3.11.3)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 (박윤선 2015, 126)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 (서철원 2018, 48-49).

논문의 나머지 부분을 다음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 문헌>

마이클 호튼. 언약신학. 백금산역. 부흥과개혁사. 2017
서철원. 2018. 하나님론. 쿰란, 277
메리데스 C. 클라인. 2007. 하나님 나라의 서막. 김구원 역
박윤선. 2015,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존 칼빈. 기독교강요
서철원. 201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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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