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1)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이단적인 교리들이 생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그것이 이단적인 위험한 교리임을 모르고 수용하며 가르치는 경우들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보여주듯 번역은 결코 원문의 의미를 100% 반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만큼은 원문에 가장 가깝도록 정밀하게 번역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의지만 있으면 어느 정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의 무성의와 무능 때문에 치명적인 오역들이 양산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개역개정(한글개역)이 다른 한글 번역 성경들보다 훨씬 더 많은 오역이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비교적 나이 어린 자들과 초신자들을 위해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쉬운 성경”이 개역개정보다 훨씬 더 번역을 바르게 잘했다).

필자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개역개정의 오역 상당수에서 번역자들의 어쩔 수 없는 실수가 아니라, 대충 대충이라는 무성의함과 무능력 때문임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의 오역과 미진한 번역, 그리고 전후문맥을 놓친 해석 등으로 인해 생겨난 이단들이나 엉터리 교리들이(예를 들면 ‘부활 복음’, ‘알이랑 민족’, ‘지렁이 기도’, ‘방언 기도’, ‘능동 순종’ 등) 상당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성경의 오역에 대한 경각심을 한층 높여야 한다.

개역개정(한글개역)의 오역이 어느 정도인지 다음 예들을 보라. 이런 수준의 번역들은 개역개정 전체에 차고 넘치는 형편이다.
 

눅12:31-32의 치명적인 오역들

예수님의 말씀들은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지만, 그럼에도 아래 제시한 말씀은 적어도 눅12장 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이 개역개정에서 얼마나 무성의하게 오역되었는가를 밝힘으로써 독자들께 성경의 오역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1-32)

주의 제자들이 이 땅을 살면서 구해야 하는 것은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 성경들은 거의 다 이 부분을 오역함으로써,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본문의 치명적인 오역 두 가지는 “적은 무리여”와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이다.

“적은 무리여”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to. mikro.n poi,mnion”(토 미크론 포임니온)이다. 여기서 “무리여”에 해당되는 “poi,mnion”(포임니온)은 “양 떼”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개역개정에서는 “무리여”로 오역하고 말았다. 영어 성경은 대체로 “poi,mnion”(포임니온)을 “flock”으로 제대로 번역했지만, 한글 성경은 ‘공동번역’만 “양 떼들아”로 바로 번역했고, 나머지 모든 번역 성경은 “무리”로 오역했다.

개정개역에서 보통 “무리”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crowd)을 의미하는 “o;cloj”(오클로스)이다. 이런 의미의 “o;cloj”(오클로스)를 본문의 “적은 무리여”(눅12:32) 이전의 근접 문맥에서 찾는다면, 눅12:1(그 동안에 무리/o;clou/오클루/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과 눅12:13(무리/o;clou/오클루/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의 “무리”일 것이다.

이 두 케이스는 모두 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의미하는 “o;cloj”(오클로스)를 “무리”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같은 문맥 속에 있는 눅12:31의 “poi,mnion”(포임니온)을 개정개역에서 다른 곳에서의 “o;cloj”(오클로스)와 동일하게 “무리”로 번역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지이며, 무성의이다.

왜 그런가? 이는 “o;cloj”(오클로스/crowd)가 ‘세상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군집’을 의미한다면, “poi,mnion”(포임니온/양 떼/flock)과 “pro,baton”(프로바톤/양/sheep)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특별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도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시100: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70인경: 시99:3/pro,bata/프로바타/이로다).

특히 렘13:17(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70인경: poi,mnion/포임니온/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을 보면, 곧 바벨론의 포로가 될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을 눅12:32의 “poi,mnion”(포임니온)과 동일하게 “양 떼”(poi,mnion/포임니온)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양”(pro,baton/프로바톤)과 “양 떼”(pro,baton/포임니온)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특별 용어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행20: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poimni,w|/포임니오/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에서, 베드로는 벧전5: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poimni,ou/포임니우/ 본이 되라)에서 “주의 자녀들”을 “양 떼”(poi,mnion/포임니온)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도 수많은 무리들(o;cloj/오클로스) 중에, 진짜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하기 위해 “양 떼”(poi,mnion/포임니온)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개역개정에서 이를 무성의하게 “무리”라고 번역해 버렸으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역개정의 “적은 무리여”가 별 문제가 없는 번역이라면, 어떤 “무리”(o;cloj/오클로스)라 할지라도 “적은 무리”이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적은 양 떼”, 즉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적은 양 떼”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무서워 말라”고 멀씀하신 까닭이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시기를”로 번역된 헬라어 “dou/nai”(두나이)는 “주다”(give)의 의미를 가진 동사 “di,dwmi”(디도미)의 ‘과거 부정사’이다.

그러므로 “기뻐하시느니라”로 번역된 “euvdo,khsen”(유도케센)도 당연히 “기뻐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euvdoke,w”(유도케오)의 ‘단순 과거’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를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셨느니라”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주어졌다는 것은 마12: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과 눅17: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힘이 없는 “적은 양 떼”가 이리 떼 같은 세상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적은 양 떼”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미 주셨고, 또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적은 양 떼”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이 “적은 양 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며, 더구나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적은 양 떼”가 이리 떼 같은 세상 가운데서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개역개정은 ‘과거 부정사’인 “dou/nai”(두나이)를 미래형 “주시기를”로, ‘단순 과거’인 “euvdo,khsen”(유도케센)을 현재형 “기뻐하시느니라”로 번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왜냐하면 나약한 하나님의 자녀들, 즉 “적은 양 떼”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이지만, 아직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 상황에 있는 “적은 양 떼”가 이리 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적은 양 떼”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역개정의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는 번역은 예수님을 무지한 폭군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이리 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적은 양 떼”의 현재 위험한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통치가 언젠가는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무서워 말라”고 하시는 바보 같은 명령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번역 성경의 정교함은 주의 교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도 오역이나 정교하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다른 복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더구나 오역된 번역 성경을 의존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다른 복음’을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유수한 교단들은 성경 번역 상설 기구를 만들고, 정치적인 줄서기에 휘둘리지 않고 정말 실력 있는 번역자들의 선정과 최소한 10년 단위로 성경을 다시 번역하여 반복해서 개정하고, 가능하면 10년 단위로 개역한 성경을 출판하는 일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필자도 힘이 닿는 데까지, 물론 신약 성경에 제한되겠지만, 개역개정에 있는 오역들을 찾아내어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번역을 소개하는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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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