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신서와 전통적인 개혁신학이 정설로 가르치고 있는 언약 신학에 의하면 아담은 구원을 받기 위해 창조되었고,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한 자격을 스스로 준비했어야 했다. 전통적 개혁신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도 그렇게 이해하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 맺어진 첫 번째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셨고, 이 명령을 완전하게 성취한 후에 비로소 영생과 하늘의 구원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헤르만 바빙크, <찬송의 제사> (박재은 역)(다함, 2020), 26.)

바빙크에 의하면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된 아담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의 자격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영생을 청구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이 준비한 자격과 조건에 기초하여 그에게 영생을 주셔야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구원을 만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본래 신인협력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따라서 웨신서-바빙크 신학이 가르치는 아담의 원죄는 성경에서 벗어난다. 아담이 자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에 잘 협력하지 못한 것이 영원히 저주받고 용서받지 못할 원죄로 귀결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런 원죄는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 영원히 죽어야 할 원죄라고 말한다(호 6:7).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창조된 아담이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고 반역하고자 선악과를 도모한 것이 원죄라고 성경은 말한다.

원죄가 성경에서 벗어나면 구원을 주는 기독교 신앙이 될 수 없다. 문선명의 통일교와 그 모체가 되는 정 모씨의 사상, 그리고 그 아류들인 박태선, 정명석 등의 핵심적 특징은 성경의 원죄에서 벗어난 내용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원죄가 성경에서 벗어나면 꼭 이상한 일이 동반되게 된다. 점잖하게 벗어나면 점잖은 이단이 되고 노골적으로 벗어나면 노골적인 이단이 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또한 웨신서-바빙크의 창조-원죄-언약 개념을 진리로 믿으면 하나님이 아담을 임시적 생명 안에서 창조하셨다는 바르트의 거짓 신학이 정설로 변한다. 바르트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교제의 대상을 가지고자 아담을 영생과 무관한 상태로 창조하신 후 자기 존재에 동참하게 하려고 죄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신인합일을 이루었다고 했다. 바르트의 신학은 성경의 창조-타락-구속을 파괴하는 이단사상이다.

그래서 서철원 박사는 웨신서-바빙크가 가르치는 언약 개념을 추종하면 바르트의 거짓 신학으로 기울어지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언급했다. 
 

"행위언약에 매이면 발트 신학에 귀결하는 것이 필연적인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발트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제의 대상자를 갖기 위해 사람을 지으시고, 그와 교제하신 후, 그를 자기의 존재에까지 끌어올려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게 하신다 ... 하나님은 이런 완성된 인간 존재를 가지시기 위해 처음 창조시 그를 파편적이고 임시적으로 지으셨다. 이 임시성의 제거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루시고 그 성육신을 통하여 신인합일을 성취하신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개혁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도 그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할 때 인간이 임시적으로 창조되어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가르치므로 발트 신학에 귀결하도록 개진하였다. 이런 신학적 귀결들은 행위 언약의 잘못된 설정에 기인한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아담을 영생이 아닌 임시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하시었다고 볼 내용이 없다. 아담이 영생을 누릴 자격을 준비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겠다는 조건부 언약을 체결했다고 볼 근거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아담이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되었으나 교만하고 패역한 마음을 가졌고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영생을 잃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처해졌다고 한다. 칼빈도 창조 당시 아담의 상태와 원죄를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기독교강요, 2.1.4)

아담이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된 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능동적인 자세로 참여하여 자기의 구원을 스스로 성취했어야만 했다는 주장을 기독교 신학 속으로 매우 의미 있게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청교도 신학의 아버지 퍼킨스였다. 퍼킨스 이전에 그런 언약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 비슷한 내용의 언약 개념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기는 했다.

퍼킨스와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 더들리 패너가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다. 잉글랜드의 청교도 신학자였던 패너는 스승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가르침에서 행위언약 개념을 배웠다. 그리고 잉글랜드 국교회 속으로 장로교회 사상과 제도를 맨 처음 소개하였던 카트라이트는 국교회의 핍박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도피생활 동안 행위언약 개념을 접한 것으로 추측된다.(Joel R. Beeke & Mark Jones, A Puritan Theology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2), 218)

카트라이트와 패너 같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1580년대에 행위언약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말하게 된 것은 유럽의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영향이 잉글랜드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이전에 독일에서 출판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울시누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처음에 울시누스는 성경의 언약을 그리스도 이전까지의 구 언약(Old Covenant),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종말까지의 신 언약(New Covenant)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그때 울시누스의 관심은 단지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에 대해서만 집중되었다.(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33) 울시누스는 1562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a)에서 ‘창조의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227)
 

원종천 박사,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의 저자
원종천 박사,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의 저자

이때 울시누스가 말한 창조의 언약 개념이 현재의 행위언약 개념과 매우 유사했다. 원종천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때 울시누스가 말한 창조의 언약 개념에서 실질적으로 지금의 행위언약 개념이 발전되었다.(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33)

그러나 패너의 행위언약 개념은 지금 현재 개혁교회의 언약 신학으로 자리 잡은 행위언약 신학의 내용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현재의 개혁교회 신학으로 자리 잡은 그릇된 행위언약은 첫 사람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아담의 영생에 관한 조건적인 언약 개념이다. 잉글랜드의 청교도 패너가 처음으로 말한 행위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33) 패너는 단지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를 청교도 신학 속으로 맨 처음 도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부지런히 신봉하는 행위언약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속을 보여주는 성경의 핵심과 전체적인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도 아닌 아담이 영생의 조건을 스스로 성취하지 못하여 영생 획득에 실패했다면, 그것으로 그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 때문이다. 행위언약 개념으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신 죽으심의 필연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행위언약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담은 처음부터 하나님 백성이었고 영생과 모든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아담과 하나님의 언약은 영생을 위한 조건적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인 아담 사이의 영원한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고 아담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백성이 되기로 한 언약이었던 것이다. 웨신서-바빙크의 그릇된 행위언약 개념은 이와 같이 달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면 왜 개혁교회가 신봉하는 행위언약 신학이 이렇게 심히 성경을 왜곡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 개신교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방법으로 신학을 구성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신학 방법을 다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담과 하나님이 맺은 처음의 언약의 내용은 오직 ‘추론’(deductions)과 ‘귀결’(consequence)을 통해 추측되어야(gather) 한다”(Joel R. Beeke & Mark Jones, A Puritan Theology. 218)는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행위언약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 근거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개혁신학의 원리 밖에서 시작되었다. 행위언약 개념은 철학적 논리를 따라 성경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의 근본없는 사생아로 태어났으므로 울시누스, 패너 등에서 처음 그 개념이 출현할 때에도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장로교회 신앙의 표준문서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 없을지라도 추론과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이용하라고 권장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곧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관한 그의 모든 뜻은 성경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6항)

문론 건전한 (철학적) 추론의 방식으로 성경의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나님 자신의 처음의 언약을 철학적 추론과 필연적인 귀결의 방식으로 파악하도록 의도하셨을까? 아담의 원죄는 전체 인류 역사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원죄의 내용을 추론과 귀결이라는 스콜라 철학의 방식으로 알게 하셨을까?

퍼킨스는 그 이전의 엉성한 언약 개념들을 조직화하여 잉글랜드의 청교도 개혁운동 속으로 공식적이고 본격적인 형태로 도입하였다. 퍼킨스가 1591년에 출판한 자신의 대표작 <황금사슬>(A Golden Chain)에서 행위언약에 대해 어떻게 주장했는지 보자.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조건 하에서 영생을 얻는 것에 관한 인간과의 계약이다. 이 언약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약속과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약속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이행하면 당신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맹세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는 약속은 그가 하나님께 충성을 서약하고 그들 사이의 조건을 이행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 or the Discription of the theologie: Containing the order of the Causes of Saluation and Damnation, acording to Gods Word." The Works, vol 1, 32.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47)

퍼킨스는 하나님이 은혜와 영생 안에서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했다. 아담이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되었고 그 스스로 영생의 자격을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는 언약이 태초에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다는 매우 그릇된 언약 개념을 설정하였다.

“행위언약은 완전 순종을 조건으로 만들어진 언약이고, 이 조건은 윤리법으로 표현된다. 윤리법은 인간에게 그의 본질과 행동에서 완전한 순종을 명령하는 하나님 말씀의 부분이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금한다 ... 율법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을 요구하는 법과 그리고 순종과 결합되어 있는 조건이다. 그 조건은 율법을 완성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고,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다. 십계명은 율법의 축소판이요 행위언약이다.”(앞의 책)

퍼킨스는 필히 죽어야 하는 임시적 생명 안에서 창조된 아담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조건 하에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한 기준이 율법이었고, 그 율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형태로 주어졌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퍼킨스의 원죄와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성경에서 벗어나 있었고, 칼빈의 개혁신학으로부터 일찌감치 이탈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 구원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성경을 왜곡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경멸하고 다음과 같은 올바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구원은 첫 언약의 성취여서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에로 되돌아감이다. 이것이 신구약이 가르치는 중심 주제이므로 첫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는 전통적 개혁 신학의 이해를 바꾸는 것이 바르다는 것이 저자의 논의의 중심점의 하나이다."(하나님의 구속 경륜, 13)

"첫 언약도 영생 수여를 목적으로 체결되었다고 보는 전통적 가르침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첫 언약은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고, 하나님은 백성의 하나님 되시기로 한 약정으로 보아야 합당하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남는 길은 하나님께서 언약체결에서 내리신 계명을 준수함으로 이루어진다."(하나님의 구속 경륜, 13)

장로교 신앙의 표준의 자리에 있는 웨신서의 이 내용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사람이다.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2항)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