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목사(본명 김성훈)가 운영하는 블로그
김삼 목사(본명 김성훈)가 운영하는 블로그

오늘은 김 삼(본명 김성훈) 목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어떤 분의 방언 체험에 관한 간증의 글, “주님의 사람과 방언”(2008년 4월 23일)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간증의 글을 쓰신 분은 ‘수넴’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이고, 이 글을 게시한 사람은 김 삼 목사이다. 김 삼 목사가 이 간증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 간증의 모든 내용을 신학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 모두 기다리던 수넴님의 간증을 드디어 입수하여 여기 올리게 됨을 기뻐 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존영을 바칩니다! 수넴님 간증을 보니, 정말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돌보시나..또 우리가 영적으로 깨기를 얼마나 바라시나를 느끼게 됩니다. 또 이 마지막 때에 티엘티를 놀랍게 크게 들어 쓰심을 절감하게 됩니다.”(김삼 목사)

수넴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은 방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그날(교회의 구역예배) 주제가 은사와 방언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한 듯 부정적인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구역예배를 마칠 무렵 한 부인이 자신의 체험과 방언의 유익함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며, 마무리 기도를 본인이 하기 원한다고 한 후, 방언으로 한 문장 기도를 하고 그것을 통역하고, 다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통역하고, 그렇게 한 문장씩 방언과 통역을 번갈아 가며 마무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기도였습니다. 성경에서만 보던, 이전까지 부정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 방언기도가 실제로 제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방언에 대한 모든 성경의 표현은 “방언을 (사람들에게) 말한다”이다. '말한다'는 성경의 단어는 실제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방언이란 무슨 은사일까? 성경의 방언은 배우지 않는 어떤 실제 언어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이 말하게 하시는 때에만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계시적 은사이다. 하나님이 주신 방언 속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성경의 방언은 그 사람이 원할 때 임의로 사용할 수는 있는 언어의 능력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말하게 하시는 때에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실제 어떤 언어가 나타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방언에 대한 성경의 모든 표현들은 “(방언으로) 사람에게 말한다”이다.

성경에는 딱 한번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

많은 사람들이 이 한 구절을 근거로 사도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던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 표현에서 우리가 알아야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바울이 방언기도 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말로는 마치 바울이 방언기도를 하기도 했던 것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 표현을 통해 바울이 자신과 방언기도라는 것이 매우 이질적이고 생소한 관계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맞다. 바로 그 다음 내용은 바울의 신앙, 신학, 사상과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다.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바울의 신앙과 사상 속에 인간의 영혼은 알지만,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알지 못하는 신비적인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존재한다는 이론은 전혀 없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런 애매한 말을 했을까? 이런 이상한 방언기도 사상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과 광명의 천사들이 퍼뜨린 이단 사상이라고 보아야 옳다. 바울이 이단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성경의 방언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배우지 않은 실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은사임을 다음의 표현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4절)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5절)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13절)
‘내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18절)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27절)
‘방언 말하기를’(39절)

위 간증자가 구역예배에서 어떤 부인의 방언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사람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스스로 그것을 통역했다고 했다. 간증자에게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였다고 했다. 영언(방언)이 김삼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의 신비한 언어라면, 스스로 통역을 해서 주변의 다른 사람이 그 뜻을 알도록 해야할까? 그리고 자기의 방언기도를 스스로 통역하는 은사가 성경에 나오는가? 

이전의 글에서 김 삼 목사는 방언은 사람과 귀신이 그 뜻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뜻을 아는 ‘모르스 부호’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사람과 귀신이 뜻을 알지 못하는 방언(영언)를 어떤 사람에게 주셨다면, 끝까지 주변 사람들은 몰라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간증자가 구역예배에서 본 어떤 부인이 방언기도를 하고 스스로 통역하여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했다고 하였으나, 김삼 목사는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았다. 왜 그럴까? 성경의 방언에 대한 개념이 잡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성경은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고, 통역하는 또 다른 사람이 순서대로 통역하라고 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과 통역하는 사람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통역하는 방언의 은사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는가? 성경은 사람을 대상으로 말해지는 성령의 방언을 다른 사람이 통역한다고 한다. 그 자신이 통역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방언이 나타나는 현장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성도들의 모임)에서는 하지 말고 조용한 곳에 가서 자기 자신에게 방언을 하라고 바울은 말했다. 성경에 자기에게 말하는 방언의 은사가 나오는가? 통역자가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방언을 혼자서 자기에게 말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거짓 방언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우회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또 바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나님에게 말하라고 했다. 방언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에게 그 방언을 말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거짓 방언이니 하지 말고 집어 치우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억지 부리듯이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시어 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적인 말을 주시고자 하시면, 반드시 그것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함께 있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홀로 나타나는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방언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혼자서 취미로 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방언을 보내시고, 그만 통역하는 은사를 보내시는 것을 잊어버리실 수도 있을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분이니,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위 간증자가 구역 예배 때 방언기도하고 스스로 통역하는 어떤 사모님을 보고 아름답게 느껴지고 큰 도전을 받았다고 말하는 내용은 성경의 방언과는 관련이 없는 거짓 방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김 삼목사가 이런 이상한 방언 이야기를 오히려 극찬하였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많은 사람들이 읽고 미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내용은 그 곳에 모인 학생 부부들과 그 자녀들을 축복하는 기도였습니다. 방언기도가 그렇게 은혜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결혼 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남편도 처음 접해 본 방언기도에 무척 놀랐나 봅니다. 그 기도는 이전에 은사집회방송에서 보았던 기도가 아니고 따뜻하게 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기도였습니다. 그 부인을 통하여 그곳에 모인 주님의 자녀들에게 은사와 방언에 대한 편견을 없애 주시기 위한 주님의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구역 예배 때 스스로 방언기도하고 스스로 통역하였던 그 사모님의 방언기도의 내용은 그곳에 모인 유학생 부분을 축복하는 말들이었다고 한다. 그 사모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어떻게 간증자는 자신과 그곳에 모인 유학생들을 축복하는 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 사모님의 방언기도와 통역이 “하나님, 여기에 모인 유학생 부부들을 보호하여 주시고 은혜를 더 하여 주십시오!”라는 형태, 즉 땅의 사람에게서 하늘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보통의 간구의 기도였다면, 간증자는 “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기도였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었을까?

거짓된 방언기도를 하고 스스로 거짓되게 통역하는 대부분의 사이비 은사자들은 땅과 하늘의 다리가 되어주는 영매의 은사를 발휘한다. 시작할 때에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음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도와 예언이 어우러져서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를 시작한다. 거짓 방언기도로 시작하여 하늘의 음성을 가지고 오는 예언기도를 잘하는 방언 은사자들이 많다. 아마 그 사모님이 샤먼처럼 땅과 하늘의 소리를 섞어내는 거짓된 방언의 상당한 고수였던 모양이다. 중간에 예언기도가 나타나 함께 섞이지 않았다면, 위 간증자는 “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기도였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신대로, ‘예수님, 저는 지금 예수님을 저의 구주님, 저의 주님으로 시인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리신 것을 제 마음으로 믿습니다.’(롬 10:9).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는 성경 말씀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말씀대로 저를 구원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지옥 불 못에서 건져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 대신 저 천국을 소망 삼게 되니 하나님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님. 제가 이제 주님이 부어주신 성령침례를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맑 16:17a) 믿음으로 방언을 합니다. 도와주소서!’하고 기도를 한 후 방언으로 기도하려고 하였으나 처음에는 잘 안 되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기도 후 조용히 방언을 시도하는데, 이전부터 있었던 혀의 이상한 느낌이 다시 느껴지며, 혀가 스스로 움직이는 듯하여 저의 의지가 아닌 혀의 의지(?)로 움직이도록 가만히 맡겼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혀가 움직이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간증자는 김삼 목사에게서 배운대로 해서 기어코 방언기도(영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방언 기도의 은사를 집중적으로 구하면 뜻대로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가? 모든 성령의 은사들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그 뜻대로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가? 특별히 방언기도 은사를 받고자 소원하고, 그 비결을 배워서 실천함으로 기어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이론이 성경에 있는가? 왜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영언)만을 이렇게 집요하게 탐하는 것인가?

김삼 목사의 사상과 신학이 심히 우려스럽다. 이런 위험스러운 신앙을 가진 김삼 목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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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