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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총회 상상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칼빈에서 종교개혁 신학을 배운 존 낙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모든 면에서 칼빈주의를 지향했다.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헨리 8세의 재혼 문제로 인해 우발적으로 출현했고, 로마 가톨릭의 전통과 관습을 많이 유지하는 영국 국교회 중심으로 미온적인 종교개혁이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양측 사이에는 늘 긴장이 존재했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로 개명)이 되어 두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한 왕을 섬기며 연합되어진 두 나라 체제가 가능했던 이유는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7세(영국 국교회를 세운 헨리 8세의 아버지)의 증손주였고, 엘리자베스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교전쟁

두 나라를 다스리는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 종교개혁(장로교) 속으로 잉글랜드의 영국 국교회 제도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두 나라를 다스렸던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더욱 노골적으로 영국 국교회의 신학과 제도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속으로 전파하려고 압박했다. 1638년,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찰스 1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신앙과 제도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언약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일을 '국가 언약'(the National covenant)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때문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과 교회들이 초기에 '언약도'(covernanters)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운 언약도들은 그때 잉글랜드에서 보낸 국교회의 주교들을 모두 추방하고 그 자리에 언약도(장로교) 목회자들을 세웠다.

화가 난 찰스 1세는 추방당한 주교들을 복직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스코틀랜드를 압박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주교전쟁’, 즉 잉글랜드가 보낸 주교들을 스코틀랜드가 추방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러나 찰스 1세의 뜻대로 잉글랜드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집압하지 못했다. 찰스 1세는 천주교 인구가 많아 이용하기에 좋은 아일랜드(당시 아일랜도 또한 잉글랜드에 복속된 상태)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로 군대를 구성하여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찰스 1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양쪽에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찰스 1세는 아일랜드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법안을 통과하도록 잉글랜드 의회를 압박했다. 다수의 청교도 지지자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의회는 이전의 국교회 수호자 제임스 1세와도 관계가 어려는데, 그의 아들 찰스 1세와의 관계가 더욱 나빠졌다.  
 

잉글랜드 내전과 엄숙동맹

잉글랜드 의회와 국왕 찰스 1세는 서로를 제거해야만 하는 전쟁에 돌입했다. 이것이 ‘잉글랜드 내전’ 또는 ‘청교도 혁명’이다. 1642-1646년 동안의 전쟁을 1차 내전으로, 1648-1649년 동안의 전쟁을 2차 내전으로 구분한다. 천주교 문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혼란의 배후에 천주교의 회복과 확장을 꾀하였던 예수회가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전의 초기에는 정규 군대를 보유한 국왕과 그를 지지하는 왕당파가 우세했다. 전세가 불리했던 잉글랜드 의회 쪽에서 찰스 1세를 대적하는 스코틀랜드의 장로파들에게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파는 잉글랜드 의회 측과 중요한 내용의 합의를 본 후 군대를 보냈다. 그들 사이의 협정을 ‘엄숙한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라고 한다. 그 협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잉글랜드 내전을 종식한 후 세 나라(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는 잉글랜드에 완전복속 상태)에 하나의 개혁교회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이 주장했던 하나의 개혁된 교회란 장로교회를 의미했다.


웨스터민스터 총회

잉글랜드에서는 회중파 청교도가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요구를 수용하여 ‘엄숙한 동맹과 언약’을 체결한 이유는 국왕과 왕당파 군대를 이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1643년, 내전의 와중에서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의 비협조를 무릎 쓰고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다. 국왕과 왕당파가 지지하는 영국 국교회를 대체할 하나의 개혁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121명의 성직자(국교회의 주교가 아닌 청교도 목회자)들로 구성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에서도 5명의 목회자와 3명의 장로를 별도로 파송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부터 5년 6개월 동안, 1,163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 결과로서 ‘예배모범’(1645년), ‘장로교회 정치규범’(1645년), ‘신앙고백서’(1646), ‘대.소요리문답’(1648년)이 탄생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회중파 청교도 신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의 지도력과 선전으로 점차 의회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546년, 찰스 1세의 항복으로 내전은 끝났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처음부터 각 나라의 왕을 인정하자고 주장한 스코틀랜드 장로파가 내전에서 패한 찰스 1세에게서 잉글랜드에서도 장로교를 인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를 여전히 잉글랜드의 왕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회중파 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과 회중파 청교도들은 찰스 1세의 폐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648년, 찰스 1세는 스크틀랜드 장로파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나, 크롬웰에게 패하여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648년, 크롬웰은 잉글랜드 의회에서 잉글랜드 장로파 인물들을 전부 추방하였다. 잉글랜드 내전에서 이기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와 스크틀랜드 장로파가 협약한 ‘엄숙한 동맹과 언약’, 즉 세 나라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자 했던 약속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하나의 개혁된 교회(장로교회)를 세우자며 함께 만들었던 웨민고백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1658년, 크롬웰의 궁정목사였던 회중파 청교도 신학의 황태자 존 오웬, 그리고 브릿지, 카릴 등이 중심되어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의 신앙고백서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tion)이 작성되었다.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가 세 나라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자면서 장로파 청교도들과 함께 작성한 웨민고백서를 공개적으로 버린 것이다. 이후 회중파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의 길을 개척하였다.

왜민고백서 속에 너무도 이상하고, 어거스틴이나 칼빈 등이 전혀 가르치지 않았던 비성경적인 '행위언약'(19장 1,2항) 사상이 삽입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 때문이다. 칭의를 얻는 길이 '오직 율법준수'라고 믿었고, 사람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예수가 대신 지켜 사람에게 칭의를 전가한다는 비성경적인 칭의 사상을 가진 회중파 청교도 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잉글랜드 독립회중파 계열의 청교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독립회중파는 영국 국교회 안에 남아서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이고 분리회중파는 일찍부터 영국 국교회를 떠나 새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청교도들이다.  분리회중파에 의해 대서양 건너 신대륙 이주가 시작되었다.)

웨민고백서에 비성경적인 행위언약 사상이 삽입되도록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신학자들의 명단을 뽑아보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

폴 베인즈(Paul Baynes, 1573-1617)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존 하우(John Howe,1630-1705)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k, 1628-1680)

존 번연(John Bunyan, 1628-1699)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

메튜 폴(Matthew Poole, 1624-1679)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이중에서 웨스터민스터 총회에 직접 참여하여 비성경적인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신학이 웨민고백서에 반영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유명한 회중파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1) 토마스 굿윈

크롬웰의 보호 아래 회중파 독립교회가 번성하도록 큰 역할을 했고,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의 회원이었다. 웨민총회 회의기간 동안 회중파 독립교회 신학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과의 논쟁에서 회중파 사상을 설파하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나중에 장로파와 결별한 후 회중파 청교도만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보이 종교회의’(The Savoy Conference)에서도 존 오웬, 브릿지, 카릴 등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회중파 청교도의 신앙고백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을 만드는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토마스 왓슨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신학의 성지 케임브릿지 임마누엘 칼리지 석사 출신이고,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이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직접 참석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고, 소요리문답 작성한 인물이다.


3) 토마스 맨톤

올리버 크롬웰의 교구목사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서기로 활동하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회중파 청교도의 인물이다.

앞으로 계속 찾고 연구하면 웨민고백서 작성에 관여한 회중파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라도 장로교회는 웨민고백서가 장로교 조상들만 모여서 장로교의 신앙고백서가 되기를 바라는 목적하에 만들어진 장로교 신앙의 표준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뜻이 있고 지각이 있는 장로교 신학자들은 웨민고백서 속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나쁜 신학 요소들을 드러내기 위한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문론 웨민고백서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장로교 신앙에 합당하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 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서요한 교수
서요한 교수

청교도 사상에 대한 연구가 깊은 서요한 교수의 글에 의하면 웨민총회의 회원의 절대 다수는 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들이었고, 잉글랜드 독립회중파 청교도 회원의 숫자는 12명이었다. 그런데 그 12명은 비록 전체 회원의 다수는 아니었으나 전체 회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그 시대의 유력하고 유능한 인물들이었다. 서요한 교수는 필자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다음의 네 명도 독립회중파 청교도들도 웨민총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예레미야 바로우

윌리암 브리지

필립 나이

시드락 심슨 

서요한 교수는 웨민총회에 참석하여 강한 영향을 미치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에 대해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립파(Independent): 이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능력과 경건, 대중적인 인지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회의 시 매우 명예로운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특히 장로교 정치 형태를 완강히 반대하고 회중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토마스 굳윈, 예레미야 바로우, 윌리암 브리지, 필립 나이, 시드락 심슨 등 12명이었다.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에서 이들은 회중 또는 회중제도가 최고의 권위 있는 교회 재판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과 재판 개정 기간에는 상고할 수 없으며, 다른 회중 교회로부터 파송된 목사나 장로들로 구성된 대회는 단지 충고와 자문 권만 가질 뿐이다.” (서요한, 영국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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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교도 시대의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정치 상황,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 서약파 운동, 주교 전쟁, 잉글랜드 내전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백과>를 이용했다.

2)잉글랜드 내전 중에 일어난 스크틀랜드 장로파와 잉글랜드 외회군의 협약 ‘엄숙한 동맹과 서약’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상황에 대한 정보들은 김병훈 교수의 “웨스터민스터 총회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에 근거했다.

3)잉글랜드 내전 직후 벌어진 스코틀랜드 장로파, 잉그랜드 장로파와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회중파 신자 올리버 크롬웰)이 역사적, 신앙적 길을 달리하게 되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1)번과 관련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백과>를 통해 얻은 정보들에 근거했고, 필자의 해석을 첨가하였다.

4)유력한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 학자들의 명단은 필자가 평소에 다양한 경로로 파악하고 메모해 두었던 정보들에 근거했고, 특히 원종천 교수의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서요한 교수의 <청교도 유산>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많이 의존했다.

5)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직접 참가하여 회중파 신학이 웨민고백서에 반영되게 만든 유력한 회중파 청교도 신학자들 3명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에서 한명씩 검색하여 얻은 자료에 근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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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