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7 23:02 (금)
예언 영성을 좇는 코스타 강사 이용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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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영성을 좇는 코스타 강사 이용규 선교사
  • 정이철
  • 승인 2014.10.27 21:33
  •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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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검 2018-07-31 09:49:09
ghf=홀=룻= 이렇게 등식이 성립하네요
조금더 정직하셨으면 합니다 룻씨
그렇게 이름을 바꿔가며 속임수를 쓸 이유가 있나요?
원래 사단의 미혹하는 성깔이 그렇게
자꾸변신을 해가며 미혹하는데

자 그러면 귀하가 주석을 자꾸 언급하는데 주석 누가

바울처럼 2018-07-31 00:31:52
고전14장1절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부터 뒤부분 "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주석적으로 말하면, 여기에서의 방언은 룻(홀)님이 좋아라하는 그 방언이 아니라네~~ㅋ

평신도 2018-07-30 14:37:42
마13:14-16절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어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똑같은 그림인데 누구는 감동을 받고 누구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게 무슨 그림이냐 하기도 합니다.

창모님의 글이 제 마음에 와닿고 감동이 되는 것은 같은 한 성령안에서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성령을 소멸하거나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리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어떻게 이리 달리 해석하는지!

홀님 안에 역사하는 영은 제 안에 있는 영과 다른 것 같습니다. 본인도 창모님이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판단하실 것이고 이것은 깨닫게 해주는 영이 틀리기 때문에 서로 합의를 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창모 2018-07-30 13:53:53
위 글 나머지입니다....

또 40절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지만, 전후 문맥상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에 대한 명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먼저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을 “품위 있게 하고”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품위 있게 하라”의 헬라어 ‘유스케모노스(euvschmo,nwj)’는 상황에 ‘알맞게’(decently), ‘어울리게’(becomingly)<각주: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New Testament(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p.327; 김승교, 신양 원어 강해-고린도전서(서울: 로고스, 2008), p.211>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상황에 알맞게(어울리게)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에 알맞게,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외국인이 왔을 때는 상황에 알맞게 외국인을 위해 ‘방언’을 말하고, 현지인 신자들을 위해서는 상황에 알맞게 방언을 통역하라는 말이며, 외국인이 없을 때는 상황에 알맞게 예언만 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명령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하려는 말은 결국 “예배에서 거짓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바울은 예배에서 행해지는 예언과 방언을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인간이 스스로 차례를 정해 놓고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차례를 정하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서 있게 하라”는 말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예배의 질서는 저절로 유지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하는 거짓 은사가 있다면 예배는 결코 질서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은사를 행하는 자들은 결코 성령이 역사하시는 대로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명령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하려는 말도 결국 “예배에서 거짓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창모 2018-07-30 13:51:59
'홀'님이여! 하나만 보고, 전체 속에서 하나를 보지 못하는...목아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존 길지만 귀하를 위해 올립니다. 성실히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39-40).

본문은 고린도전서 12-14장 전체의 결론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강조해 왔던 것처럼 마지막 부탁에서도 일관되게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왜냐하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언 수용을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는 것일까? 만약 이 명령이 방옹자들의 주장대로 개인용 방언, 즉 방언기도에 대한 것이라면 “금하지 말라”는 명령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하는 방언기도는 이미 28절에서 금하도록 명령했고, 교회가 아닌 장소에서 혼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는 교회가 “금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방언은 예배에서 외국인에게 들려주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거짓 방언의 폐해를 지적하며 직간접적으로 그것을 금하도록 고린도 교회에 명령했다. 왜냐하면 거짓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며, 더 나아가 지체들 간에 서로 외국인이 되게 하므로 교회를 파괴하는 악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금지 명령 때문에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가 혹시 어쩌다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왔을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마저 금하는 일이 생길까봐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방언을 하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지만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금하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언은 적극적으로 하고 거짓 방언은 금하되, 성령의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까지 금하지 않도록 39절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각주: 본문에서 ‘금하다(forbid)’로 번역된 헬라어 ‘콜뤼오’(kwlu,w)는 ‘훼방하다(prevent), 억제하다(withhold)’의 의미도 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강해, 정옥배 옮김(서울: IVP, 1999), p.341. 따라서 본문의 ‘콜뤼오’(kwlu,w)를 ‘훼방하다’의 의미로 본다면, 바울의 이 명령은 예배에서 거짓 방언을 마구 함으로써 외국인에게 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언 말하기’를 훼방해 왔던 거짓 방언자들에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이것마저도 바울이 방언기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각주: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8), p.84;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77 등 이 본문을 언급하는 방옹자들의 모든 책에서 동일한 주장을 편다.> 방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말라고 비난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언을 강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언을 강조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바울은 예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추구’를, 방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수용’을 고린도 교회에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바울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방옹자들은 왜 예언보다 방언을 더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일까?(물론 바울이 소극적으로 수용하도록 말한 방언도 방옹자들의 방언기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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